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금석문, 목간 등 고대 문자자료의 새로운 연구
문서, 금석문, 목간 등 고대 문자자료의 새로운 연구
  • 김영찬 기자
  • 승인 2011.10.12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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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특별전 '문자, 그 이후' 기념 심포지엄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10월 14일 특별전 ‘문자, 그 이후: 한국고대문자전’(2011.10.5.-11.27) 개막을 기념하여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심포지엄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과 3년간 추진한 고대 한일문자자료 공동연구 성과의 일부와 최근 주목받고 있는 한국 고대문자자료에 대한 국제적 시각과 연구의 현주소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기조 강연에 나서는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히라가와 미나미(平川南) 관장은 ‘고대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를 양국의 문자와 문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신라 임신서기석과 일본의 니시가와라(西河原) 목간의 비교를 통해 양국이 한자를 빌어 자국의 언어를 표기하였음을 조망한다. 또 쇼소인(正倉院) 사발문서, 안압지 출토 명문 자물쇠 등 자료에 보이는 국자(國字,혹 속자俗字)를 검출하여, 중국에는 없는 새로운 글자의 창조에 주목한다. 최근 공표된 후쿠오카(福岡) 출토 상감명문 대도(大刀)에 보이는 역(曆)을 소개하면서 고대 일본의 역이 한국의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한다.

 이어서 계속되는 주제발표에서 박방룡(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장)은 삼국의 축성(築城)과 관련하여 부실공사의 폐단을 막기 위해 축성에 관여한 실무자를 기록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한국만의 특징이었다고 강조한다. 축성 석문(石文)의 경향에 대해서 고구려와 백제는 성돌[城石]에 간단한 기록을 남긴 데 비하여, 신라는 비석에 상세하게 기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한다. 이성시(李成市, 와세다대학 교수)는 포항 중성리 신라비를 심층 분석하여, 501년에 작성된 것으로 결론 내린다. 비석에서 핵심내용인 재산권 분쟁은 두지(豆智)와 일부지(日夫智) 2인이 빼앗은 궁(宮)을 모단벌탁(牟旦伐喙)의 작민(作民)에게 반환케 하는 것이었다. 또 궁이란 재물, 토지, 노비 등 종속민을 포함하는 경영체이며, 금평(金評)은 신라 6부 중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박중환(국립김해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고대 백제 자료의 인명표기법을 분석하여 백제 표기는 신라와는 다르며, 고구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소개한다.

 미카미 요시타카(三上喜孝,야마가타대학 교수)는 고대 한일 양국의 ‘용왕(龍王)’ 새김 목간을 분석하여 이들이 기우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녕 화왕산성 연지 출토 목제인형은 기우제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며, 전(傳) 인용사지(仁容寺址) 출토 목간은 도자(刀子) 즉 칼 모양으로 가공되었으며, 글자를 앞뒤로 거꾸로 쓴 것으로 보아 주술목간이라고 한다. 경주 안압지 출토 신심용왕(辛審龍王)새김 토기의 용왕은 제사를 주관한 기구인 용왕전(龍王典)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용현(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은 정창원 사발 문서를 검토했는데, 앞면에는 괘선(罫線)이 있으나 뒷면에 없는 점에 착안하여, 신라 관청에서 문서가 작성된 뒤, 이면지도 문서로 재활용되었다고 주장한다. 또 문서가 폐기된 후에도 그릇 포장재로 재활용된 모습을 복원하면서, 신라사회에서 종이가 2차, 3차 재활용될 정도로 중시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