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의 작가,한국문학의 어머니를 잃은지 1년
토지의 작가,한국문학의 어머니를 잃은지 1년
  • 홍경찬 기자
  • 승인 2009.05.0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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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경리 선생 1주년 추모제 고향 통영서 열려

 2009년 5월 5일 초록이 빛나는 통영 산양읍 한산도 바다가 보이는 미륵산 한 자락에서 토지의 작가 故 ‘박경리’ 선생님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 2008년 5월 5일 타계한 '토지'의 작가 故 박경리 선생님 묘

 故 윤이상 선생도 살아 생전에 고향 통영으로 돌아오고 싶어했고 멀리 통영이 보이는 공해상 바다에서나마 그 ‘한(恨)’을 달랬으며 ‘토지’작가 박경리 선생 또한  임진왜란의 ‘한’이 서린 한산도 바다가 보이는 따스한 볕이 드는 곳에 ‘통영의 흙’으로 영면했다. 

▲ 통영시 강구안 문화마당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와 만장

 이 날은 그 어떤 글로 표현하거나 미학 시키기에도 역부족한 문학계의 영혼이신 박경리 선생이 타계하신지 정확히 1년이 된 날이었다. 1주년 추모제에는 고인의 외동딸인 김영주 토지문화관 관장과 이군현 국회의원 진의장 통영시장 전국 각지의 문인과 추모객 등 300여명이 참석해 선생의 문학정신과 삶을 기렸다.

▲ 시민분향소 내에 설치된 故 박경리 선생 영정사진

 영혼맞이 춤을 시작으로 봉행된 추모제는 추모사,헌다,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진의장 통영시장은 추모사를 통해 “선생은 삶과 죽음을 예술을 통해 유희처럼 넘나드셨던 분”이라며 “지난해 5월 5일은 한국문학계가 모친상을 당한 날로 선생이 없는 빈자리가 여전히 크고 허전하다”고 애도했다.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은 어머니 타계 1주기를 맞아 출간되 추모집‘ 봄날은 연두에 물들어’(마로니에북스 펴냄)를 영정에 바치고 생전에 즐겨 드시던 산나물, 돔,전복 등 통영의 해산물로 만든 음식들을 올렸다.

 이어 고인이 평생을 실천한 생명사상을 이어 가기 위해 묘소 주변에 생명의 집(새둥지) 20여개를 달고 행사는 마무리됐다. 한편 고인의 타계 1주기를 맞아 지난 4일부터 강구안 문화마당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에도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참배행렬이 이틀째 이어졌다.

▲ 박경리 선생님을 잊지 못하시는 분들이 참배할수 있도록 시민분향소가 설치됐다.

 “나의 삶이 평탄했더라면 나는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삶이 불행하고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박경리 선생은 1928년 10월 28일(음력)초저녁에 태어났다.

 여기서 초저녁 범띠생 사주이야기는 생전의 작가가 자주했던 사주 얘기다. “초저녁에 나왔어요. 그러니깐 초저녁 범띠 생이지, 초저녁은 배고픈 호랑이가 막 먹잇감을 찾으러 다닐 때잖아. 
 
 여자 사주치곤 기가 아주 센 거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 팔자대로 산 거 같아요.” 

 박경리는 흙의 작가요 생명의 작가였다. 생전의 그는 텃밭에서 일군 채소를 손수 무치고 담가 토지문화관을 찾은 후배작가들에게 먹이곤 했다. 자신의 텃밭에 농약을 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육신에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2007년 폐에 종양이 있었지만, 담배를 끊지 않았고 한 달 가까이 병실에 누워있으면서는 치료진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렇게 박경리는 통영 ‘토지’ 품으로 돌아갔다.

  1973년 봄 ‘토지’1부를 읽고 김병익(문학평론가)은 “아마도 춘원의 ‘무정’이후 가장 탁월한 작품 중 하나”이며 “박경리의 ‘토지’는 소설로 쓴 한국 근대사”라고 평가했거니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2008년에도 토지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토지는 일제 강점기에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이후 맥이 끊어진 대하소설의 맥을 되살려 이후 김주영의 ‘객주’, 황석영의 ‘장길산’,조정래의 ‘태백산맥’등 뛰어난 성과를 거둔 작품들이 잇달아 나왔다.

 ‘토지’야 말로 우리 문학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총체소설이라고 그는 평가했다. 토지는 개인사, 가족사, 생활사,풍속사,역사, 사회사 등을 포괄하고 있다.
 
 여기에는 농민과 중인을 중심으로 양반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사회 모든 계급을 망랑한 우리 민족 전체의 삶의 모습이 재구성되어 있으며, 별의별 인물과 성격들을 재현하고 창조함으로써 인간사의 모든 것을 모아들여 거대한 실존적 벽화를 그리고 있다.

 ‘토지’의 주무대를 관광지화한 경남 하동 최참판댁. 소설의 시대적 배경도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에 이르는 가장 험난한 역사적 흐름을 폭넓게 조망하고 있으며 , 그 서사적 공간도 한반도 남단의 하동 평사리에서 시작해 진주,통영,경성과 만주의 용정,신경,하얼빈 및 일본의 동경 등으로 확대되며 언어가 창조 할 수 있는 삶의 실제 세계를 파노라마처럼 전시함으로써 소설의 거대성을 담아냈다.

 소설이란 박경리 선생에게 삶과 생명 그 문제였다. 그러나 소설이 인생보다 크고 소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리 위대한 예술도 그 터전으로서의 삶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했다. 삶 속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 그것이 삶에의 연민이여 그것이 다시 한의 언어로 승화되어 ‘토지’가 탄생했다.

 늘 선생님을 따스하게 감싸는 통영의 흙이 우리 후세들에게 설상 ‘한(恨)’을 남겨 주더라도 선생의 거룩한 정신과 생명에 대한 위대함은 더욱 영원할 것이다. 작가 박경리 선생님은 든든한 통영에서 오롯이 남아서 우리 곁에 다시 태어나 그의 미발표 유고 시처럼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거야/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 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울었을거야'

박경리 추모공원과 시민분향소 스케치사진

▲ 시민분향소 옆면에 사진과 글
▲ 시민분향소 옆면 사진과 글
▲ 시민분향소 사진과 글 만장
▲ 박경리 추모공원에 이르는 길
▲ 박경리 추모공원 입구를 알리는 소개글, 옆 단지에는 방문객이 글을 남길 수 있다.
▲ 박경리 추모공원을 찾은 참배객이 쓴 메모글을 열어보았다.
▲ '옛날의 그집' 시비를 참배객이 읽고 있다. '버리고 갈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옛날의 그집
▲ 옛날의 그집 시비
▲ 추모공원 내에 있는 추모시들
▲ 박경리 선생님 추모시
▲ 박경리 선생님 묘로 통하는 작은 길
▲ 생명의 작가인 선생의 뜻을 이어 추모공원내에 생명의 새집달기가 이어졌다.
▲ '눈먼 말'
▲ 박경리 추모공원서 보이는 한산도 바다
▲ 박경리 추모공원내에 있는 '마지막 산문'
▲ 추모공원내에 있는 '마지막 산문' 시비와 정자
▲ 박경리 선생님 묘소
▲ 박경리 선생님 묘
▲ 박경리 선생님 묘
▲ 한산도 바다가 보이는 박경리 선생님 묘

서울문화투데이 경남본부 홍경찬기자 cnk@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