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이크시티연맹 정준 사무총장 인터뷰
세계와이크시티연맹 정준 사무총장 인터뷰
  • 인터뷰-이은영 발행인.정리 서문원 기자
  • 승인 2011.11.14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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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건강강사에서 문화기획자로 자리 매김...도전은 끝이 없다.

세계와이크시티연맹(World Wike City Federation), 얼핏 보면 낯설고 뭐하는 단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이 단체는 걷기(walk)와 자전거 타기(bike)라는 합성어로 구성된 저탄소운동 세계연맹이다. 2011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서울 중구 청계광장에서 펼쳐진 보행자의 날이 바로 이 단체가 만들어낸 기념일이다.

맨 처음 이 운동을 창안하고 국내는 물론 세계보급에 앞장선 숨은 일꾼이 있다. 바로 세계와이크시티연맹 정준 사무총장이다. 유명TV강사로, 학춤 추는 소설가로 문화기획자 (전남 해남 땅끝마을 희망축제, 함평 나비 기차여행축제)라는 다양한 이력을 지닌 그는 한때 좌절과 희망을 오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본지는 지난 와이크시티연맹 서울총회가 열리기 며칠 전 정준 사무총장과 만나 와이크시티의 설립 배경과 의의, 그의 예사롭지 않은 일대기와 성공담을 들어봤다. 

 

▲ 항상 밝은 표정을 짓는 정준 사무총장(WWCF), 그런 그에게도 순탄치 못한 인고의 삶이 존재했다.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정준 사무총장

- 택견, 소설가, 문화기획자 특이한 이력을 갖고 계시더군요?

"지금부터 한 15년 전이겠죠? 그때만 해도 전통무술 택견을 배운 무술인이 왜 소설을 썼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래 희곡작가셨어요. 그 분 영향 덕분에 저도 어릴 적부터 문학을 좋아했고, 아버지는 해방 후 서영훈 전 총재님과 같이 시민단체 활동을 했었죠. 아마 그래서 서영훈 선생께서 지금도 저를 보면 이뻐해 주시고 그런 것 같아요. 택견도 아버지 영향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중국에서 사셨을 때 태극권 고수였답니다. 문무를 겸하셨던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던 거죠. 어머니는 동경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출신인데요. 그런 연으로 일본의 아이키도(우리말로 합기도)를 배웠습니다.

택견 협회 홍보이사도 그렇게 해서 맡았어요.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우연히 읽은 잡지책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여성중앙에서 출판된 ‘라벨르'라는 잡지책이 있는데요. 창간호 특집기사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한국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그들의 노예로 유럽에 팔려갔다는 내용입니다. 읽다가 충격을 받았죠.‘노예로 팔려나간다?’그것도 유럽으로 수만 명이 팔려갔다는 것. 그때 느낌은 충격도 충격이지만 단순했습니다. '어 이건 역사책에서 안 배운건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거죠. 그때부터 당시 취재를 담당했던 기자부터 이태리대사관에서 찾아낸 자료들을 토대로 글을 썼습니다. 이것 때문에 유럽사 공부도 많이 했구요. 팔려가신 분 이름이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분입니다. 꼬레아라면 한국 아닙니까?"

-화가 루벤스 그림에 나오는 ‘한복 입은 남자’가 그 중 한 사람일 수 도 있었겠어요.

"지금은 그 그림이 미국 LA에 폴게티 박물관에 있어요. 이름이 바뀌었어요. ‘코리안 맨’으로 표기돼있지요. 그때 든 생각은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한국판 뿌리’지요. 알렉스 헨리가 썼다는 역사소설 말입니다. 결국 이분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 보려고 5년 동안 충북 진천에 가서 틀어박혀 있었어요. 물론 진천은 문무의 고장입니다. 그곳은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요. 진천은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고 길상사가 있습니다. 무술의 대가인 김유신의 고향이면서 국내 문학가들이 정말 존경하는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무덤이 거기 있지요.

당시 저는 매일 아침 길상사로 가서 운동하고 저녁에는 송강정철 무덤가서 큰 절을 하며 5년동안 소설을 썼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목 ‘안토니아 꼬레아’라는 소설을 발표했더니 이를 알게 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가서 만나봤더니 제게 이러시더군요. “자네. 무술 하는 줄 몰랐다. 무술 하는 장면 하나 사진 촬영해라” 해서 바로 이 근처에서 촬영을 했어요.(당시 기사자료를 보여주며) 그 뒤 얼마안가서 “소설 안토니아 꼬레아를 무술인이 썼다”며 언론에서 다뤄 준 거예요. 사실은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진 한 번 찍혔어요. 그 때는 발차기도 이렇게 나왔습니다.

