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창현(創玄) 박종회 화백
[인터뷰]창현(創玄) 박종회 화백
  • 홍경찬 기자
  • 승인 2011.10.19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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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에 유채를 입혀 서화계의 새로운 길을 창조하다

창현 박종회 화백.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열었다. 현재성 짙은 재료와 문인화적 화법을 동시에 구현하면서도 문인화적 풍격을 물씬 풍기는 그는 요즘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수묵에다 유채를 써서 새로운 장르인 ‘묵유화’를 창안했고, 중국 당시를 비롯한 우리 근현대시를 자신의 그림에 오롯이 녹여낸 ‘시의화’(詩意畵)라는 장르도 개척했다. 깊은 한국성에 관한 고찰도 ‘서화의 대가’답다. 그는 문인화계의 선배답게 탄탄한 필력으로 행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 도가와 노자의 사상에서도 소재를 취해 형상화한 작품들은 그의 깊은 학문적 관심과 깊이를 느끼게 한다. 만해 한용운을 좋아하고 조용필 노래에 담긴 한을 볼 줄 아는 섬세한 감성을 지닌 아름다운 사람 창현 박종회 화백. 한국성 찾기에 나선 그는 선현들의 글과 지혜를 통찰하는 해박한 지식으로 시대를 넘나들었다. <서울문화투데이>는 그가 부산을 거쳐 포항으로 향하는 출발지인 서울역사 안에서 그를 만났다. 고희展을 구상하고 있는 그는 연륜과 경험이 담긴 이야기를 고스란히 전하는 순간 순간마다 정이 담뿍 담긴 인품이 묻어났다. 서울역에서 포항과 부산으로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그의 모습은 늘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젊은 대가’ 모습 그대로였다. 창현 박종회 화백이 걸어온 길과 후배들에게 알리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옛것을 녹여 새것을 그리는 문인화가
“‘한국성’ 찾기가 끝없는 과제”

▲ 창현(創玄) 박종회 화백은 수묵에 유채를 입혀 서화계의 새로운 길을 열었고 문인화의 풍격도 물씬 흐르게 한다
-가장 좋아하는 글귀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림을 그리면서 ‘회사후소(繪事後素)’ 이 글이 와 닿아요. 공자가 전하는 이야기인데, 그림에는 본바탕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한때 운보 김기창 화백이 회장을 맡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문하생들의 모임인 ‘후소회’가 있어요. 이 뜻을 새기자는 뜻이겠지요. 요새는 그 바탕 ‘소’자가 해석이 분분해요 바탕 소는 내면의 잠재의식에서부터 교양까지 망라해서 해석한 거예요. 즉 본바탕인 됨됨이가 좋아야 하고 책을 많이 읽어서 지성인이 되는 거에 있기에 가장 좋아하는 글입니다” 

-박 화백의 작업은 스스로 ‘한국성(韓國性) 찾기’라고 밝혔습니다.
“81년 로마에 가서 전시회를 열었어요. 외국인들이 산수화를 보면 중국 거라 하고, 색채를 보면 일본 거라고 했죠. 고개를 갸웃거리지도 않았어요. 유일하게 제가 연꽃을 먹으로 그린 작품이 있었는데 대뜸 이탈리아 사람이 그걸 사겠다고 하더라고요. 물어 봤죠 이탈리아에는 유화가 더 눈에 익수하지 않느냐 이걸 왜 굳이 살려고 하느냐? 그 사람들이 말하길 먹색이 좋대요. 이후로는 먹색이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겠다 싶어서 귀국해서 수묵화 운동에 동참했고 더욱이 한국적이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한국성’ 찾기에 나선 겁니다”

▲ 이육사 청포도, 수묵에 유채 박종회 作

◆‘민속적인 색채, 정(情), 한(恨)’ 한국성인 원소들

-‘한국성’인 요소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내고 박생광 선생의 민속적인 색채를 보면 ‘아 한국적이다’라고 느끼죠. 박수근 선생도 그렇고요. 지금의 관념 산수화는 한국적이지 않습니다. 다수의 작가들은 한국성을 찾으려고 노력하지만 중국은 국화, 일본은 일본화라 하는데, 우리만 동양화라 하기에 그러니 궁여지책으로 한국화라 한거죠. 한국적인 느낌이 안 나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소정 변관식 선생의 그림이 너무 어둡고 답답해서 처음에는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후대에 그의 작품이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고스란히 민족의 울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죠. 조선의 도자기는 먼발치에서 보기 보다는 옆에 와서 보게 만드는 거예요. 그 선이 옆에 오게 만드는 거야. 조선의 목기나 도자기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옆에 와서 보게 하는 매력을 가졌죠. 여기에는 조선의 정이 흐르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가 정이 많은 민족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이와같은 한국적인 게 나와야 겠죠. 박수근, 김환기 이 분들은 재료는 서양 것인 유채를 썼지만 정신은 가장 한국적이지 않을까 싶네요“

