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원조 현대무용가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류의 원조 현대무용가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 서문원 기자
  • 승인 2011.11.3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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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 개명도 하지않고 조선출신 스포츠 선수들을 지원하기도 해 친일파로 몰아선 안돼

월드피겨스타 김연아, K-POP 아이돌 스타들이 세계적인 우상으로 자리 잡은 2011년은 국내외 매스컴에서 고루 다뤄줄 만큼 최전성기를 맞고 있다. 불과 3~4 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하면 분단국으로 또는 국회폭력사태를 보도하던 유럽과 미국 그리고 남미 매스컴들도 한국문화를 집중조명하기 시작했다.

이뿐 아니라, 일본 매스컴이 문화 라이벌로 생각조차 않던 한국의 대중문화성장을 경계하며 최근까지 각종 분석 기사를 보도할 정도로‘한류열풍’은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80년 전 세계를 누비며 한국을 알린 한류스타 원조가 있다. 다름 아닌 아시아 현대무용의 초석을 다진 최승희 선생이다.

현대무용계의 대모 최승희, 탄생 100주년 기념식은?

 그녀는 16살이 되던 1926년 일본 동경에서 데뷔했다. 그로부터 10년 뒤 아시아는 물론 프랑스, 독일, 네델란드, 벨기에 그리고 미국과 남미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돌며 장기순회공연(3년)을 강행한 조선여성 최승희. 올 해가 탄생 100주년이다. 그런 그녀의 명성에 비해 국내기념행사는 놀랍도록 차분하다. 항간에 친일파로, 월북 예술인이라는 오명이 오랫동안 이야기된 탓일까?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자란 유년기

지난 1911년 11월 24일 열강의 침탈로 무너져가던 조선의 수도 한양. 찢어지게 가난한 서당훈장의 막내딸로 태어난 최승희. 서울 숙명여고에 입학해 월반을 하며 집안생계를 이으려던 그녀는 큰오빠이자 문예 운동가였던 최승일을 따라 당시 일본 현대무용계에서 이름이 높던 이시이 바쿠 공연을 본 뒤 큰오빠의 주선으로 이시이를 만나 제자가 된다. 당시 나이 15살.                               
최승희의 탤런트는 일본최고의m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눈에 띄었고, 데뷔1년도 안 돼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무용가로써 명성을 날리게 된다. 그 뒤 와세다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수학하던 안막(안필연)을 만나 결혼한다. 안막은 당시 한일 지식인들의 사회주의자 모임인‘카프’에서 활동한 인물로서 현대무용가 최승희의 매니저로 평생을 살았다.

1937년 최승희는 당시 세계무용사에 유례가 없는 3년간의 기나긴 세계 순회공연을 강행한다. 미국과 유럽 다시 미국을 거쳐 멕시코부터 시작해 남미전역에서 공연했으며, 제2차세계대전전까지 중국과 만주를 오가며 장기순회공연을 했다. 그녀의 해외공연소식은 프랑스, 독일, 미국, 남미 언론에 대서특필 될 정도로 큰 화제를 모았다.

1945년 여름 일본이 패망하고 한반도가 해방된 뒤 남편 안막의 설득으로 월북한다. 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북경과 평양을 오가며 국민무용가로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이념이 아닌 '조선무용인'으로서의 가치를 선택한다. 결국 한국동란직후 사상비판을 받다 남편 안막과 몇 년을 두고 숙청된다. 최승희가 지금도 친일, 친북인사라는 딱지가 붙은 이유가 바로 위 같은 스토리 때문이다.

평전‘춤추는 최승희’(1995)에 소개된 선생은 무용계 데뷔 이래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한국인'이라고 선언했고, 끝까지 지켜냈다. 적어도 그녀로부터 후원을 받거나 만났던 손기정 옹과 같은 조선최고의 스포츠인과 문학인들은 그녀의 삶을 시대적 가치기준에 따라 평가하지 않았다.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장광렬 무용평론가와 인터뷰를 가졌다.

최승희 바로잡기가 먼저

- 올 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현대무용가 최승희 선생이 국내매스컴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항간에 제기된 월북인사 혹은 친일부역 때문인가요?

“18일 한국에서 2주전부터 일본. 중국에서 학술회와 기념회가 있습니다. 북한은 다음달부터 행사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문제는 한중일 이 세 나라만 최승희에 대한 업적을 기리고, 여러 행사를 주최해왔습니다. 그러나 해외로 가면 없습니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먼저 세계무용사에 최승희 선생이 논의가 안됐었습니다. 둘 째 최승희를 연구하는 외국학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셋 째 학자들과 무용협회에서 최승희를 알리는 노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단지 몇몇 뜻있는 분들이 모여 ‘최승희 바로잡기’일환으로 접근해 지난 동안 여러차례 학술회의를 열었습니다”

장광렬 대표는 이어“지난 10일 '최승희 춤의 근대성과 동아시아 확장성'을 주제로 서울 대학로 예술의 집에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최승희의 친일부역도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최승희씨가 태어난 해가 1911년입니다. 그때는 일본강제점령기가 시작되는 해입니다. 나라를 잃은 사람이 일본에서 유명무용수로 성공해 일본군 위문공연과 모금활동을 한 게 전부입니다. 최승희는 창씨개명을 않고 본인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또 손기정 옹과 여러 조선출신 스포츠선수들을 지원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결코 친일부역혐의로 몰아가기에는 어렵다는 겁니다. 단순히 흑백으로 평가하지 말았으면 하네요.”라고 언급하며 운전 중이라고 밝히면서 다음에 만나면 최승희 선생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