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북한산 둘레길’ (1)
느림의 미학 ‘북한산 둘레길’ (1)
  • 심성원 기자
  • 승인 2011.10.10 1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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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자연이 만나 하나되어 걷는다

 북한산 둘레길은 북한산을 끼고 도는 기존의 샛길을 연결하고 다듬어서 북한산 자락을 완만하게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저지대 수평산책로다.

 제주의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방송을 타면서 몸살을 앓을 즈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둘레길이 있었고, 항상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단지 둘레길이라는 이름만 없었을 뿐이다.

 이제는 북한산 둘레길을 모르는 산악인, 아니 시민도 거의 없다. 지자체들도 앞다퉈 둘레길을 서둘러 만들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유난히 더웠던 무더위가 한발짝 비켜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둘레길을 찾고 있다. 잠시 후 찾아 올 단풍철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룰테니 그 전에 둘레길 산책을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

 북한산은 수도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가까운 조선시대에는 주로 선비들에게 풍류 놀이터를 제공했었고, 고려시대 때부터도 우리 ‘삼천리 금수강산‘의 5악 중 하나로 그 위상을 당당히 했었다. 5악은 비백산, 지리산, 삼각산, 금강산, 송악산인데, 비백산은 지금의 백두산이며, 삼각산은 지금도 북한산의 별칭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제 북한산은 연간 900만명 이상의 방문객을 맞음으로써,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될 만큼 명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북한산은 그 자락이 도봉산, 인왕산, 북악산 등으로 이어지는데, 거대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주요 암봉 사이로 수십 개의 청정계곡이 형성되어 산수조화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으며, 1,300여 종 동식물이 서식 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과거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 2,000년의 역사를 지켜본 북한산성을 비롯한 수많은 유적과 100여 개의 사찰, 암자가 곳곳에 펼쳐져 있어 다양한 볼거리와 생태, 문화, 역사의 살아있는 학습현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북한산에 21구간으로 나누어져 정겹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총 70Km 길이의 둘레길이 있다. 이 둘레길은 작년 9월 총 13구간, 44Km 길이의 산책로로 처음 개방된 이후 지난 6월말 현재의 규모로 확장되어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그런데 이를 아는 주변지역 주민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제주도 올레길’은 다양한 광고와 홍보활동 덕분인지 많은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고 한번쯤 가고 싶어들 한다. 북한산 둘레길이 조금은 생소한 것을 이 지역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서운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북한산에는 정겹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21구간으로 나뉘어진 총 70Km 길이의 둘레길이 있다
-21구간 북한산 둘레길

 ‘등산’이 ‘산이 그곳에 있어서’ 꼭대기까지 차고 올라가 그 산의 정기를 아우르는 -- 좋게 표현해서 -- 행위라면, 요즘 흔히 일컬어지는 ‘둘레길 탐방’은 산의 정상이 아니라 산허리나 산아래자락 등 비교적 낮은 곳을 따라가며 올망졸망 주변을 조망하고 등산과 산책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색다른 묘미를 선물 받는 경험이다. 즉 어머님의 품속 같은 대자연 속에 내 몸을 맡기고 들어가 걷기를 통해 삶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단순한 ‘산오름’에서는 접하지 못하는, 우리말로 된 길이름, 풀이름, 골짜기나 봉우리, 기암괴석의 이름을 알아가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 것이 아니리라.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둘레길은 총 21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 나름대로의 향취와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우선 빼곡히 들어선 소나무들이 내뿜는 짙은 송진 향과 더불어 북한산 둘레길에서 유일하게 청정(우이)계곡을 따라 3km정도 걸을 수 있는 길이 ‘소나무 숲길’이다. 우이동 우이령길 입구에서 시작하여 솔밭근린공원 상단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 구간으로 길이 넓고 완만하여 본 의미 그대로의 산책을 즐기기에 좋은 길이다. 만약 걷기를 즐기면서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해 주신 독립유공자나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선배들을 기릴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면 ‘순례길’을 걸어보자. 고종의 헤이그 밀사인 이준 열사와 초대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의 묘소와 4.19민주묘역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하늘로 열린 길은 이준 열사 묘역입구에서 북한산 생태숲 앞으로 이어지는 ‘흰구름길’에서 체험해보고 이어 가족단위로 방문하면 좋을 ‘솔샘길’, 도시에서의 사색을 찾기 위한 ‘명상길’ 구간 등이 산잽이들을 불러들인다. 또 조선시대 조세를 관리하던 선혜청이 위치했던 평창마을과 사자능선이 어우러진 ‘평창마을길’에서는 북한산 본산뿐만이 아니라 북악산, 인왕산, 관악산까지를 굽어볼 수 있고 ‘옛성길’ 구간에서는 둘레길 중 유일하게 옛 성문을 통과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여 축성된 ‘탕춘대성 암문’을 지나며 유서 깊은 도읍이 남긴 향취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다.

