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석우 관장]국제화 시대, “기존에서 재창조한 겸재의 정신 벤치마킹해야”
[인터뷰-이석우 관장]국제화 시대, “기존에서 재창조한 겸재의 정신 벤치마킹해야”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01.0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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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정선기념관, 겸재 화법 창의적으로 계승해 나갈 것

관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책들로 빼곡한 이석우 겸재정선기념관장의 책꽂이다. 본연의 역할만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그의 책꽂이는 늘 연구하고 공부하는 그의 학자적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꾸밈없이 꽂혀 있는 책들은 분명 하루에도 몇 번씩 꺼내보는 그의 버릇의 자취를 나타낸다.

“요즘은 겸재를 중심으로 조선시대를 공부하고 있어요”

한 편에 쌓여있는 책들이 무안했는지 그는 어제 늦게까지 보다만 책들을 아직 정리를 못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관장실은 이면이 창으로 돼 있어 따사로운 햇빛과 노니는 새들의 모습을 그대로 즐길 수 있다. 아무렇지 않게 창문 안을 바라보는 새의 모습에 왠지 모를 따뜻함이 그저 자연스럽기만 하다.

◆ ‘선비정신’ 본받아야

그는 요즘 조선시대에 매료돼있다고 했다.

“조선시대에서는 학문을 하지 않고서는 관리가 될 수 없었죠. 기본이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이뤄져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런 면에서 오늘날 지성인들이 배울 바가 많다고 했다.

“요즘 우리 사회가 너무 각박하고 가파른 것 같습니다. 자기 생각 외에는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조상들은 상생의 정신을 추구했는데 이는 음식에서도 찾을 수 있어요. 썩어 없어질 것이 아닌 발효음식으로 배추를 재탄생시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윈윈전략이 드러나 있죠. 경제적 부는 모래위의 집과도 같아서 정신적인 뒷받침이 없는 물질주의는 결국 허물어지지 않을까요. 분수를 지키고 상생하려했던 조상과 선비의 정신을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해봐야할 것입니다”

그는 역사학자로 서양사를 전공했고 유럽문화사에 관심이 많다. 이는 그의 저서 가운데 ‘대학의 역사’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확인할 수 있겠다. 역사학 전공 교수로 30여년을 재직했으나 중학시절부터 미술 지향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역사학자이기 전에 화가 지망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많은 부모가 그랬듯이 미술을 접고 학자로서의 길을 걸을 것을 권유받고 역사학도가 됐으나 타고난 재능은 어쩔 수 없어 유학시절과 교수생활을 거치는 동안 세 번의 그림 개인전을 갖고 수십 권의 스케치북을 남겼다.  
  
◆ ‘학제간의 관계’, 역사와 미술의 통합

미술이 곧 역사라고 그는 말한다.

“미술과 역사는 분리된 것이라고, 문헌만 역사의 자료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역사와 미술은 실제로 아주 가까운 관계이죠. 즉 학제간의 관계에 놓여있어요”

역사학자인 그는 미술을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미적 감각으로 역사 또한 더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었다.

“예전엔 전문가의 시대였다면 이젠 통합의 시대입니다. 통합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한 시대이죠”

이러한 그의 역사학 지식과 미술 감각으로 역사와 미술의 학제간 관계에 대한 꾸준한 관심으로 ‘역사와 미술의 통합’을 연구해왔다.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장, 경희대박물관장, 한국대학사학회장을 역임, 한국 사학자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역사학회 해외 펠로우로 선정됐으며, 국내·국제미술평론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저서를 써왔다.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역사의 들길에서 내가 만난 화가들’, ‘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 등 그가 펴낸 서적의 제목만 봐도 역사와 미술의 학제간의 관계에 관한 연구 활동에 심혈을 쏟아온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겸재정선기념관의 초대 관장에 선임된 것도 이렇듯 모든 영역과 장르 사이에 벽이 없어져가는 현 시대적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흔을 넘긴 지금도 그는 읽고 싶은 책과 쓰고 싶은 글이 넘쳐난다고 한다. 그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며 관장은 기자에게 작은 메모장을 꺼내 보인다.

“저는 늘 볼펜과 수첩을 지니고 다니죠. 즉석에서 그릴 수 있게요. 이것도 어제 식당에서 우연히 본 화병이 눈에 들어와서…”

그는 기자에게 마음이라며 조그만 그림을 건넨다. 작지만 그의 시선이 오롯이 담긴, 서명까지도 들어가 있는 하나의 완벽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목포중학교 시절, 미술부에서 화가 양수아 선생으로부터 예술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고, 그의 가르침 아래 전국미술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또 극작가 차범석 선생으로부터 국어수업을 들으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건 마치 불꽃과도 같아, 타오르며 자신의 에너지가 됩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 선생님들로부터 가르침은 저로 하여금 가고 싶은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됐죠”

이런 의미에서 그는 기념관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그것이 언젠가 그들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해, 기념관의 어린이와 청소년의 교육프로그램을 직접 진행하며 애정을 담아 가르침을 전하려 애쓴다. 

