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6)
[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6)
  • 박춘재 일대기
  • 승인 2011.06.0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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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 이판동 부부의 외아들

동네 소리선생은 춘재를 만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 구전심수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춘재는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리방이 그곳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방 그 세계가 제법 넓게 퍼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00년 무렵, 서울 인근에서 잡가를 좀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방면 명창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 면면이 대개 알려져 있었다. 여자로는 소위 말하는 삼패가 잘 불렀다. 그들은 속칭 기생을 일패, 이패, 삼패로 나눌 때 특별한 기량이 없이 잡가를 잘 불러 놀이판에 불려다니는 사삿기생들을 말하는 것인데 주로 수표교 인근에 모여 살았다. 반면 남자들로는 대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성안팎에서 장이로 생업을 삼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로 사계축에 있었다. 계(契)는 행정구역명으로 네 군데 계의 중심지역을 말한다. 그 중심지역은 다름아닌 청파동이었다. 이곳 사람들 중에 소리 잘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의 소리꾼들은 그들이 사는 지역을 사계축이라 부른 것이다. 다음으로 명 소리꾼으로 알려진 사람들로는 갈매장이, 마전장이, 창호장이, 끈장이, 갓바치장이, 갓모장이, 나막신장이 등이 있었고, 새우젓장사나 짐방꾼도 있었다.

사계축의 명창으로는 추교신, 조기준, 박춘경이 가장 유명했다. 추교신은 조기준을 제자로 배출했고, 조기준의 제자가 바로 박춘경이었다. 이들 삼대 명창은 워낙 유명해서 서울의 소리꾼들은 그들을 가리켜 특별히 추조박이라고 했다. 이름의 첫 자만 따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다. 유명도에 있어서 절대적이다 시피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로부터 배운 사람들이 서울 인근에 퍼져 살면서 계속 제자들을 길러냈기 때문이었다.

장이들 중에서 유명한 이로는 모화관 인근의 갈매장이로 임기준이 있었고, 시구문 쪽의 끈장이 황명선, 쌍림동의 갓바치장이 엄태영, 누각골의 갓모장이 최상욱, 양사골의 나막신장이 한인호가 있었다. 이밖에 마포 새우젓장사 김태운, 뚝섬 짐방꾼 이태문도 명창의 반열에 올리기에 손색이 없다 했다. 동대문 밖에 사는 원범산, 마포에 사는 최경식, 뚝섬의 이동원도 자주 입에 오르는 소리꾼들이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선소리패였다. 산타령을 서서 부른다 하여 선소리라 하는데 여럿이 해야 하기 때문에 지도자격인 모갑이를 중심으로 조직을 이루어 활동했다. 뚝섬패의 이태문이나 동막패의 권춘경은 선배로서 존경을 받았다. 특히 뚝섬패가 유명했는데 그곳의 황기운과 이동식, 이동운 형제는 모두 이태문의 제자들이었다. 왕십리패의 하순일과 이명길, 진고개 호조다리패의 여류명창 월선이, 그리고 김응렬, 김병규, 배오개 마전다리패의 박삼쇠, 과천 방아다리패의 소완준, 한인택 등도 내로라하는 선소리패의 명창들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서울의 명창들은 성안에도 있었고, 성바깥에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수족을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는 생업 현장의 인물들이었다. 원래 서울의 소리란 이른바 우대 아래대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었다. 우대란 서북쪽 방면인 인왕산 아래 지역으로 주로 선비들이 가곡이나 시조창을 불렀고, 아래대란 동남쪽 방면인 동대문 바깥 지역으로 주로 농부들이나 장인들이 민요나 산타령을 불렀다. 그러던 것이 그 모든 노래들이 잡가라는 명칭 하나로 묶여 서울 전지역에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잡가에는 판소리의 일부도 섞여 있었다. 가곡, 시조는 물론 서울에 모인 모든 노래들이 섞여 있었다. 소리엔 이미 신분의 벽이 없었고, 지역의 차이가 없었다. 서도의 소리까지 모두 모여 잡가로 통하고 있었다.

어린 박춘재가 그중에서 가장 먼저 안 이름은 박춘경이었다. 유산가라는 곡을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춘재는 그 이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집착한 일이었지만 그의 생애 진로를 바꾸어 놓은 우연 아닌 우연의 사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