(자료를 보여주며)지금은 이렇게 안나옵니다. (웃음) 그러던 어느날 광주에서 연락이 왔어요. 광주 내려가서 '독자와의 대화'를 했어요, 그 때 책이 이거예요.(책들을 보여주며) ‘풍류남아 안토니아 꼬레아’ 3권입니다. 그리고 고향인 부산 국제신문에서 전화가 왔어요. 고향이니까 확실히 잘해주더군요.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국제신문에서 인터뷰도 해주고, 책도 소개해 주고. 부산일보도 보도해주고. 그 때 전국을 다 돌았어요. 대구에서 사인회하고 그 때 대전 교보문고에서도 사인회를 가졌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건 제 선친도 대전이 고향입니다"

소설 안토니오 꼬레아를 집필한 정준 사무총장은 IMF사태 이후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문화기획자로 변신. 현재 세계걷기운동본부 조직위원장에서 세계와이크시티연맹 사무총장으로 재직중이다

 

- 가난했던 시절 안해 본 것이 없으신 것 같아요.

"저는 중2 때 아버지를 여의고 소년가장이 됐어요. 저는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나왔고, 대학은 방통대(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를 입학했습니다. 이를테면 장남의 숙명이었죠. 그러다 방통대 학비도 없어서 얼마 다니다 그만뒀습니다. 실은 국문학을 조금 더 공부할 기회를 놓친 거죠. 문학적인 성향은 아버님의 영향과 독학으로 해냈고, 그때부터 저도 자부심이 생기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하루아침에 땅으로 떨어졌어요. 다니던 출판사가 부도가 나고, 사장님은 도망가고, 인세도 못 받았어요. 너무 힘든 때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명작가들은 미리 선인세를 주지만 저 같은 무명작가는 원고는 들고 가서 봐달라고 부탁해도 결국 읽어보지도 않습니다.

몇 년 만에 어렵게, 어렵게 인연(소설작가)이 됐는데 결국 여기까지인가 보다 했죠. 그러고는 저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니까 가장으로서 생활비는 벌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두 번째 한 일이 뭐냐면 부산에서 학춤을 배웠어요. 어릴 때부터 학춤을 배웠어요. 부산이 동래학춤의 고장이죠. 지방 무형문화재3호입니다. 그런데 서울로 상경하니까 궁중학무라는 것이 있더군요. 그래서 서울에서 학춤을 배우고 또 얼마 안가 스님이 학춤을 추시더군요. 이것도 배웠습니다"

-학춤이 생소하긴 한데 학춤은 뭔가 다른 깊이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학춤을  추면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고 정신이 정화되는, 명상 춤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다 보니 올곧게 문학을 하게 되고 “아. 그래서 이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우리민족은 백의민족이고 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잖습니까? 일례로 전국에서‘학’자가 들어가는 지역을 찾아봤더니 300군데가 넘더군요. 학동 학여울, 창학동, 청학동, 학소대 등 등 “학춤을 보급하면 정신을 맑게 하는 문화운동이 되겠다” 라며 여러곳을 찾아가 구상을 밝히자 “보급이 어렵다. 중국의 태극권처럼 하자”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태극권도 원래는 배우기가 어렵고, 중국도 1956년 태극권 체조를 처음으로 만들었어요. 단화 태극권이라고 하는데 5분이면 배울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체조 태극권을 중국정부가 체조로 했으니 전국에 홍보가 됐죠.

그런데 어느 날 한국일보사 사장이 제 운동하는 선배인데 안 팔리는 소설 그만 쓰고 건강 책을 쓰라는 거예요. 그래서 학춤을 체조학춤으로 만들자는 생각에 ‘춤도 쓰고 살도 빼자’라는 제목으로 ‘건강학춤’을 책으로 내놨더니 난리가 난겁니다. 한복 입고 학 탈 쓰고 아침마당 MBC, SBS, CNN 후지TV 등 한 100여차례나 나간 겁니다. 그리고 기업에서 건강강의 요청이 쇄도했어요. 당시 건강 욕구가 그렇게 강한 줄 몰랐습니다.

▲ 절망의 상황에서 땅끝 해남에서 희망을 건져올린 정준 사무총장, 그 때 쓴 시로 정풍송 작곡  설운도 노래 '땅끝에서'라는 노래가 만들어졌다.