▲ 박종회 화백은 한국성으로 한(恨)을 설명하며 김열규 전 서강대 교수가선생이 한이무원(恨而無怨)이라 한 대상이 없는 한을 소개했다.
-신라향가인 제망매가 정읍사 가시리 등과 윤동주 이상화 한용운 등 민족시인들의 시를 그림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궁금합니다.
“신라의 향가부터 우리 선조들 시를 쓰려고 굉장히 노력을 했어요. 가사에서부터 쭉 현대로 내려오면서 특히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를 굉장히 좋아 해요. 내 그림과 만해 선생님 시가 맞는 거 같아요. 그림을 그려 놓고 화제를 찾아보면 민족시 중에서도 만해 시가 와 닿아요. 시를 먼저 보는 게 아니고 그림을 그려놓고 보면 만해 선생님 시가 어느 순간 제 앞에 와 있어요. 또 한국성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고 가장 한국적인 것을 많이 봐야 돼요. 도자기의 곡선에서 나오는 것도 봐야 됩니다. 곡선이라는 것은 가능성이 있어요. 애절하고 사람을 포근하게 해주고. 이응노 선생이 프랑스에 있으면서 그 분도 끝끝내 사군자를 채색으로 했죠. 대나무는 의롭고 울분을 잘 표현했죠. 그것 또한 가장 한국성 아닐까 느끼고 있어요”

-작품할 때 재료를 다양하게 쓰시는 것 같은데 주로 어떤 재료를 쓰십니까?
“먹으로만 그리면 아무리 흐리게 해도 몇 십 년 몇 백 년이 지나도 퇴색이 안 돼요. 동양화 물감을 보면 몇 십 년도 못 가. 화가의 당대 예술도 못하는 거죠. 그래도 작품은 엄청난 돈으로 팔리잖아요. 오랫동안 유지되기 위해서는 석채나 당채를 써야 하는데, 대신 번짐의 효과를 내기 어렵죠. 수채화나 수묵화는 둘 다 번지는 효과를 노리고 그리는 거예요. 또 종이는 달라요 켄트지는 못 스며들게 하고, 화선지는 스며들어 가게 하는 거죠. 켄트지는 굉장히 화려하고 스며들지 않게 하니깐 그럼에도 종이는 두껍죠. 반면에 화선지는 얇은데 무게감이 있고, 화려하지는 않죠. 여기에서 차이가 나죠”

“번지는 효과, 이를 위해서 유채를 써보니 되더라고요. 비싼 유화 물감은 색감이 너무 좋아요. 천년을 버틴다는 닥종이(한지)와 유화물감을 함께 쓴다면 후세에다 내놓으면 그때 평가를 받을 수 있잖아요. 고려청자를 현대에 다시 재현하기 힘든 이유는 분석을 해봐도 연대값이 안 되는 거예요. 천년이 흘러야만 그 고려청자의 멋과 맛을 살릴 수 있는데 재현하기가 쉽지 않죠. 제 그림은 오래만 버터주면, 그때 가서는 좋은 평가를 받으리라고 믿는 거죠”

▲ 윤동주 서시, 수묵에 유채 박종회 作
◆먹에다 유화, 문인화 옛것을 녹여 새것을 오래 남기다.

-먹에다 유채, 이 첫걸음을 디뎠고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작품 화제를 시를 주로 쓰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시를 직접 짓고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그리는 문인화가라고 하면 최고의 찬사죠. 저는 시의 기분을 많이 살려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옛날 고전을 보면 문장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시를 잘 짓는 사람이 있어요. 시적의 의미, 다시 이야기 하면 시는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한시의 맛이 일품이죠. 때문에 한시를 주로 내그림에 썻는데, 이번에 <시와 그림으로 보는 현대시 100년>전을 준비하면서 우리 현대시에 대해서 공부도 많이 하고 또한 현대시가 가지고 있는 매력에 푹 빠졌어요“

-선생님 작품은 딱히 문인화라 규정하기도 어렵겠는데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저 한국성을 찾으려는 시적인 그림인데 시의화(詩意畵)라고 하면 되겠죠.

