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류무형문화유산 한 무대 오른다
한국 인류무형문화유산 한 무대 오른다
  • 김영찬 기자
  • 승인 2011.10.28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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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서 매주 금요일 '비나이다' 공연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사장 이세섭)은 오는 11월 4일부터 11월 18일까지 매주 금요일 오후 8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비나이다’라는 주제로 한국의 인류무형문화유산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 현재 유네스코에 등재되어있는 한국의 인류무형문화유산 11개 중에서 이번공연에서는 4개 종목을 총 3회에 걸쳐 만나볼 수 있다.

▲영산재(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의 한 장면

첫 공연은 11월4일 무대에 오르는 '천년 축제 강릉단오제(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는 강릉단오제보존회의 명인들이 예술성이 높은 명장면만을 골라 일반 관객도 즐길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는 해설을 곁들인 무대로 꾸민다.

두 번째 공연인 인류무형유산 '영산재(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는 사람이 죽은 지 49일이 되는 날 영혼을 극락으로 천도하는 천도재의 한 형태로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빼빼로데이인 11월11일 화려하게 무대에 녹여낸다.

마지막으로는 활달한 여성의 기상의 원무 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8호)와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신비의 춤 처용무(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가 11월18일 한 무대에 서로다른 두가지 이야기를 공연을 통해 보여준다. 

 

11월4일 ‘강릉 단오제’ 소개

강릉단오제는 강원도 강릉시에서 매년 음력 4월 5일부터 5월 7일까지 1개월 동안 진행되는 축제다.

강릉은 BC 120년 부족국가 였던 ‘예국’의 수도였으며 이시기부터 문화적 요충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삼국시대에는 ‘명주(강릉의 옛지명)’로서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유지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선종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불교문화를 번성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를 받아들여 양반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문화환경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모두에 걸치는 융합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배경에서 농악, 농요, 가면극, 민속놀이, 무속제의 등이 번성하였고, 이들을 통합하여 ‘강릉단오제’라는 축제로 진화해왔다.

이러한 강릉단오제는 조선시대(서기 1.600년 이후)에는 음력 5월 5일 단오날 전후 1회 실시해 오다가 현재는 음력 4월 5일 신주빚기, 4월 15일 국사성황신 맞이, 5월 3일부터 7일까지 단오제 본 행사로 연중 1회 한달 여에 걸쳐 실시되고 있다.

 

 


11월11일 ‘영산재’ 소개
 
한국 불교 문화의 중심요소인 영산재는 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던 모습을 재현한 불교의식으로 사람이 죽은 지 49일이 되는 날 영혼을 극락으로 천도하는 천도재의 한 형태이다.

영산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의식도량을 상징화하기 위해 야외에서 열리는 불교행사를 위한 큰 불화를 모시는 괘불이운(掛佛移運)으로 시작하여 괘불 앞에서 찬불의식을 갖는다. 괘불은 정면 한가운데 걸고 그 앞에 불단을 세운다. 이후 영가가 생전에 지은 죄를 씻어내는 관욕 의식을 행하고, 불보살에게 공양을 드린다. 이후 사람들의 보다 구체적인 소원을 아뢰는 축원문을 낭독한다.

영산재를 지내면서 불교음악 범패(梵唄), 화청(和唱) 등을 연주하며,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을 춘다. 이러한 요소들은 우리 전통민속음악과 민속무용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산재는 주로 태고종에서 전해 내려오며 매년 서울 봉원사에서 영산재를 거행한다.

 

 

11월18일 ‘강강술래’ 소개

강강술래는 노래와 춤이 하나로 어우러진 부녀자들의 집단놀이로 주로 전라남도 해안지방에서 추석을 전후하여 달밤에 행해졌다
.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게 우리의 병사가 많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의병술로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 차림을 하게 하고 옥매산을 돌도록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원시시대부터 1년중 가장 달이 밝은 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풍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쪽 하늘에 둥근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여인들은 손에 손을 잡고 오른쪽으로 돌며 둥근 원을 그려나간다. 목청 좋고 소리 잘하는 사람이 맨 앞에 서서 메기는 소리를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강술래’하며 받는 소리를 한다. 처음에는 늦은 가락으로 나아가다 노랫소리도 빨라지고 춤도 빨라져서 나중에는 뛰는 것처럼 동작이 빨라진다. 일반적으로 둥근 원을 그리며 원무(圓舞)를 추다가 흥이 나면 가운데 한 사람이 들어가 춤을 추는 남생이놀이를 비롯해서 고사리꺾기, 청어엮기, 기와밟기, 꼬리따기, 덕석말이, 문지기놀이, 실바늘꿰기 등으로 변화를 주었다. 강강술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구성지고 활기찬 한마당을 이룬다.

여성의 놀이가 적은 한국에 있어 강강술래는 활달한 여성의 기상을 보여준 원무의 하나로 민족정서가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11월18일 ‘처용무’ 소개

처용무란 처용 가면을 쓰고 추는 춤을 말한다. 궁중무용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 형상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오방처용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헌강왕(재위 875∼886) 때 살던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 전염병을 옮기는 신) 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처용무는 5명이 동서남북과 중앙의 5방향을 상징하는 옷을 입고 추는데 동은 파란색, 서는 흰색, 남은 붉은색, 북은 검은색, 중앙은 노란색이다. 춤의 내용은 음양오행설의 기본정신을 기초로 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다. 춤사위는 화려하고 현란하며, 당당하고 활기찬 움직임 속에서 씩씩하고 호탕한 모습을 엿볼 수 있고, 가면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후기까지는 한 사람이 춤을 추었으나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러 지금과 같은 다섯 사람으로 구성되었고, 성종(재위 1469∼1494) 때에는 더욱 발전하여 궁중의식에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 후기까지 노래의 가사나 음악을 바꾸어가면서 전승되어 왔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면서 중단되었던 것을 1920년대 말 이왕직 아악부가 창덕궁에서 공연하기 위해 재현한 것을 계기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