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칼럼] 파리, 에펠탑에서
[여행칼럼] 파리, 에펠탑에서
  • 정희섭 / 글로벌문화 전문가
  • 승인 2011.07.2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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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은 파리를 파리답게 하는 랜드마크다. 에펠탑이 없는 파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데 만약 없다면 파리의 매력은 반감될 것이고, 마치 약방에 감초가 없는 것처럼 뭔가 부족한 느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세느 강 오가는 유람선의 대명사 바토 무슈(Bateaux Mouches)위에서 바라다보는 에펠탑의 위용은 가히 명물 중의 명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밤에 보는 에펠탑은 특히 아름다워서 수많은 사진작가들의 작품소재로 각광 받는다. 

에펠탑은 1889년에 세워졌다. 높이가 무려 984피트이니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300미터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높이여서 이 에펠탑을 보기 위해 인근 유럽국가의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에펠탑이 파리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철탑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세울 당시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고 하는데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알렉산더 구스타프 에펠 이라는 교량기술자의 설계로 지어진 이 탑은 그의 이름을 따서 에펠탑이라고 명명되었다. 1931년 미국 뉴욕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 42년간을 세계 제일의 높이를 자랑했다.

1937년 서울 종로에 6층짜리 화신 백화점이 세워졌을 때, 그 높이에 놀랐었던 한국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에펠탑이 세계인에게 던진 높이의 충격은 바벨탑의 도전과 비견될 듯싶다. 이렇게 화려하고 유명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에펠탑 앞에서 난 무서운 광경을 목격했다.

한일 월드컵 4강의 환희가 채 가시지 않은 2002년, 그것도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12월 중순에 난 파리에 출장 중이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층 달아오른 파리의 야경을 즐기기 위해 난 에펠탑에 오르기로 마음 먹고 숙소에서 나와 지하철을 탔다.

역 밖으로 나오자 마자 펼쳐지는 에펠탑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파리에 올 때마다 매번 보는 에펠탑이었지만 12월의 그것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에펠탑을 올려다보며 망중한을 즐기는 나. 그 순간 뒤편에서 들리는 모터사이클의 엄청난 굉음과 비명소리.

뒤돌아 보니 두 명의 동양여자가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서있었고 모터사이클은 이미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속칭‘오토바이 날치기’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두 명의 여자가 계속 아무 말도 못하고 하얗게 질려 떨고 있는데 그 장소에 있었던 그 누구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자기 갈 길을 가는 모습에 이 곳이 국제도시 파리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남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도와주어야 한다는‘바른 생활 교과서’를 배우고 자란 세대라서 그런지 더더욱 그랬다.

난 용기를 내어 그 여자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 괜찮은가요?, 어디 다친 데는 없나요.?”
그제서야 어눌한 영어로 간신히 말을 시작하는 두 명의 여자.
“ 우린 일본에서 온 관광객입니다 ”
가방에는 무엇이 들었으며 파리에서의 여행일정 등을 물으며 난 대화를 이끌어 갔고 주변에 경찰이 있나를 찾았다. 물론 경찰은 없었다. 정작 필요할 때는 보이지 않는 경찰은 한국이나 프랑스나 똑 같았다. 그래서 그 둘과 난 샹젤리제 거리까지 걸어 가서 경찰을 찾기로 했다. 에펠탑에 올라가는 것은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는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걸어가면서도 연신 세느 강을 쳐다보는 그들에게 난 물었다.
“ 강은 왜 그렇게 자주 쳐다보는 건가요.”
그들은 순진하게 대답했다.
“ 가방 속의 내용물을 다 꺼내 갖고 가방은 강물로 버렸을까 봐요. 가방이라도 찾고 싶어서요 ”
우문현답이었기에 순간 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그것은 짧지만 의미 있는 대답이었다. 그들은 이미 파리에 오기 전에 악명 높은 파리의 소매치기에 대한 정보를 듣고 온 것이었다. 그래서 가방 속에는 여권을 넣지 않았고 돈도 분산해서 넣었다는 말도 했다. 이 얼마나 에펠탑의 낭만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대화내용이란 말인가. 얼마나 많은 가방이 소매치기 되어 내용물이 꺼내진 후, 세느 강의 물 위를 떠내려갔기에 이런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걸까.

거의 2킬로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샹젤리제 거리에 왔고 간신히 개선문 근처에서 경찰 한 명을 발견했다. 에펠탑 앞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사고 접수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별일 아니라는 듯한 경찰의 표정에 다시 한 번 놀란 나. 적어도 동정 어린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정도의 사건은 너무 많아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한 무미건조한 파리 경찰의 표정에 성탄절의 낭만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일본 여자들로부터 계속되는 고맙다라는 말을 뒤로한 채 난 호텔로 되돌아 왔다. 밤새 내가 겪은 일이 생각나 잠도 잘 오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난 귀국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다시 일상 속으로 돌아와 그 때 있었던 일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알고 지내던 분이 마련한 주말 모임에서 난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사셨던 교수님 한 분을 만날 수 있었고 나의 이런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의 약간은 분노에 찬 이야기를 듣고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
“ 프랑스에서는 모두가 자신만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네, 소매치기도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지나가는 행인도 자신이 가는 곳으로 최선을 다해 발 길을 옮긴다네, 경찰도 자신의 의무를 다할 뿐, 얄팍한 동정심 따위는 없지, 다 자신의 역할이 있고 최선을 다할 뿐 다른 사람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네, 유교문화에서 자란 한국 사람들의 눈에는 많이 냉정하게 보이겠지만 우리의 관점으로 그것을 나쁘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 않겠나.

적어도 그런 소매치기가 빈번해도 파리는 예술의 도시임에 틀림이 없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파리에서 생활하고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한 거 아닐까 하네, 무엇인가를 버리는 역할과 줍는 역할이 있을 때 우리가 버리는 역할을 나쁘다고만 한다면 줍는 역할은 아예 존재할 수도 없지 않은 가 ”
난 다분히 철학적이고 궤변적인 교수님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 없었다. 아직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에펠탑 앞에서 생긴 일을 통해 사물을 보는 관점이 얼마나 다양한가라는 것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얻었고, 하나의 현상으로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느낄 수 있었다. 다양성, 아주 쉬운 말이지만 아주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난 파리에 다시 갈 기회를 얻었고, 에펠탑에 올랐고, 전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관점으로 파리의 야경을 즐겼다. 물론 모터사이클의 굉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