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왕기석 명창] "소리는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
[인터뷰-왕기석 명창] "소리는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1.12.21 1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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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전통기반으로 다양한 시도 행해져야

■ 30년 소리꾼 외길 인생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위치한 레스토랑 ‘해와 달’에서 만난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가 바로 소품 보관실이었어요. 그리고 저긴 연습실이었고... 제가 산증인 아니겠습니까”(웃음)

국립창극단에 입단한 게 벌써 30년 전이다. 그렇다고 백발의 배우를 생각했다면 오산. 그는 이제야 지천명의 문턱에 서있는 왕기석 명창이다.

여러 명창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보적인 창극 배우로 활동해온 왕기석 명창은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기량을 가늠케 한다. 그는 판소리 명창으로서만이 아닌, 국악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중견 명창으로 ‘변신을 잘 하는’ 소리꾼이다. 좌중을 압도하는 장쾌한 육성과 뛰어난 연기력을 모두 갖춘 왕기석 명창은 ‘소리꾼’만으로 30년 외길 인생을 걸어 왔다.

“1980년이에요. 그때 연수단원으로 들어와 소리를 시작했어요. 허규 선생님이 극장장으로 계실 적이죠. 이제와 보니 전 참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라며 그는 30년 전을 회상한다. 남자소리꾼이 흔치 않았던 시절, 형을 만나러 국립창극단에 찾아갔다가 우연히 남해성 선생의 눈에 띄어 소리판에 입문한 그는 하늘같은 선생님들로부터 당시 직접 소리와 연기를 배울 수 있었다며 자신은 소리꾼으로서 참으로 행운아라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2011 파리한류엑스포-한·불 경제인의 밤’의 만찬자리에서 외국관객들에게 판소리를 소개하며, 불어로 판소리 한절을 선보이기도 했다. “서투른 불어실력이지만 당시 분위기에 맞춰서 ‘불어 판소리’를 했는데 관객들이 아주 인상깊어하더라고요. 케이 팝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통소리에도 한류바람이 불길 바랍니다” 그는 앞으로도 해외공연 때마다 짧게라도 그 나라의 언어로 무대를 보여주려 한다고.

■ 우리소리 알리고자 해외 신기록 세우기도

그는 1987년 일본을 시작으로 아시아, 유럽, 남미 등 20여 개국의 해외 순회공연을 통해 한국 전통예술의 진가를 세계무대에 알리는데 공헌해왔다. 특히 2009년 6월 독일 ‘칼수르에 국립음대, ‘함부르쿠’, ‘뮌헨’에서 인간한계에 도전하듯 일주일동안 세 번의 ‘수궁가’ 완창무대를 가지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주변에서 말리기까지 했지만 독일에 온 김에 우리 소리를 한번이라도 더 알려야 된다는 사명감 하나로 무대에 섰던 것이다. 모두들 불가능이라고 말했지만 무사히 무대를 끝마칠 수 있었던 건 다 그의 열정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외국관객들은 왕기석 명창의 무대가 끝나고도 30분 동안 기립박수를 치는 등 그의 무대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리를 떠나지 못하며 그의 소리에 찬사를 보냈다.

   
왕기석 명창은 두 살 터울 형인 왕기철 명창과 함께 ‘형제명창’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형제끼리 동시대에 활동하다보니 주인공으로 더블캐스트가 되는 등 같은 일을 해 도움이 많이 됐다며 웃는 그가 소박하기만 하다. 우애 깊은 형제사이이지만, 판소리에서만큼은 선의의 경쟁 사이였다. “제가 형보다 일찍 소리를 시작했지만 큰 틀 안에서만 형을 도와줬지, 세세한 것은 알려주지 않았어요. 나중에 형이 말하길 그땐 서운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게 진정한 도움이었다고 말하더라고요” 각자 자기만의 것으로 채워가는 것이 예술이라 그는 말하며, 지금도 후배들에게 그 점을 강조한다고 했다.

