행복해지기 위해선‘느림’필요
행복해지기 위해선‘느림’필요
  • 이은영 기자
  • 승인 2011.03.2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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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현 한국슬로시티본부 이사장 인터뷰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가장 단시간에 경제성장 이룬 나라로 꼽힌다. 한국 특유의 추진력 덕분에 현재 많은 것을 누리고 있지만 그만큼 피해를 입은 것 또한 많다.
심지어 한국 특유의‘빨리빨리’문화 때문에 한 피자배달원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기까지 했다.
한때‘느림의 미학’이라는 표현과 생활방식이 한국사회에 유행처럼 퍼지긴 했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속도전을 치르며 살고 있다. 여기에 뉴타운과 4대강 사업으로 주거공간은 물론 자연환경까지 뒤엎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슬로시티의 이탈리아식 표현인‘치타슬로(Cittaslow)’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치타슬로는 1999년부터 이탈리아 한 지역에서 시작된‘느린 마을’만들기 운동으로 지역이 원래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자연환경과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지역민이 주체가 되는 지역 살리기 운동이다. 빠르게 변화하며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연환경 속에서 자연을 느끼며 그 지역의 먹거리와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서울문화투데이는 우리에게 슬로시티를 통해‘느림’을 강조하고 있는 한양대 명예교수 손대현 한국슬로시티본부 이사장을 만났다. 슬로시티는 무슨 운동이며, 21세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듣기 위해서다.

아직은 일반에 생소할 수도 있는 슬로시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1998년 IMF사태 당시 <재미>라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책에‘우리가 산업화로 인해 너무 치열하고 숨 가쁘게 달려왔는데 이 과정에서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왔다.’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이러다 IMF사태를 맞게 됐는데 이것을 계기로 우리가 뒤도 돌아보고, 옆도 보는, 소위 느린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글로 쓰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크지 않았습니다.

대부분‘긍정은 하나 어쩔 수 없다.’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운동을 하고자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조사를 마치고 세계 최초 슬로시티인 이탈리아 토스카나(Toscana)주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i) 지역에 갔습니다. 가보니‘아 이렇게 사는 방법이 있구나.’하고 놀랐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은 포도주도 2000년 동안 내려오는 전통 방식으로 제조하고 있었습니다. 관련 상품도 140여 가지나 있었습니다.
전통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삶을 즐기는 그 지역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우리도 각 지방의 특색을 살려 잘 만든다면 세계적인 상품으로 만들 수 있겠구나.’싶었습니다. 한국슬로시티 구상의 기본공식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탈리아와는 참 묘한 인연인 것 같습니다. 디자인 분야도 아닌 경영학 공부를 위해 이탈리아로 유학 가는 것도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스페인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속담 중에‘스페인어 할 줄 아는 사람이 이탈리아에 가면 밥은 안 굶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두 언어 사이에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언어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또 친화력 있게 먼저 다가가니까 그 지방 사람들과 금방 친해졌습니다.

그럼 한국에 슬로시티가 탄생한 시기는 언제입니까?
귀국한 뒤 2005년 11월 17일에 한국슬로시티를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2년 동안 작업을 진행해서 2007년 12월 1일에 아시아지역 최초로 전라남도 4곳(신안, 완도, 장흥, 담양)이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인증을 받았습니다.
2년 동안 저뿐만 아니라 국제슬로시티연맹 관계자들도 몇 번이고 오갔습니다. 아무래도 아시아 지역 최초의 도입 시도이기 때문에‘한국에서 슬로시티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경상남도 하동, 충청남도 예산, 전라북도 전주와 경기도 남양주까지 현재 총 8곳이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인증을 받은 상태입니다. 경북 상주도 실사를 받았고 강원도 영월에서도 인증을 신청해서 올해 6월에 실사에 들어갑니다. 보통 6개월에서 10개월가량 소요되는데 올 하반기에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인증을 받은 국가는 얼마나 있습니까?
2011년 3월 현재 25개국 148개 지역이 인증을 받았습니다. 유럽에 127개 슬로시티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탈리아(73곳)에 가장 많이 위치해 있습니다. 아시아에는 우리나라와 터키, 중국에 슬로시티가 있는데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슬로시티로 인증받기 위해서 지역이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기준이 있을텐데요.
대분류 6가지, 소분류 26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자연생태보고가 잘 보존되어 있느냐.’입니다.
둘째는‘전통문화가 잘 지켜져 있느냐.’셋째는‘슬로푸드가 제대로 갖춰져 있느냐.’, 그다음으로‘그 지역의 특산품, 공예품이 있느냐. 장인이 있느냐.’까지 포함됩니다.
마지막으로는‘그 지역의 주민들이 슬로시티에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지고 참여하느냐.’입니다.

