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5)
[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5)
  • 박춘재 일대기
  • 승인 2011.06.0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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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동 부부의 외아들

명절이나 보름날이 아니더라도 그런 패들은 수시로 이곳을 드나들곤 했던 것이다. 패들 중에서 단연 인기가 있던 패들은 서울 인근의 소리패들이었다. 뚝섬패, 왕십리패, 동막패, 마전다리패, 방아다리패, 호조다리패 등이 특히 유명했다. 무악재 너머 녹번고개 너머 녹번리패, 그보다 더 위쪽으로 연신내패도 못지 않게 유명했다. 그런 패들은 대개 서울소리를 주로 했다. 전문 모갑이가 있고, 기생도 끼어 있어 인기가 있었다. 

어린 박춘재는 허구한날 이런 놀이판을 따라다녔다. 같이 춤추기도 하고, 소리도 따라 불렀다. 할 줄도 모르지만 장고채를 잡고 휘둘러보기도 했다. 따라다니다 보니 낯이 익은 사람도 있고, 눈여겨보는 이도 있었다. 밥도 먹여주고, 떡도 사주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 저것 시키면 말도 잘 들었다. 소리꾼, 춤꾼들과 어울려 다닐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힘들어도 날이 저물어도 잘도 따라다녔다.

여덟 살 때부터 동네 서당에 다녔는데 하루는 춘재가 나오지 않으니 어떻게 된 거냐는 훈장의 전갈에 여기저기 찾아보니 어정판에서 돼지머리를 붙들고 있었다. 고사가 끝나고 음복을 하는데 안주거리를 장만하는 사람을 돕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기가막혀 인왕산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담뱃대만 뻑뻑 빨아댔다.

열 살되던 해 봄에는 서지 넘어 애오개쪽에 갔다오더니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당시 그곳 반송방에는 소리를 가르치는 선생이 몇 사람 있었다. 주로 열 살 안팎 어린아이들에게 잡가를 가르치는데 배우러 오는 아이들 중 여자아이들은 기생으로 나가기 위한 기량을 닦기 위한 경우가 많았고, 사내아이들은 소리선생의 친지들이 자제들에게 취미삼아 가르치기 위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춘재는 다니던 첫날부터 사설의 내용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해대는 바람에 갈등을 빚었다.

춘재에게는 그것이 절실한 문제였다. 소리꾼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는데 어느날 가만 들어보니 똑같은 노래인데 사람마다 그 사설을 달리한다는 사실을 알고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한 것이다. 소리선생은 알 것이므로 정식으로 배우고자 한 것인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간단한 타령조라면 몇 번 들어서 외울 정도가 되었지만 가사나 시조같이 한문구가 들어가 있는 것은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부분이 중국의 고전에서 인용해온 것이어서 한문을 모르고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그 세계였던 것이다.

남도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춘향전 한 가지만 놓고 보더라도 그 사설의 의미에 대해 제대로 알고 부르는 사람은 사실 몇 사람 되지 않았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알고보면 명문장이었지만 그 뜻을 모르니까 그저 무턱대고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까 노래가 아니라 그냥 소리에 불과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소리의 전승이 대개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었다. 입으로 전해지고, 마음으로 가르쳐온 것이다. 한 자 한 자 적어서 그 뜻을 알게 해주고 그 뜻에 맞는 소리를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니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구전심수에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 선생이 혼자 또는 몇 사람의 제자들을 앞에 앉혀 놓고 직접 얼굴을 마주 대한 채 가르쳐 주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그 어느 경우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인간적인 체취가 우러나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 선생이 춘재같은 학생을 만나게 되면 당황하게 마련이었다. 자신도 실은 춘재처럼 묻고 싶었지만 아니 물은 적도 있지만 돌아온 답변은 언제나 한 가지였기 때문이다. 소리를 정식으로 배우고 싶다던 춘재의 뜻은 좌절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