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먼저 본 영화] 영화 ‘비기너스’
[기자가 먼저 본 영화] 영화 ‘비기너스’
  • 영화공연전문기자 이경원
  • 승인 2011.12.2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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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사람들의 ‘그 다음’을 위한 조언

남의 일 같은 영화가 있고 남의 일 같지 않은 영화가 있다.
그리고 남의 일 같은데 남의 일 같지 않게 만든 영화가 있고,
남의 일 같지 않은데 남의 일 같이 만든 영화가 있다.
극장 앞에서, 괜스레 내 마음을 건들지 말고 그냥 ‘플레이!’를 외치고 싶은 기분일 때와,
누군가 내 마음에 침투해서 어루만져 주길 원할 때에 따라 입장하는 영화관은 달라질 것이다.

관객이 정확히 무엇을 느껴야하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남의 일을 내 일처럼 느끼도록 힘주어 고무시키는 영화는, 보는 동안 시간낭비 돈 낭비하지 않을 거라는 관객의 기대를 최소한은 만족시켜준다. 그러나 그런 영화가 가진 매력에 잠시 젖어있는 행복함 뒤엔, 후희와 구별되지 않는 자기 현실의 허탈감 같은 게 뒤따르는데, 그 괴리의 폭이 가장 큰 장르는 환타지도 스릴러도 아닌, 아마도 사랑이야기일 것이다. 극장을 나서며 어느 순간 당신의 애인은 영화의 커플과 우리를 마음속으로 비교하고 있다. 솔로에게 이 괴리의 허탈함은 우울증을 유발한다. 정말 그저 ‘나’ 같은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없는 걸까.

▲영화 '비기너스'의 두 주인공, '애너'와 '올리버'

‘비기너스’는 내 일을 남 일처럼 무뚝뚝하게 만들어 놓고는, 왜 무뚝뚝하게 굴었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다.
멜로가 무뚝뚝하다니. 하지만 영화는 결국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당신의 무뚝뚝했던 사랑을 나는 굳이 미화시킬 생각이 없고, 다만 당신과 다르지 않게 무뚝뚝한 표정을 가진 어떤 남자의 시작을 영화 안에서 함께 지켜봅시다.”라고. 그렇기에, ‘비기너스’는 커플이든 솔로든 보고 난 후 허탈감이 덜하다. 허탈감이 아예 없지 않은 이유는, 이완 맥그리거와 멜라니 로랑의 멋지고 예쁜 모습 때문이다. 단언하건데, 그들은 이 영화를 만든 의도에 반하는 거부할 수 없는 미스캐스팅이다.

올리버(이완 맥그리거)는 할(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아들이며 애나(멜라니 로랑)는 올리버의 새로운 애인이다.
할은 게이지만 44년간 스트레이트로 살다가 부인이 암으로 사망한 뒤 게이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몇 년 뒤 역시 암으로 사망하고, 올리버는 할을 떠나보낸 슬픔에 젖어 있다가 파티에서 애나를 만난다.
할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엄마의 모습과 어린 자신의 모습은 올리버에게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못했고,
첫눈에 반한 애나와의 연애는 삐걱댄다. 그러다가 죽기 전 게이로서의 삶을 시작하며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아버지 할의 모습과 대화에서 올리버는 관계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리고 떠난 애나를 다시 찾아간다.

▲올리버(이완 맥그리거)

이 줄거리 요약과 실제 영화의 플롯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마이크 밀즈 감독은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하여 저 단순한 줄거리를 화면에 콜라주 해놓았다.
아버지 할의 시대와 취향에 관련된 오브제와 올리버 자신의 시대와 시선의 오브제가 내내 교차되면서,
올리버의 외로움과 결핍 그리고 서투른 관계의 근원을 객관화 시킨다. 구성 역시 특별한 힌트 없이 현재와 몇 달 전과 몇 년 전을 오간다. 조용히 감정을 조금씩 쌓아서 후반부에 어떤 식의 카타르시스를 끌어내는 것이 안전했던 멜로드라마의 관습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이 깊지 않아 이렇게 산만하거나, 꾸미려는 듯 보일 수 있는 구성을 택한 것이라 의심 할 필요는 없다. 단지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에서 마이크 밀즈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자전적으로 보지 않아줬으면 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객관화해서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자의식이 작용했으리라. 이는 밀즈 감독이 CF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CF에 예술이 있다고 믿지 않는 것과 같이, 영화안의 감정도 선동되지 않고 객관적인 구성위에 수놓아져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듯 하다.

▲마이크 밀스 감독

영화에는 대단한 상처와 사고에 허덕이는 극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국적인 배경과 제스쳐들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 그저 나와 우리 부모와 못난 내 친구의 일상 같다.
항상 관계란 것은 왜 어려운 것인지 이유를 모른 채 허덕거리다 나도 모르는 사이 시작되어있고 끝나있듯이.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아버지 할은 아들 올리버에게 아내와의 관계에 대해 하나씩 고백하기 시작한다.
올리버의 눈에 그저 서로 사랑하지 않는 커플로 보였던 두 사람이었지만, 어머니의 청혼에 자신이 게이임을 밝혔던 할과 그런 할에게 ‘상관없다’라며 자신의 사랑을 확신했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준 그 여자를 보며 ‘무슨 짓이든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아버지 할의 사랑을 듣는다. 상대를 사랑하는 것과 함께 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평생 포기하지 않았던 부모지만, 결혼 이후 순탄치 않았던 두 사람 사이에서 이유모를 결핍들에 익숙해져버린 올리버는, 애초에 행복한 관계에 대한 믿음조차 가지지 않은 채 행복할 수 없었던 현상만을 보고 익혔던 것이다. 올리버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은 애나와 침대 앞에 나란히 앉아 말한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애너(멜라니 로랑)

영화는 긍정의 오픈엔드로 끝이 나지만, 올리버와 애나가 행복하게 살게 될지 아닐지는 모른다.
확신에 찼던 아버지 할과 그의 아내가 그렇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올리버와 애나는 이제 두 번째 시작을 맞이했고, 다가올 수많은 시작들과 고통들이 오랜 후에 방황이라 불릴지 행복이라 불릴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무렴 어떤가? 이미 시작되었고, JRR톨킨 아저씨의 말처럼 방황하는 자들이 모두 길을 잃은 건 아니니까.
매번 서툴었던 나와 당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