한국 슬로시티의 특징은 뭘까요?
슬로시티는 정말 아름다운 프로젝트입니다. 과거 우리의 경험과 비교해보면 새마을운동은 관제운동적 성격이 강했지만 슬로시티는 민간운동입니다.
당시 새마을운동은 획일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현대화 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이때 각 지역마다 존재하던 고유한 전통문화들도 침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슬로시티는 각 지방의 고유한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반드시 살리려하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슬로시티 모두 지역마다 특색이 다릅니다. 물론 외국의 슬로시티와도 다릅니다.

일부 지역의 특색이 그 지역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일부 지역의 특색이 정말 잘 보존·발전 되고 있다면 지역 전체까지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 아직 그런 사례는 없지만 한국슬로시티본부에서 적극 지원할 생각입니다.

‘느림의 미학’이 슬로시티의 철학이라 볼 수 있을지요?
슬로시티를 설명하는데 느림의 미학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합니다. 느림 속에서 전통문화, 자연환경, 인간관계를 되살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슬로시티정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슬로시티는 파괴되고 있는 자연환경을 되살리자는 측면에서 죽음의 문화를 살림의 문화로 바꾸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이 살 수 없듯이 실존적인 삶과 생명에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사회에 슬로시티정신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국민들은 세계적으로 빠른 민족 중의 하나입니다. 주변국인 중국이나 일본 국민과 비교해도 우리나라 국민들이 월등히 빠른 것을 추구합니다. 중국은 만만디(慢慢的) 정신이 워낙 유명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각 국가에 있는 패스트푸드점마다 제품이 제공돼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한국에서는 그 시간이 30초인데 반해 일본에서는 53초라고 합니다. 이렇게 단적인 예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국민들이 얼마나 빠른 것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스마트폰, 태플릿PC, SNS 등과 같이 속도와 관련된 디지털 문화가 접목 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주변의 환경은 물론 인간관계까지 모두 파괴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 모두‘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상대방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풍부하게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을 조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빠른 흐름 속에서도 느리게 갈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의 양도 중요하고 질도 중요합니다. 농촌과 도시가 함께, 로컬과 글로벌이 조화롭게 가야합니다.

어떻게 하면 도시에서도 슬로시티정신을 구현할 수 있을까요?
슬로시티 협력도시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시 인구나 규모 등 슬로시티로서 갖춰야 할 기본 요건에서는 벗어나지만 슬로시티의 철학에 동참하고 자연 및 전통문화, 지역커뮤니티 활성화와 같은 슬로시티의 정신을 중점적으로 시정에 반영하는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2009년 11월에 부산시가 세계최초 슬로시티 협력도시로 가입했습니다. 부산시내 지역예술인들의 작업을 통해 슬로시티의 철학과 이념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올드타운을 조성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뉴타운만 개발할 것이 아니라 올드타운을 지어야 합니다. 도시 안에서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자는 것이 협력도시의 기본정신입니다. 도심 건물 옥상에 녹지를 조성하듯이 도시 내의 자투리 땅을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인들도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합니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점검도 필요할 것 같은데요.
슬로시티 인증 후 2~3년이 지난 뒤에 중간평가를 실시할 계획입니다. 현재 외국에서 운영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중간평가로 인해 각 지역의 슬로시티가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게 운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슬로시티로 인증된 후 관광·홍보효과는 얼마나 늘었습니까?
지난해의 경우 관광객이 14배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관광객 급증으로 인한 환경피해도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문객 수를 제한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합니다. 지그메 싱예 왕추크 전 부탄 국왕은 좋은 발전이란 한 사회에 행복과 웰빙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정의하고“경제지수보다는 행복지수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부탄과 비교해서 우리나라는 현재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슬로시티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해지자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사장님께서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인간과 공간, 시간이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공간이 쾌적해야하고 시대와 조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현대인들은 너무 괴롭게 살고 있습니다.‘선(先)진국’이 아니라 ‘선(善)진국’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