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7)
[연재소설]조선 일류 가객, 박춘재 (7)
  • 박춘재 일대기
  • 승인 2011.06.01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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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 박춘경의 제자가 되다

춘재는 열 살이 되던 해 초겨울부터 청파동 박춘경의 움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박춘경은 찾아온 춘재를 보고 잘하는 소리를 한 번 해보라 하고는 무당소리 흉내를 내자 대뜸 물었다.
 “어머니가 무당이냐?”
아니라고 간단하게 대답하자 고개를 젖히고 큰소리로 웃어댔다. 이제는 틀렸구나, 했는데 선생이 또 말했다.
 “그럼 이모가 무당이냐?”
 그것도 아니라고 하자 이번엔 아버지가 박수냐고 물었다.
 “다 아닙니다. 보고 흉내낸 겁니다.”
 그러자 선생이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니가 박수로구나.”
매달 내는 수업료는 20원으로 하기로 했다. 쌀 반가마값이었다. 학생수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중에는 춘재보다 서너 살이 위인 처녀도 둘이나 있었다. 수업은 오후부터 시작되었는데 먼저 한문공부부터 했다. 선생이 따로 있었다. 박춘경의 제자라고 했다. 박춘경한테서 소리뿐이 아니라 한문도 배운 사람이 많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첫날부터 춘재는 배우는 것에 만족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베끼고 외웠다. 박춘경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기도 했지만 춘재가 먼저 앞서 나가자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박춘경의 움집이란 겨울이 되면서 남쪽 파밭에 지은 가건물을 말하는 것이었다. 석 자 정도를 파고 벽채와 지붕을 올린 집인데 안으로 들어가면 어른 키보다 훨씬 높은 천정에 삼십 명쯤 들어앉을 수 있도록 장방형의 바닥을 만들어 놓은 공간이었다.

밖에서는 칼바람이 불어오고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훈훈하게 느껴졌다. 문은 남쪽으로 나 있었고, 벽쪽으로는 파가 심어져 있어 파란 잎이 그대로 있었다. 그곳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박춘경과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인근의 소리꾼도 있었고, 악기를 들고 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꼭 뵙고 싶어 왔다면서 가마에서 내리는 기생들도 있었다. 멀리 안성, 수원 아니 개성, 평양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올 때마다 손에 뭔가 들고 오는데 선물인 게 분명했다. 박춘경은 바로 옆 안채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는데 겨울이 되면서부터는 그런 손님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을 이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여자 외국인이 와서는 학생들이 한문수학하는 광경을 유심히 살핀 적도 있었다.

여자는 어떤 조선인 화가를 대동하고 왔다. 손짓과 몸짓으로 보아 공부하는 광경을 그려달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화가는 이틀이나 묵으면서 한문공부는 물론 저녁에 소리공부하는 광경, 그리고 움집 전체까지 모두 화폭에 담았다.

손님들이 오는 날이면 움집엔 밤늦도록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아무리 크게 떠들고 밤늦도록 소리를 해도 다른 곳에는 들리지 않으므로 방해가 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춘재는 그곳에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움집은 이미 수십 년 전 추조박시대 이전부터 있어 온 것이었다. 사계축의 전통이라 했다. 십여명 들어갈 정도로 작은 움집에서부터 백여명이 들어가도 될 만큼 큰 움집도 있었다. 가을까지는 바쁘게 살아야 했기 때문에 겨울이 되어 추워지면 그렇게 움집을 지어 놓고 소리꾼들의 모이는 장소로 삼은 것이었다.

움집에 들어갈 때는 일단 나이로 인한 서열이 중요했다. 나이 많은 어른이 안에 계시면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되도록이면 문쪽에 앉았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 들어오면 역시 안으로 들어와 앉게 하고 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른 사람이 소리를 할 때는 절대 잡음을 내지 않는 것 역시 그곳의 중요한 불문율이었다. 왔다갔다 한다든가 들락날락하는 건 크게 실례를 하는 것이었다. 밖에서 들어올 때 아무리 추워도 안에서 소리를 하고 있는 게 느껴지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야 했다.

간혹 외지에서 온 손님이 제자들의 소리를 듣고 싶다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박춘경은 그때마다 꼭 춘재를 불러 소리를 시키곤 했다.
 “이름이 뭣인고?”
 손님이 물을 때도 있었다. 박춘재라고 하면 막내동생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박춘경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주 기분이 좋은 듯이 껄껄대면서 웃었다. 박춘경은 1850년생이었다. 춘재보다 서른 세 살이나 위였다. 그런데 이름자가 꼭 항렬자처럼 되어 있어 동생이냐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 소리가 그다지 듣기에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춘재에게 박춘경의 움집은 물고기가 만난 물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노래를 불렀다. 뜻을 알고 부르니 아는 만큼은 마음이 흡족했고, 자신감도 붙었을 뿐 아니라 여지껏 해온 것과는 딴판으로 스스로 느끼는 점이 달랐다. 목청도 다르게 나오고 있어 신기한 생각조차 들었다. 움집의 노래는 저녁에 박춘경이 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들려왔다. 따라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더욱 청청하게 들려왔다.

이웃 움집에서 왔다는 사람들도 같이 부를 때가 있었다. 어떨 때는 멀리 아현으로 사람을 보내 초빙해 올 때도 있었다. 다른 움집으로 견학 겸해서 소리공부를 하러 갈 때도 있었다. 그곳에서 초대해줘 갈 때도 있었다.박춘경은 초대가 오면 춘재를 보낼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소리들을 비교해볼 기회가 생겨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배우고 있는 소리들이 어떤 소리인지, 그것들이 어디서부터 왔고, 누가 불러 자신이 지금 부르고 있는지 그 연유에 대해서도 차츰 알게 되었다.

남도 소리꾼들도 만나고, 소리를 잘한다는 기생들도 숱하게 만났다. 무당들은 박춘재를 만나면 니가 춘재냐면서 손을 잡고 흔들었다. 깜짝 놀랐다. 무당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견문을 넓혀가면서 접하게 된 잡가는 좀 혼란스러운 데가 없지 않아 있었다. 유산가, 적벽가, 제비가, 집장가 등 열 두 잡가를 중심으로 해서 곰보타령, 만학천봉, 육칠월 흐린 날, 한잔 부어라 등 휘몰이잡가가 대부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심가, 선유가, 영변가, 관산융마, 추풍감별곡이 있는가 하면 육자백이, 배따라기, 판염불, 앞산타령, 뒷산타령, 놀량 등도 있었다. 방아타령, 난봉가, 맹인덕담가, 성주풀이, 경발림, 과부가, 노처녀가 등이 있는가 하면 양양가, 죽지사, 백구사, 어부사, 상사별곡, 수양산가 등 전통 가사도 있고, 우조, 평조, 계면조 하면서 가곡까지도 부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가곡, 가사, 시조는 물론 민요까지 망라된 노래들을 한 통속으로 몰아 잡가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차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런 노래들의 사설들이 약간씩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달해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사설과 곡조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