 <삼포 가는 길>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소위 사회적인 약자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글인데, 시종 길을 걸으며 인간적인 교감을 통해 서로가 닫힌 마음까지 열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이런 교감을 위해서는 내적, 외적 갈등이 그만큼 없어져야 할 터인데 이러한 갈등을 없애주는 세로토닌이라는 뇌분비 신경전달물질이 있다고 한다. 세로토닌은 스트레스와 갈등을 줄이고, 격한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걷지 않고 주로 자동차에 의지하려 하니 세로토닌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역으로 말해 많이 걸어서, 그것도 숲을 접하면서 걷다 보면 세로토닌이 풍성해지면서 우리의 삶을 갉아먹는 갈등과 스트레스가 그만큼 사라질 것은 자명한 이치리라.

▲북한산의 '산너미길'
-가을에 더욱 가보고 싶은 산책로

 다시 북한산 둘레길을 열어보자. 밑에서만 바라보던 나무를 ‘하늘다리’ 길 위에서 바라보며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려면 ‘구름정원길’을 걸어보자.

 한편 은평 뉴타운과 인접한 ‘마실길’은 이름 그대로 동네에 마실 나온 기분으로 걸을 수 있는 구간이며 국내 최대의 내시묘역이 위치한 ‘내시묘역길’에서는 8m 높이 다리에 투명한 발판이 설치되어 아찔함을 맛보게 해 놓은 ‘둘레교’도 만나볼 수 있다.

 옛 효자의 얘기와 인왕산 호랑이에 대한 전설, 민속문화를 엿볼 수 있는 몇몇 굿당을 접할 수 있는 ‘효자길’, 예로부터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가 위치했던 ‘충의길’, 누렁이 짓는 소리를 들으며 시골의 정취에 한껏 취해 걷다 보면 맑고 청정한 송추계곡에까지 다다르게 되는 ‘송추마을길’ 등도 체험해 보자.

 둘레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쉬엄쉬엄 밟아보는 산길과 시골마을길 등을 통해 마음의 휴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이 길을 걷는 매력이라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름도 친근한 ‘산너머길’과 ‘안골길’ 구간에서는 몇몇 구비 이어지는 산길과 체육근린시설을 포함하는 가족형 산책코스를 즐길 수 있다.

 한편 ‘보루길’, ‘다락원길’ 구간에서는 멀리 고구려시대의 석축과 보루를 살펴볼 수 있고, 사색을 위한 맨발걷기, 시골인가와 텃밭 등을 살짝 둘러볼 수 있다.

 단지 다락원길에서는 수도 방어목적의 미군부대인 ‘캠프 잭슨(Camp Jackson)’이 위치하고 있어 내방객들의 주의를 요한다.

▲북한산의 '산너미길'
 명산의 초입임을 알려주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도봉서원’이 위치한 ‘도봉옛길’ 구간이 있다. 우암선생의 ‘도봉동문(道峰洞門)’이라는 바위글씨가 선명한 이 서원과 함께 우리 조상의 정서와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길로써 둘레길 중 유일하게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하는 장애우들을 위한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다.

 이 밖에도 “학이 품은 평화로운 마을”, ‘방학동길’, 연산군과 세종대왕의 차녀인 정의공주의 묘역이 위치한 ‘왕실묘역길’, 북한산과 도봉산의 경계를 이루는 ‘우이령길’을 걸으며 북한산 둘레길 대장정을 마무리 지어보자.

 지난주 산림청이 UN의 ‘2011년 세계 산림의 해’ 지정을 기념하기 위한 한 산림문화강좌에서 시인 고은 씨는 “숲은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인 물과 공기를 제공해 줄뿐 아니라 창조적 문명 발달을 꽃피울 수 있는 아이디어를 알려 준다”고 숲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소유 또는 이익을 위해 숲을 파괴하는 것은 또 다른 재앙으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실 둘레길이나 올레길을 인간의 입맛대로 조성된 ‘숲 파괴행위’의 일부로 보는 시각도 많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일부 몰지각한 탐방객들이 숲을 해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숲속 길을 좀 더 쉽고 친근하게 다가서도록 개방해 놓음으로써 대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을 겸허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으로부터 약간의 양해를 구하면 어떨까.

 해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언제 그렇게 무더웠나 싶게 벌써 이른 아침이면 잠자리에서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게 만드는 스산한 바람이 집안 깊숙이까지 치고 들어온다.

 가을은 우리를 수없이 변화무쌍한 빛깔에 도전하고 싶도록 만드는 계절이다. 인중을 얼얼하게 만들 겨울 칼바람이 오기 전에 움츠리고 있지만 말고 북한산 둘레길을 거닐면서 자연이 흩뿌려준 그 빛깔에 마음껏 도전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자연이 우리네 삶의 원천이라는 것을 쉽게 체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