 

◆절망 끝에서 희망을 찾다

그러다 IMF가 터지고 강의도 못할 상황이 됐어요. 기업이 망하는데 건강강의는 필요 없는 존재죠. 송파구 남한산성 밑에 살았는데 결국 월세 열 달 밀리고, 당시 둘째 아들이 초등 6학년이었는데 빙판에 넘어져서 60바늘을 꿰매고 어머니는 병들어 누워계시고, IMF사태 때 많은 사람들이 위기에 처했었죠. 저도 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40대 가장으로서 참 고민이 되더군요. 월세 못 내니 벼랑 끝에 서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했죠. 서울로 올라온 때가 1975년었어요. 성공하려고 완행열차 타고 가출한 적 있는데 벌써 30년이 넘었죠. 그 속에서 저는“서울에서 할 거 다 해봤고 노력 할대로 다 해봤고, 그래도 안되면 다 정리하고 고향가자”라고 다짐하고는 지도를 펴놓고 고향 부산을 바라보는데 전라도 해남 땅끝마을 ‘토말리’라는 곳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걸 보는 순간, “맞아. 고향 갈 게 아니고 땅 끝을 가보자. 대한민국 벼랑 끝이 저긴데. 내가 지금 거기 서 있는 거 아닌가. 한 번 저기를 가보자. 한 번도 못 가본 곳이거든요. 제가 쓴 원고들을 배낭에 집어넣고, 술담배도 안하던 제가 소주 한 병 넣었죠. 왜 그리 멀게만 느껴지던지.. KTX로 그리고 8시간을 버스 타고 갔었습니다. 멉디다.

당시 달랑 차비만 가지고 갔죠. 종점에 가게 하나가 있었어요. 컵라면 하나 사서 소주 마시고, 그리고 땅 끝으로 올라갔죠. 그때가 1998년 12월이었어요. 엄동설한 그 한 겨울에 누가 오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거죠. 벼랑 따라 내려가니 해안 초소가 있어요. 제가 군대생활을 강원도 금강산 바로 밑 DMZ에서 했습니다. 비워진 초소, 폐가인 그런 초소는 너무나 친숙하죠.

그 폐가 안에 들어가 침낭 깔고 하룻밤 잤습니다. 술 먹고 잤죠. 노래도 부르며 울분을 이기지 못한 채 울기도 했어요. 미친 짓을 혼자 했습니다. 가슴속에 울분을 다 토해내고 싶었죠. 당시 제가 군대에서 트럼펫을 불렀는데 그 (폐활량)것을 있는 힘을 다해 고함도 치고, 그러다 새벽에 잠시 잠이 들었어요. 새벽에 깨고 해가 떠오르는데, 남다른 감동이 옵디다.

당시 시가 마구 떠올라요. 그래서 썼는데 바로 8편이 써지더군요. 그리고 희망이 떠오르는 거예요. 모든 고민은 서울에 있고 해결된 것은 없지만 가자하고 서울에 와서 조용필 허공을 작곡한 정풍송 선생을 찾아가서 제 시를 보여드렸죠. 그래서 정풍송 작곡 정준 작사 설운도 노래‘땅 끝에서’가 탄생한 거죠. 정식으로 판도 나왔었죠. 설운도 부산 해운대 정풍송씨도 밀양. 저도 부산이라 경상도 사람들 세 명이서 전라도 노래를 만들어 준 것이죠. 경상도 사람 셋이서 전라도 해남을 위해 노래를 만들었어요.

그 때 어떤 느낌이 들었냐하면 나처럼 절망을 가지고 좌절한 사람들과 땅 끝을 가보자. 이 노래도 불러주고,

▲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촬영중 희망의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학춤도 보여주고, 같이 뛰면 나처럼 희망과 용기를 가지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999년 1월 첫 번째 토요일부터 여기 보이시는 것처럼(자료 사진 가리키며)이렇게 하고 구호 이마에 붙이고 이렇게 혼자 미친 듯이 뛰었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알리고 그리고 언론에 나가니까 곳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나는 명퇴당한 사람인데 땅 끝에 가면 당신을 만날 수 있느냐?”라고 물어보는 분 부터 하나 둘 늘어나더니 몇 달 뒤에는 몇 천 명으로 늘어났어요. 2000년 땅 끝서 다시 뛰자. 서영훈 선생님도 오시고 정풍송 선생님도 왔어요.