박물관+미술관=겸재정선기념관

겸재 정선은 독창적인 한국 산수기법을 창안해 특유의 미술적 감각과 그 속에 내포된 정신으로 조선의 산천을 그려낸 진경산수화의 거장이다. 겸재정선기념관 전시실 한 편에는 천 원권 지폐 사본이 함께 전시돼 있다. 천 원

권 지폐 속의 수려하지만 한적한 산천이 담겨있는 그림. 이것이 바로 보물 제585호,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이다. 겸재 정선은 ‘경교명승첩’, ‘양천팔경첩’, ‘연강임술첩’ 등과 같은 진경산수의 절정을 보여주는 걸작들을 남겼다. 그는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해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내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안타깝게도 그의 화풍은 단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예술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는 곳, 겸재정선기념관은 겸재의 작품을 수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연구하며 겸재의 정신을 되살리고 있다.

“겸재정선기념관은 겸재의 화혼과 진경산수화 등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새롭게 발전시켜야할 소임을 안고 있습니다”

이 관장은 겸재정선기념관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겸한 곳이라고 설명한다. 

겸재정선기념관이 강서구 가양동에 위치해 있는 이유는 분명 존재한다. 겸재 정선은 65세부터 70세까지(1740~1745) 양천(현재 강서구)현령을 지냈다. 지금으로 따지면 구청장쯤 되는 관직을 지냈던 그 시기는 겸재 정선의 예술인생에서 가장 완숙할 때라 일컬어진다. 현령으로 재직하며 그만의 진경산수화풍은 무르익어 절정에 이르렀다. 즉 겸재정선기념관이 세워진 이곳은 진경산수의 사실(史實) 그 자체인 곳이다.

중국 화풍을 따르는 것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당시에 겸재 정선은 그때의 문화트렌드를 과감히 극복하고 우리나라만의 독자적인 그림을 창조해냈다. 그는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아방가르드’하고 진취적인 유일무이한 작가였던 셈이다.

“세종대왕이 우리나라 글을 만든 분이라면 겸재 정선은 우리나라 그림을 만든 분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진경산수화이죠. 오늘날에 겸재가 살았다면 그는 분명 피카소와도 같은 예술계의 기념비적인 인물이 됐을 거예요. 그는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아 늘 실험하며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는데 막힘이 없었습니다”

◆ 겸재 작품 영인에 힘쓸 것

기념관은 현재 겸재 작품 원본 총 8점을 소장하고 있다.

“남아있는 겸재의 작품은 300여점입니다. 많이 소장하고 있으면 좋겠지만 구입할 수 없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라는 게 현실이죠. 앞으로도 작품구입에 노력하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겸재와 조선시대의 미술에 관한 연구와 교육에 소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는 겸재의 작품을 영인하고 영상으로 만들어 기념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했다.

“요즘 기술이 아주 발달해서 거의 원본과 다름없이 촬영이 가능합니다. 작품뿐만 아니라 연구 자료와 저서들까지도 모두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이를 통해 연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부족한 점들을 보완해나가겠다는 생각이다.

기념관은 미술관과 박물관의 중요한 역할인 연구, 교육, 전시를 목적으로 운영된다. 특히 연구 중심의 기념관으로 확고히 자리매김 시키겠다는 목표로 ‘국제학술대회’와 ‘학술논문현상공모’ 등 겸재 정선 연구의 메카로서 정선의 회화 정신을 되살리고 우리나라 미술의 정체성 수립에 기여하고 있다. 서울강서문화원의 김병희 원장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총 상금 1천만 원을 걸고 매년 학술논문현상공모를개최하고 있으며 겸재학술심포지엄을 열어 지금까지의 연구를 발표하고 토론하며 겸재연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학계의 평을 받고 있다.

이어 그는 국제화 시대에 어떻게 우리 자리를 잡을지 고민하지 말고 겸재에서 그 해답을 얻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겸재는 당시 ‘교과서’로 불리던 중국 화본을 철저히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 다음 그걸 기초로 우리 고유의 그림을 재창조한 것이다.

“무조건 따라가거나 혹은 배척하는 것이 아닌, 우리도 국제화 시대에 발맞춰 세계를 충분

히 마스터 한 다음에 우리의 것을 만들어내야 해요. 바로 겸재의 정신을 벤치마킹하자는 겁니다” 
                                                
◆ “내 가슴 속 타오르는 불꽃은 배움 향한 열정”

관장은 자신의 추동력은 바로 끊임없는 열정과 호기심이라고 말한다.

“내 가슴속에 타오르는 하나의 불꽃이랄까요. 그걸 대하는 희열과 고통이 있고 때로는 무력감도 있지만 미지세계에 관한 동경은 제 인생의 열정입니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 논어에도 나오듯이 배움의 기쁨보다 큰 것은 없다는데 관장은 그것을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전문영역과 대중영역이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되고 싶다는 이석우 관장. 그를 통해 겸재정선기념관은 시민에게 전시뿐만 아니라 문화체험, 교육, 학술 등 다방면에서 정선에 관련된 영역을 확대해 시민의 문화적 삶의 질 향상을 꾀하고 이를 통해 겸재의 삶과 미술에 대한 열정을 알리는 학술, 전시, 자료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 기대된다.

겸재정선기념관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1동 243-1, 02-2659-2206~7)

이석우 관장 1941년 전남 해남 출생, 겸재정선기념관 관장,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 및 중앙박물관장 역임, 국제미술평론가협회 회원, 저서 '대학의 역사', '아우구스티누스', '예술혼을 사르다 간 사람들'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