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명인을 찾아서 - 인간문화재 이은관 명창
이 시대의 명인을 찾아서 - 인간문화재 이은관 명창
  • 김영찬 기자
  • 승인 2011.12.0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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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앞만 보며 달려가는 ‘국악계의 큰 별, 이은관’

배뱅이굿의 일인자, 서도소리 인간문화재 이은관 옹을 <서울문화투데이>가 지난 15일 서울 서대문구 영천시장 입구에 있는 그의 ‘서도가요’ 교실에서 만났다.

인사를 드리고 앉자마자 질문도 던지기 전에 95세의 나이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해맑은 웃음과 너무나 슬픈 표정을 번갈아 지으면서 낭랑한 목소리로 먼저 ‘배뱅이굿’ 한 소절부터 들려준다.

순간 ‘작은 거인’이라는 느낌이 확 다가온다. 1917년 강원도에서 태어나, 소리라곤 약장수 유성기 소리가 전부였던 시절의 소년 이은관은 ‘배뱅이굿’ 하나로 서울에 진출, 당대 최고의 만담가 신불출을 만나 종로 극장가의 스타가 된다. 그리고 1957년 이은관은 ‘영화 배뱅이굿’을 통해 그의 소리를 전국에 알렸다.

그의 소리엔 언제나 우리 민족의 아픔을 위로할 힘이 있었고, 찡그린 얼굴을 활짝 펴게 해주는 익살과 해학이 넘쳤다. 어쩌면 우리 연예계의 만능엔터테인먼트 1호는 그가 아닐까?


그는 무대에서 익살맞은 곱사춤을 추고 색소폰을 불고, 장구를 발로 돌리는 파격적인 모습을 선보이는 등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이런 그의 무대를 바라보는 당시의 국악계 시선은 곱지 않았다. 국악하는 사람이 가벼워선 안된다는 비판도 많았다. 그래서 그가 국악계의 인정을 받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는 무려 10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너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끝내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우리 소리가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선 우선 관심을 끌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 철학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95세 나이에 또 다른 도전 준비해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힘썼던 이은관의 정신은 해외에 소개되기도 했다. 1997년 호주의 한 박사 논문에 이은관이 소개된 것. 당시 한국을 직접 방문했던 멜리앙케이 교수는 아직도 그의 배뱅이굿을 잊지 못한다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남다른 그의 소리를 배우고자 바다 건너 온 제자도 있다. 10년 넘게 선생에게 소리를 배워온 미국인 슈나이더는 전통에 대한 한국인의 무관심이 오히려 안타깝다고 토로한다.

빼빼로데이였던 지난달 11일 아산의 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하고 연주솜씨를 뽐냈던 이은관은 요즘 또 하나의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소리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이 걱정돼 직접 국악가요 음반제작에 나선 것. 요즘말로 ‘프로듀서’이자 ‘작사, 작곡가’ 역할까지 자임하고 내년 초 음반을 낼 계획이란다. 소리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아흔 다섯, 5년 모자란 백년의 인생을 그는 쉼없이 달려가고 있다.

“40, 50년 전이 내 전성시대였지. 그때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영화도 찍고 했으니까... 지금은 나를 모르는 세대도 많을거야. 최근에 몇 번 TV에 나갔는데 ‘이은관 아직 살아있구나’한 사람들 많았을거야. 죽은 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배뱅이굿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도소리 명인 이은관 옹은 요즘도 일주일에 두 번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전국을 다니며 공연하는 엄연한 현역(?) 국악인이다.

15일 이은관의 서도교실에서 만난 그는 표현이 좀 적당하지 않은듯 하지만 정정하다 보다는 싱싱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다. 얼마나 눈이 밝은 지 계절감각을 잃은 모기 한 마리가 인터뷰하는 중간에 자신의 앞을 지나가자 손으로 잡아낸다. 그런 그에게 물었다. 작은 모기가 보이시느냐고... 그랬더니 손을 내민다. 그의 주름진 손바닥에는 거짓말처럼 모기 한 마리가 죽은 채 누워있다. 그래서 물었다. 건강의 비결이 뭐냐고...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질문해주기를 기다렸다는듯 “소식(小食) 때문이야”하고 답한다. 그리고 한 마디 더 한다. “사과도 매일 먹어. 자네도 오래 살고 싶거든 사과 많이 먹어” 하면서 해맑은 표정을 짓는다.

그는 이천(伊川)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그는 보통학교를 마치고 집의 농사일을 거들면서 시간만 나면 유성기로 박춘재 이진봉 박부용 같은 당대 소리꾼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예인의 꿈을 키웠다. 1937년 20세의 나이에 철원에서 열린 전국 신인 남녀 콩쿠르에서 ‘사설난봉가’와 ‘창부타령’을 불러 장원을 했고 이듬해부터 황해도 황주의 이인수 선생에게서 배뱅이굿과 서도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스승이 실력은 최고야. 재담이 길고 다양했어. 선생님의 재담은 나도 따라 갈 수가 없었어. 그런데 잘하든 못하든 레코드 많이 팔리면 그게 최고였거든. ‘저 사람 레코드 판 냈다’ 해야 알아줬어. 그 당시는 그랬어...”음반을 내지 못한 탓에 스승의 실력이 묻힌 반면 자신은 음반 녹음을 많이 한 덕에 유명해졌다는 겸손 섞인 설명이다.