당시 대한민국 어디든 관광객들이 급감했는데 유일하게 관광객이 넘쳐난 곳이 전남 해남 땅 끝입니다. 제가 전남 땅끝마을로 가서 노래 가르치고 학춤 추고 하니까 언론에 안 난 곳이 없습니다"

-당시 해남군에서 정 총장님에게 감사의 표시로 뭔가 보답을 해줬을 것 같은데요.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해남에 계신 분들이 해남 땅끝 기사가 수없이 보도되니까 사람들이 청와대 가서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보여주고 그를 감동시켜 땅끝 전망대 건립 등 많은 예산을 줬습니다. 280억원을 보내줘서 땅끝 전망대를 새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남 좋은 일 엄청나게 해주고 올라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해 저를 신지식인으로 위촉 해주더군요. 위촉장 하나는 갖고 있습니다(웃음)

후회는 없습니다. 뭔가 바라고 간 게 아니니까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얻었으니까 저 때문에 해남군에 좋은 일이 벌어진 것 또한 저로서는 고마운 일이죠. 그래서 더 좋은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뭐냐면 땅끝으로 왕래 할 때 너무 힘이 드는 거죠. 그냥 놀러가기도 힘든 곳 아닙니까?(웃음)

그런데 현장은 늘 뛰어야 하거든요. 라면 한 박스 먹고 뛰어다니고 생각해 보니 미치겠거든요. 한 겨울에 잠을 잘 곳이 마땅하지 않아 땅끝마을 종점 화장실 옆 컨테이너 박스를 빌려 주말마다 거기서 잤어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중앙일보 기자가  한숨만 쉬며 저를 쳐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저를 방문한 기자는 언론사에서 지시가 내려와 취재를 갔더니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 열악했던 모양인가 봐요. 기자는 제가 호의호식하면서 시민문화운동 하는 줄 알았대요. 막상 도착하고 보니 벌벌 떨며 라면을 먹고, 컨테이너박스에서 자고 그랬던거죠. 이 부산 사나이가 해남을 알리는 운동을 한다는 걸 알고 감동해서 이렇게 칼라로 기사를 만들어줬어요"(당시 보도된 신문을 보여주었다.)

◆설운도 노래 '땅끝에서' 작사...소설가에서 문화기획자로

-전남 해남에 위치한 땅끝 마을에서 축제를 열고, 함평에서 나비축제도 하셨더군요?

"해남에서 서울을 가려면 함평을 지나가야 돼요. 어느 날 함평 나비축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어요. 당시 대회장이 서영훈 선생님이었어요. 이분은 당시 '희망 땅끝 달리기'회 고문이셨어요. 어쨋든 나비축제 1회는 실패했더군요. 천천히 둘러보며 내린 결론은 이 정도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7080세대를 감동 시킬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면 될거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 뒤로 '나비처럼 날다'라는 소설도 쓰고 밖으로 알려주니까 함평군으로부터 홍보대사라는 자리까지 받게 됐습니다. 유명인사 혹은 연예인도 아닌 제가 할 수 있는건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어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일례로 철도청을 찾아가 '진해 벚꽃 축제열차'처럼 '나비축제 전용열차'를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거절하더군요. 진해는 벚꽃축제를 시작한지 20년이 넘었지만 함평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조차 없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그래서 아이디어를 또 냈습니다. 그 기차를 꽃과 나비로 치장한 환상적인 나비열차로 만들어 드릴 터이니 허가해달라고 말이죠. 내려가서 열차를 나비무늬로 안팍 장식하고 보여줬더니 철도청에서 열차 9량을 함평군 나비축제 전용열차로 내줬습니다. 그 뒤로 하동군 홍보위원장, 강원도 정선 4계절축제 자문위원, 강원도 동해시 학수대 천년학춤축제 등 직접 기획하고 연출도 도맡아 했습니다. 어느날 보니 문화기획자가 된거죠"

◆세계걷기운동본부 그리고 세계와이크시티연맹

   
자칫하면 딱딱한 분위기로 갈 뻔했던 세계와이크시티 서울총회. 정준 사무총장은 외국에서 온 발제자 발언전 사회자로 잠시 등장해 분위기를 잘 이끌어냈다.

故 박세직 이사장과의 반기문 UN-사무총장과의 만남에서 오늘나날와이크시티가 탄생했다는 얘기를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최고의‘걷기매니아’로 박세직 88올림픽 조직위원장이었어요. 예를 들면 88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올림픽공원 안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13층에 있었어요.

