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코너]별이 된 윤동주
[에세이코너]별이 된 윤동주
  • 김창식 / 수필가
  • 승인 2011.06.16 09: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푸른 5월. 눈부시게 빛나는 5월의 거리는 갓 세수한 듯 정갈하다. 아침 공기에 섞여 상큼하고 배릿한 냄새가 끼쳐든다. 머리 위로 바람이 지나가며 문득 수선거리는 수상한 소리가 들린다. 잠자던 연초록 나뭇잎들이 일제히 깨어나 김광규의 시에서처럼 서걱댄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지난 5월 7일(토) 종로구민회관에서 '제6회 윤동주상 시상식'이 있었다. 많은 애국지사, 원로문인, 역대수상자, 선배·동료
시인들이 모여 대상을 수상한함민복 시인을 비롯 여러 수상자들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민족혼을 드높이고 인류애를 실천한 저항시인을 기리는 행사이니만큼 축제분위기 속에 다른 모임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경건함과 숙연함이 느껴졌다.

행사장인 강당에 들어서니 내걸린 현수막에 윤동주 시인의 사진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대학 사각모를 쓴 윤동주의 사진이다. 여린 듯 순결하고 결기어린 청년 윤동주의 모습을 대하니 송곳 같은 아픔이 전해온다. 학교 졸업 후 사회에 발을 딛고 활동하다 은퇴하여 노년의 문턱을 기웃거리는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가.

아무리 거대담론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역사적 대의나 공공선(公共善), 인간성의 고양을 위해 시간을 할애한 적이 있는가. 순수와 열정, 진리와 자유를 위해 살리라 다짐했던 젊은 날의 순수와 패기는 도대체 어디로 숨었단 말이냐. 요령과 효율을 앞세우며 경쟁사회에서 앞서가기 위해 물질적 풍요와 소시민적 행복을 추구해온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부끄럽고도 쓸쓸한 느낌이었다. 한 때 그토록 거부하고 저항했던 것들에 대해 길이 들고 또 그런 자신을 부지불식 간 합리화해온 내 자신을 본다는 것은.

단상에서는 시인을 추모하는 성악공연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참이다. 윤동주는 당시의 암울하고 엄혹한 시대적 상황에서 드물게도 영혼의 궤적과 시적 세계, 삶의 행보가 일치한 시인이다. 부끄러움은 윤동주의 표징이었다. 그의 부끄러움에 대한 인식과 참회하는 마음에 기반을 둔 경건한 삶은「서시」를 비롯한 시편 곳곳에 선연하게 드러나 후학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20대 초반의 순결한 어린 청년은 무엇이 그다지도 부끄러웠을까.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언어라는 소극적 수단으로 저항을 표출할 수밖에 없음에 좌절을 느꼈음직하다.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그런 갈등을 갖는 것은 당연하리라. 가만, 그의 부끄러움은 보다 더 근원적인 것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라의 침탈을 인간에게 본디부터 주어져 있는 자유와 품격,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유형무형의 폭력의 시발로 본 것이며, 무엇보다 나라의 빼앗김 그 자체를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한 것이 아닐까.

나라를 잃음이 갓 피기 시작한 청년 한 사람의 잘못일리 없건만 순결한 영혼의 시인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고 순교했다. 나라의 되찾음은 그 같은 선열들의 노력에 힘입어 앞당겨진 것이 아니겠는가. 윤동주는‘시대의 어둠을 쫓는 빛’이 되어 미래의 시간을 끌어 왔다.

그는 순간에서‘또 다른 고향(영원)’으로 나아간 것이니 역사의 진행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이고 시간의 절대적 권위를 발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진정으로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바람이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