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열전 - 27] 김동원
[배우 열전 - 27] 김동원
  • 김은균 공연전문 기자
  • 승인 2011.09.2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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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 이어>

배우열전3 - 김동원 선생님

1962년 드라마센터가 만들어지고 그 당시 쟁쟁했었던 연극 인력들이 다시 모여 다시 한 번 연극의 르네상스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는데요?

 50년대 말을 전후해 한동안 침체기에 있었던 연극계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던 계기는 5.16혁명 이후 건립된 드라마센터의 탄생에 있었다고 보여져. 미국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1962년 문을 연 드라마 센터는 우리가 바랐던 연극의 요람이었고 본격 소극장 운동의 첫 걸음이었지.

▲ 1952년 부산에서 초연된 '처용의 노래' 에서 열연 중인 김동원 선생님
 그 때의 멤버들은 신협을 비롯해서 이근삼, 여석기, 김정옥, 양동군, 양광남, 박명희 등 해외 유학파에다 보다 젊은 층으로는 김성옥, 김동훈, 오현경, 박규채 등이 참가하였지. 개관 기념 공연으로는 신협의 역작이었던 <햄릿>이 결정되었고, 나와 최상현이 더블캐스트였고 오필리어로는 권영주, 오현주, 김보애가, 클로디어스에는 장민호, 남성우가, 왕비로는 황정순, 천선녀, 박명희가 교대로 출연을 했었지. 개관 기념 공연작으로 피난시절 신협의 역작이었던 햄릿이었는데, 장장 40일 간의 장기공연으로 첫 무대를 장식했었지. 드라마센터의 설계는 극장 창립자인 유치진 선생이 직접 외국의 극장들을 견학해 가면서 고심 끝에 만든 그 때로는 획기적인 것이었어.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만약 그 때 드라마센터가 기대만큼 정상 가도를 달렸더라면 오늘날 우리 연극계는 더 훨씬 좋은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 해. 그리고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그 때 극장 명이 드라마센터가 아닌 신협 소극장이었더라면 오늘날 신협에 대한 아픔 같은 것은 없지 않았을까 하기도 하지. 

국립극단 창단에 관여하시고 그리고 은퇴도 국립극단에서 하셨는데 거기에서의 생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처음에 국립극단이 만들어진 것이 1950년 정월이었을 거야 전쟁의 포성이 목전에 임박했는데도 우리 연극계는 국립극장의 설립으로 인해 그저 들떠 있었었거든. 유일한 민족극단인 ‘극예술협회’가 국립극장에 흡수된 것이 이해 정월이었고, 이것이 ‘신극협의회’ 즉, 신협의 모체가 된 것이지.

 1950년 4월 30일 날 부민관(府民官)에서 개관기념 공연으로 <원술랑>이 올랐었는데, 그 때까지 연극 사상 최대의 호화 무대였고 객관적으로도 부끄럽지 않는 역작이었어. 내가 원술랑 역할을 맡았고 진달래 역은 김선영이, 그리고 이해랑과 박경주가 같이 출연했고 황정순과 백성희가 새로이 가세해 각각 김유신 장군 부인인 지초부인과 공주로 분했었지. 워낙 대작이어서 효과를 담당한 심재훈은 전투 신에서 마그네슘 폭파가 잘못돼 중화상을 입기도 했었지. 전 단원의 이러한 열성으로 인해 일 주일 공연에 5만이상의 관객이 들었는데 이는 신극사상 최대의 규모일 거야. 그리고 더 놀라운 건 두 번째 공연인 <뇌우>(조우作) 공연 때인데, 번역극이라는 것만 빼고는 최고의 무대라고 생각을 해. 원작이 지닌 높은 예술적인 성취도, 연출의 섬세함, 연기 무대 장치에 이르기까지 당시 이 연극을 보지 않고는 문화인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할 만큼 지식층의 호응을 받은 것도 우리 연극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지 않나 싶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별관인 부민관 앞에는 연일 자동차가 빼곡히 들어차고 계속되는 무더기 관중들 때문에 앙코르 공연이 불가피했었지. 당시 서울 인구가 40만인데 이 작품을 6분의 1정도인 7만 5천 명 정도 관람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아마 실감이 안 날거야.

선생님 하면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라 불리실 정도로 햄릿에 대한 인상이 강하십니다.

 1951년 피란 시절 대구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국내 초연으로 올렸었지. 이 <햄릿>은 연극무대의 고전으로 정통의 프로시니엄 무대에서만이 그 진가를 떨칠 수 있는 연극이었거든. 이해랑 연출에 김정환 씨가 장치를 맡고, 오필리어는 김복자, 그리고 황정순이 왕비로 연출이었던 해랑이 크로디어스왕으로 분했었지. 처음 이해랑이 이 대작을 내게 내놓았을 때 난 기가 질리고 말았지.

 대본을 대충 훑어보니까 이건 숫제 말해 문학이지 대사가 아니더라고. 단어 하나하나를 씹고 곱씹어야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심오함을 지닌 데에다 일상어가 아닌 품격 높은 대화체여서 암기에만 주눅이 들 정도였다니까. 게다가 연습이 일주일밖에 없는 상태에서 도무지 자신이 서질 않더군. 그의 강권에 못 이겨 열심히 하긴 했는데 도저히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어. 그래서 최무룡이를 대신 시키라고 하면서 대본을 팽개쳐 버리고 말았는데, 연출가인 해랑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해서 “해라” “못 하겠다”로 옥신각신하다가 연습은 고사하고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갔었지.

 내가 후배인 최무룡을 추천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지. 비록 학생극이었지만 최무룡은 이미 한 번 중앙대학 연극반 시절 경험이 있었거든. 해랑이 나를 지목한 것은 지우(知友)로서의 확신이었고 나는 그의 우정을 헤아려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내가 이때 이 작품을 하지 안았더라면 평생 후회할 뻔했을 거야. 훗날 드라마센터 개관 기념 작품으로 햄릿을 하긴 했지만 <신협>에서 올린 이때가 최고가 아닌가 해. 신협 공연 이후로 영화로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햄릿이 국내에 소개되어서 다시 한 번 햄릿 붐을 일으키기도 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