박위원장이 매일 아침 걸어서 출근했답니다. 제가 조직위원장을 재작년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어요. 박세직 조직위원장은 당시 재향군인회 회장이셨어요.

이 분을 총재로 모시고자 처음 만났을 때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며 걷기행사를 세계로 확대해보자며 제안했습니다"

 건강과 환경을 지키는 캠페인을 만들자고 했던거죠. 그리고 2011년 11월 11일 11시에 반기문 UN사무총장을 초청해서 국제적인 캠페인으로 확대시키자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수락하시더군요. 반기문 총장을 만나려고 2008년 5월에 UN을 가게됐어요. 그런데 만나기 전에 의제를 구상하고 제안해야하는데 UN에서 지정한 물의 날,에이즈의 날을 만들었듯이 한국인 최초로 우리도 걷기의 날을 의제로 제안해보자. 지자체 등 4대 협의체를 모시고 정식회의를 열었어요. 당시 반기문 총장님이 저희와 만나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첫째 UN사무총장을 맡고 세계 모든 문제점들을 보고도 받고 점검해보니 UN이 해결되야할 시급한 과제중에 하나, 글로벌핵심아젠다 1번이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방지. 이 정책을 시급히 추진해야된다. 이것을 추진 안하면 환경난민이 생긴다. 또 잘못하면 환경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이 걷기운동을 지구를 지키고 환경을 살리자는 취지로 시작해보라고 권유하시더군요.

다음은 두 다리를 상징하는 11이 홍보하기 좋다라고 말씀하시며 외국인들에게 설명하기 쉽게 아라비아 숫자 11을 걷기로 상징화해 제시해보라. 유럽은 자전거가 환경운동으로 각광받더라. 자전거를 걷기 운동에 넣으라며 권유도 받았답니다. 끝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한국인들은 용두사미다. 걷기운동을 전력 집중해서 알려라. 말잔치가 되면 안된다. 이렇게 제안하시더군요. 그러나 조직이 어느 정도 갖춰가던 때 박세직 위원장님이 돌아가셨어요. 때문에 조직을 접자는 말도 있었지만 반기문 총장과 이야기 나누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걷기, 자전거 타기운동인 세계와이크시티연맹은 더 많은 동참과 화합이 필요

- 관련기사를 찾아보니 이 세계적인 행사에 서울시장은 빠졌더군요?

"서울은 그렇습니다. 이번 행사에 공식후원이 서울시입니다. 행안부도 있어요. 그런데 문화운동을 하는 것과 공무원의 차이가 있더군요. 서울총회잖아요. 밑에 부터 차단이 되있어요. 보고가 안올라가요. 사실 그날 오전 11시에 서울시장을 모시는걸로 얘기가 다 되있는 걸로 됐어요. 결국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어요. 바빠서 못온다고 하더군요. 안타깝지요"

올 초 3월 KBS아침뉴스에서‘학춤 추는 달인’이라는 제목으로 남한산성 수어장대까지 학춤을 추며 올라가는 기인이 보도된 바 있다. 개량한복을 입고 배낭에는 학 모양을 한 가면을 들고 가던 사람.‘학춤 추며 걷기’라는 영상제목을 보며, 무척이나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있다.

바로 그 학춤 추고 가던 사람이 정준 세계와이크시티연맹 사무총장이다. 지난 해 정부가‘보행자의 날’을 제정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지난 2007년 故 박세직 초대 세계걷기운동본부 이사장(88올림픽 위원장)과 함께 한국에서 처음 걷기운동을 시작한 그는 2년 뒤 반기문 UN사무총장을 만나 범세계적인 친환경-저탄소 운동의 일환으로 걷기와 자전거 타기를 전도하는 세계와이크시티연맹을 만들어 냈다.

지난 1997년 IMF사태에서 희망을 찾고자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희망을 노래하며 당시 좌절과 절망 속에 살던 시민들에게 희망의 에너지를 전도했던 정준 사무총장은 ‘무릎팍도사’에 초대인물 소개 도중 나오는 “그런 당신은 욕심쟁이! 우후훗!”을 들을만 하다. 너무 험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여전히 희망을 말하기 때문이다. 정준, 자신의 자전 소설과 시 출간을 희망하며 또 다시 내일을 향해 두 다리를 힘껏 땅에 딛고 향해 간다. 내일을 알 수 없는 한국. 그리고 한국사회, 그의 역할은 분명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