■ 창극의 새로운 가능성, ‘가족창극’

왕기석 명창은 그의 시원시원한 목소리만큼이나 판소리의 발전과 대중화를 위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는 판소리 다섯마당의 고전영역을 바탕으로 창작 레퍼토리를 확장해 현대적 감각에 맞게 소리영역을 개척해오고 있다. “기존의 창 소리는 대중이 접하기엔 너무 어려워 마니아에게만 한정돼있었죠. 그런 점을 탈피하고자 ‘가족 창극’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가족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창극을 만들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미래 관객을 개발하고 보다 친숙한 판소리로 다가가기 위해 그는 ‘가족 창극’이란 장르에 관심을 가졌다. 어린이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어려운 판소리 사설을 현대적인 구어로 풀어 각색하면서도 본연의 세태풍자의 해학성은 그대로 담았다. 그가 작창한 ‘토끼, 용궁에 가다’, ‘흥부 놀부’ 등을 관객의 눈높이에 맞게 무대와 객석이 하나 되는 공연장에 올려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흥부 놀부’에선 오늘날 이슈가 되는 ‘왕따’, ‘과열경쟁’ 등 아이들이 현실적으로 떠안고 있는 문제들을 ‘왕따 송’ 등을 통해 익살스럽게 표현해 판소리 고유의 해학과 풍자는 잃지 않았다. “전통도 전통이지만 현실에 맞게끔 변화해가는 것 또한 전통을 계승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기본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시도는 모두 긍정적으로 바라본다고 했다.

또 그는 판소리, 창극 전용극장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요즘처럼 객석 따로 무대 따로 있는 공연장에서는 진정한 판소리를 할 수 없어요. 원래 ‘우리의 판’은 마당이고, 대청마루였잖습니까. 막걸리도 한잔 들이켜야 추임새도 절로 나오고 하는 것이죠.(웃음) 하루 빨리 판소리 무대가 밖으로 나와야합니다” 그래서 이번 전주소리축제도 왕기석 명창의 의견대로 ‘밖으로 나와’ 전주한옥마을 구석구석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 창극전용극장 설립 위해 힘쓸 것

그는 창극아카데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창극배우란 전통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연기력과 함께 재능 또한 뒷받침 돼야 하죠. 우리의 소리가 일본의 가부키나 중국의 경극처럼 자리 잡기 위해선 창극전문배우를 체계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아카데미와 전문극장의 설립이 시급합니다. 저 역시 이 점에 매진하는 중이에요”

집과 가족이 전주에 있는 그는 ‘국악도시’ 전주에 애착이 많다. 지난 10월 ‘전주소리여행’을 진행하고, 전주3대문화관 중 하나인 전주소리문화관의 설계부터 참여하는 등 그는 전주에서 직접 발로 뛰고 있다. 전주에 가면 어디에서나 판소리, 풍물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는 국악의 수도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전주의 전통문화도시화를 위해 힘쓸 것이라 했다.

■ 건방져지면 예술은 때 묻기 마련

 

그도 좌초 일보 직전의 위기에 봉착한 적이 있었다. 그는 1986년 서울아시안 게임 문화예술축전 참가작 ‘용마골 장사’에서 생애 첫 주연인 ‘만덕’역을 맡았다. 공연 후, 좋은 평을 받으며 그는 남자소리꾼으로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앙코르공연을 앞두고 연습시간에 늦은 그는 하루아침에 주연에서 조연으로 전락하게 된다. “나이도 제일 어린놈이 연습시간에 늦었다며 호되게 혼났죠. 그만둘까 생각하곤 사표를 써서 가슴 속에 품고 다니기까지 했어요” 그는 당시를 ‘자성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어린 나이에 주인공을 맡아 우쭐해지고 건방져질 수도 있던 저를 허규 선생님께서 꺾어주신 거예요. 오히려 이 일을 계기로 저는 제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각오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하다는 그는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건방떨다보면 예술이란 때가 묻기 마련이라는 그의 말과 경험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지 않을까.

왕기석 명창은 1994년 첫 완창무대 ‘수궁가’에서 느꼈던 자신감과 성취감을 되새기며 안주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15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 뒤에 자신은 이제야 걸음마단계에 불과하다며, 끊임없는 노력을 다짐했다. 소리란 자신에게 도전하는 과정이라며, 무대에 서기 전이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긴장되지만 ‘소리판은 즐겨야 제맛’이란 생각 또한 여전히 변함없다고 했다. “소리는 한방이에요. 단가를 하든 완창을 하든 시작하는 순간, 듣는 사람이 한방에 소리에 빠져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어요. 만약 그러지 못하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하며 재미없는 것으로 기억되겠죠” 영원히 소리꾼으로 남는 것이 꿈이라는 왕기석 명창. 그는 오늘도 소리다운 소리를 위해 목청을 가다듬는다.

 

왕기석

1989 중요무형문화제5호 판소리 '수궁가' 이수자(문화재관리국)
1999 KBS서울국악대경연 판소리부문 장원
2000 모범예술가 표창(문화관광부장관상)
2005 제31회전주대사습대회 판소리명창부 장원(대통령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