아직은 현역 국악인

이인수 선생에게 3년간 배뱅이굿과 서도소리를 전수받은 뒤 이은관은 서울로 올라와 조선가무단에서 유랑극단 시절을 보내면서 높고 고운 소리의 구성진 창법으로 명성을 쌓아 나간다. 배뱅이굿 이은관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서울 제일극장에서 열린 민속경진대회를 통해서였다. 배뱅이굿으로 객석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어 인기를 얻었던 황해도 출신 김계춘과 공연을 함께 하면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한다. “김계춘 그 양반이 관객들을 온통 울려 놓으면 내가 나서서 실컷 웃겨 놓았지. 내 소리의 폭이 본래 넓고, 또 높은 소리가 맑고 간드러지게 나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배뱅이 이름도 한 번 못 부르고 내려올 뻔 했어”

배뱅이굿은 이름처럼 굿이 아니라 남도의 판소리처럼 한 사람의 소리꾼이 장구 반주에 맞춰 배뱅이 이야기를 서도소리로 풀어내는 1인 창극이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탁발 나온 상좌중과 사랑에 빠진 정승의 딸 배뱅이가 중이 입산한 뒤 상사병을 앓다 죽자 부모가 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팔도에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건달 청년이 거짓 무당 행세로 횡재를 한다는 내용이다. 판소리에 비해 역사가 짧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오랫동안 국악 장르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배뱅이굿은 이인수의 스승인 김관준이 처음 불렀다고 알려져 있어 역사가 10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은관 옹이 실력과 명성에 비해 1984년 뒤늦게 배뱅이굿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은 것도 그런 역사가 작용한 탓이다.

구전민요 악보로 정리한 ‘가창총보’ 발간

민속악을 하는 대부분의 국악인과 달리 그는 악보도 읽고 쓸 줄 안다. “6·25 때 총알이 왔다 갔다 하던 시절이지. 까딱하면 죽는 거야.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왔는데 인민군 장교가 마을 사람들 다 모아 놓고 인민군가 악보를 보여주면서 ‘이거 지도할 사람 있소’ 한 거야. 그러니까 여자 하나가 나와 ‘제가 해 보겠습니다’ 하고는 악보를 보면서 노래를 했지. 입이 딱 벌어졌지. 악보라는 걸 그때 처음 봤어. 그때부터 악보 읽는 법을 배웠지”

구전으로 명맥을 겨우 유지해오던 우리 민요가 후대에게 오롯이 전해질 수 있게 된 데에는 그때 그 여자 덕분에 그가 악보를 배우고 기록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구전만 되던 민요 140여 곡을 악보로 정리해 1999년에 가창총보라는 제목의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50여 년 전부터 틈틈이 신민요를 창작한 게 50여 곡이나 된다. 지금도 창작활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고, 얼마전 제자가 그의 곡으로 음반도 냈다. 그는“그렇다고 전통을 게을리 한 건 아니야. ‘배뱅이굿 하는 놈이 짧은 유행가나 하나’ 하고 욕 할까봐 (창작곡) 발표를 별로 못했어”하면서 아쉬워 한다. 미수(米壽·88세)를 넘어 상수(上壽·100세)를 바라보는 그의 바람은 국악이 좀 더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이다.“난다 긴다 하는 대중가수들도 한창 때가 지나면 한물가기 마련이잖아. 그런데 이은관은 아직 알아주잖아. 국악이 이렇게 생명이 길어. 그런데 옛날 것은 어려워. 그래서 내가 좀 쉽게 만들고 있어. 그리고 나보다 더 잘하는 제자가 나왔으면 하는 게 마지막 바람이야”

사람들의 눈물을 쏙 빼놓는가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배꼽이 빠질 듯한 웃음을 안겨 준 아흔다섯의 그에게 앞으로 10년은 걱정이 없겠다는 말을 전했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 우리 곁에 계셔달라는 기원을 담아서...그랬더니 “나도 언젠가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날이 오겠지... 그래도 배뱅이 곁으로 가는 그날까지 제자를 부지런히 양성하고 무대에도 열심히 오를거야. 그리고 내년에 내가 쓴 곡들을 담은 음반이 나오면 많이 사랑해주길 바래. 그러면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답한다.

강산이 10번 바뀌는 동안 고집스럽게 우리 소리로 인생을 채워 온 위대한 명창 이은관. 그가 있어 우리가 참 즐겁고, 행복했듯 건강하고 행복한 그의 소리인생도 계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영찬 기자 press@sctoday.co.kr

사진 조상래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