-본격적으로 작품을 하게 된 때는 언제입니까?
“군대 갔다 와서 본격적으로 했어요. 그 간 우여곡절도 많았고요. 서울에 오니 그림이 제 천성에 맞았어요. 특히 사군자가 말이에요. 제 고향에 동양화 대가이신 의재 허백련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선생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볼까도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어요. 그 분 큰 아드님을 제가 형님으로 모셨는데, 왜 우리 아버지한테 안 배우고 서울에서 그림을 그리냐고 야단을 치더라고요. 그때 제 대답이 ‘내 정서를 가지고 하고 싶었다’고 말했지요. 그 형님이 제가 동아 대상을 받고 신문에 대서특필로 나오니 제일 먼저 축하를 주더라고요. 그 당시 제가 39살이었네요. 문인화를 제가 얼마나 좋아했냐면 신선놀음을 할 거 같아서요(웃음). 오도(悟道)를 하면 너무 신선놀음 할 거 같았죠(웃음). 그러다 그림을 하면 할수록 자기 이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고 굉장히 어려웠어요. 사람들이 더욱이 독학을 하다보니 더욱 힘들죠. 선생님이 계셔서 한 말씀만 해주면 1년을 단축시켰을텐데 말이죠.

-혼이 나와야 된다는 의미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말씀 안드려도 우리나라의 ‘한’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박수근 선생도 참 좋아하는데 선생의 작품이 우리나라 화강석의 질감이기에 한국적인거죠. 소쿠리 잡고 장터 손님을 기다리는 게 정말 쓸쓸함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죠. 대표적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보면 쓸쓸하다 느끼고, 그곳에 정말 가보고 싶다고 느끼죠. 또 작품이 안 나올때 저는 조용필 노래를 들어요. 그의 노래는 한이랑 연관이 있지 않을까하고 자주 들어요” 

▲ 박 화백과의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의 인터뷰는 서울역에서 포항과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는 날 진행됐다. 그의 여행은 늘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문인화 다운 젊은 대가 그대로였다.
◆다른 분야의 작품하는 젊은 친구들 비해서 문인화는 아직 갈 길 멀어

-책을 많이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
“옛날 고전이나 동양철학을 가끔 보죠. 그 중에서도 옛날에 읽었지만 일본사람인 야나기무네요시가 쓴 '조선의 예술'과 조지 로울리 서양학자가 쓴 '동양화 원리'라는 책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죠. 또 법정스님이 지은 책을 자주 읽어요. 법정스님 참 편안하게 잘 쓰셨어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사람을 감동시켜요(웃음) 한때는 제가 최고라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어요. 50이 되니깐 이건 아니다 했죠. 지금 그린 것도 60이 지나고 70대 때 보면 또 부족하겠구나 하고 겁이 나요. 후배들한테 그런 이야기해도 먹혀들어가지 않아요. 그럴 땐 후배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읊조리죠. 가난하지만 라면 먹으면서 다른 분야의 작품 활동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다른 그림 하는 젊은 친구들은 처절한데 문인화는 아직도 멀었어요. 정신 차려야죠”

-선생님 작품에서는 왠지 쓸쓸함이 많이 느껴지데 이유를 좀 알 것도 같습니다.
“제 작품들을 보면서 관람객들이 그래요. 작품 속 선비는 왜 왼쪽만 보고 있냐? 그래요. 왼쪽이 내 고향이니깐, 왼쪽이 남쪽이니깐, 외로움이 나타나니 다행이네요. 고맙기도 하죠. 김열규 선생이 한이무원(恨而無怨)이라 했듯이 대상이 없는 한을 가져야겠죠”(웃음)

-선생님은 좌파이신가요?(웃음)
좌파 맞아요(웃음)

-다음 전시 계획은 언제쯤 있을 예정이신지요?
“내년 3월 달에는 ‘시와 그림으로 보는 현대시 연장전시’와 고지(옛날 종이, 古紙)에서 그리는 난초 전시를 하고자 해요. 또 2013년에는 고희전을 해보고 싶어요”

창현 박종회 화백 프로필

-동아미술제(1981)수상

-1977년부터 현재까지 선화랑, 백악미술관, 예술의 전당, 공평아트센타, 인사아트센타 등에서 열 번의 개인전 개최

-이탈리아 Astro Labio Arte 화랑 초대전, 예술의 전당 전관 개관기념 초대전, 베세토 서울국제 서화전 등 단체전 출품

-대한민국서예대전, 동아미술제 등 각종 공모전의 운영위원과 심사위원 역임

-1986 독립기념관언록비(한국광복군 선언문, 조선의열단 선언문 권률장군 격문)

-1995년 이봉창 의사 동상 비문

-서울시 미술장식품심의위원, 문광부미술은행 추천위원, 심사위원 역임, 고려대학교 미술교육과 10년 강의, 원광대학교 동양역학대학원 초빙교수로 5년간 강의

-시인들이 주는 2007년 제1회 한국예술상 수상


인터뷰 이은영 발행인 young@sctoday.co.kr 사진 조상래 기자/ 정리 홍경찬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