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만 칼럼]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옴부즈만 칼럼]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 대해
  • 최진용/문화예술경영연구소장
  • 승인 2009.04.15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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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론 찬탄 과연 옳은가?

도마 안중근 선생 서거 100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를 그리는 작품들이 대거 쏟아져 나올 예정이다. 벌써 100년전 일이라니. 안중근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다시금 등장하고,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를 또 한번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의 총성 뿐만이 아니라, 나름의 학자적 식견을 가지고 개화기 조선의 명운을 파악하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에서부터 전파된 동양평화론에 깊이 감명받고 그것이 조선과 동양이 외세에 의해 농락당하지 않고 주권을 지닌채 근대화를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박기훈 기자의 특집기사에도 잘 실려있는 내용이지만, 한 가지 틀린 점이 있다면, 박기훈 기자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찬탄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만약, 박기훈 기자의 평대로 ‘동양은 일본을 맹주로 하여(35호 1면)’ 동양평화론을 구상해 나간다고 했을 때, 조선 침략에 있어 온건파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동양평화론이 지니는 맹점에서 기인한다. 동양평화론의 모체가 되는 아시아주의는 일본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동양과 민족이라는 거대 서사의 흐름 속에 일본이 타국을 침략하는 것에 대한 명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이사가 말하는 동양평화론은 이 부분에서 상충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독립이 보장된 상태에서(1면)’ 발전해야한다는 전제가 아예 일본 내부의 사상가들에게는 배제돼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본을 주체로, 동양의 각 나라들이 일본에 종속된 상태로 근대화되기를 원했고, 이것은 안중근 의사가 지니는 국가의 자존적 정체성을 무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서 기인한 동양평화론과는 다른 엄밀한 의미로서 진정한 ‘동양평화론’을 주장했다.

그렇게 봤을 때,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에서 행한 저격은 어떤 의미로는 사상의 흐름 속에 숨겨진 일본식 ‘평화’에 대한 분기(憤氣)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바라는 동양 평화론은 어떻게 보든지 간에 평등한 시선으로 평등하게 동양의 각 나라가 근대화의 과정을 맞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식의 근대화과정이 국가 간의 이해 속에서 힘든 것이기는 했지만, 주권을 침탈당하는 입장에 있던 국민의 한 사람이 국가를 초월한 동양정세에 대한 전망과 이상을 품었다는 것은 대단히 감명 깊은 일이다.

얼마전 일부 국회의원들이 자위대 창설 기념식에 참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위대가 무엇인가? 일본식 동양평화가 낳았던 천황숭배적 파시즘의 희생자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일본의 군대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군대의 창설 기념식에 식민지 경험이 무려 36년이나 있는 한국의 국회의원이 참석했다니.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모두가 평등한 가운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의 관료들은 일본과의 문제에 있어 평등해질 수 있도록 과거 문제를 잊는 것이 아니라, 과거 문제를 해결한 다음,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평등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