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죽은 21세기, 돈불에나 태울까?
시가 죽은 21세기, 돈불에나 태울까?
  • 이소리(시인, 본지 논설위원)
  • 승인 2012.01.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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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훑어보기] 동인시집 <슬픈 근대> <선물>, 김대환 첫 시집 <살구꽃>

“잘 씌어지지 않는 / 시를 붙들고 / 잠 못 드는 밤 / 인기척인가 /새벽 창을 가만히 두드리는 / 소리가 있다 / 담배 들고 얼른 나갔더니 / 짐짓 모른 척 물러서는 / 초생달 // 그래, 너도 잘 씌어지지 않는 시가 있었구나 / 마저 닦아야 할 검은 세월이 남아 있었구나”-김영환, ‘초생달’ 모두

춥다. 한 장 달랑 남은 달력을 바라보니 마음마저 더욱 추워지면서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서글픔이 뭉클 올라온다. 문을 열면 곧 닫히고, 문이 닫히면 곧 열린다 했던가. 엊그제 21세기 새로운 10년을 여는 2011년이 시작된다 하더니 벌써 2011년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2012년이 다가온다. 그 참 세월 한번 번개처럼 빠르다.
사람들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괜스레 마음이 착잡해지면서 지난 세월을 되짚곤 한다. 시인들도 마찬가지다. 시인들도 한 해 동안 여러 잡지나 웹진 등에 발표한 시나 올해 펴낸 시집을 다시 꺼내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들기도 하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곤 한다. 더 좋은 시를 써야겠다고, 시집이라도 한 권 더 묶어야겠다고 가슴에 새긴다.

2011년 연말에도 시집은 계속 쏟아진다. 시집이 잘 팔리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시인들은 꾸준히 시집을 펴낸다. 시가 이기나, 물질이 이기나, 서로 웃통 훌러덩 벗고 죽을 때까지 싸울 태세다. 그 힘겨운 싸움에 짱돌을 들고 물질과 맞서는 시집 3권이 눈에 띤다. <슬픈 근대>와 <선물>, <살구꽃>이 그 시집들이다. 앞 두 권은 동인지이고, 나머지 한 권은 개인시집이다.

시는 밤마다 꿈에 나타나는 ‘첫사랑의 귀신’
시인 12명이 모인 ‘거미동인’들이 펴내는 세 번째 시집 <슬픈 근대>(심지). 이 동인 이름 ‘거미’(巨微)는 크고 작다는 것을 뜻하는 공통분모다. 여기서 ‘크다’는 것은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새롭고도 큰 희망이다. ‘작다’는 것은 현재에서 과거로 내려가 흘러간 세월이란 거울에 나를 비추는 자화상이다.

이들은 시가 형벌이라고 말한다. “돈과는 멀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방법 또한 묘연”하지만 “시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첫사랑의 귀신”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는 왜, 시를 쓰고, 쓰려고 하고, 잊지 못하고, 누구는 잊으려 노력하는지” 답을 찾을 수도 없다. 그래도 시를 쓴다. 시는 “닳고 닳아 손에 짝 붙는 화장실 손잡이 같은” 것이므로.

“십대 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이 싫다 / 서른 무렵이었을까 / 아버지는 내게 만고의 역적 놈이라 했다 / 하여간 싫은 걸 어쩌나 / 아버지 풀 매는 것도 거슬렸다 / 멀쩡한 풀 왜 뽑나 / 매사 사사건건 거슬릴 뿐이다 //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 여자들 동그란 가슴과 동그란 엉덩이가 좋았다 / 둥글게 휘도는 강물이 좋았다” -89쪽, 박광배 ‘나는 둥그런 게 좋다’ 몇 토막

거미동인시집 <슬픈 근대>에서 가장 흥이 나게 읽은 시가 시인 박광배가 ‘둥금의 미학’에 대해 쓴 시다. 시인은 어릴 때부터 모가 나고, 거칠고, 날카로운, 그야말로 “만고의 역적 놈” 같은 이 세상이 싫다. 시인은 타고날 때부터 둥글고, 부드럽고 “막천으로 대강 만든 바지가 좋았”다. “풀이 좋고 숲이 좋”은 것도 “바르게 반듯하게 살아가는 / 저 놈들 세상”이 몹시 싫기 때문이다.

“송해 할아버지는 사천 만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한다”
“일요일 정오만 되면 / 국민MC 송해 할아버지는 / 사천 만에게 대놓고 / 거짓말을 한다 // 그것도 30년을 넘게 / 딩동댕! // ‘전국노래자랑’ // 땡! / 땡! / 땡! // 조선팔도 반만 빙빙 돌았으니 / ‘반국노래자랑’”-12쪽, 정춘근, ‘반국 노래자랑’ 모두

철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학동인 ‘모을동비’가 펴낸 여섯 번째 동인지 <선물>(모을동비). 모을동비(毛乙冬非)란 고려시대 강원도 철원군(鐵原郡)을 다른 말로 부르던 이름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을’(毛乙)은 ‘철’(鐵)로 ‘동비’(冬非)는 ‘원’(圓)으로 여겼다는 것. 이 동인 이름이 ‘모을동비’로 지은 것도 철원이 지닌 역사를 제대로 잇겠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이 동인지에는 초대시 4편과 초대글 1편, 동인들이 쓴 시와 수필 90여 편이 남북분단 현장에 놓여있는 철원에 서린 한과 분노,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 월간 <한국수필> 9월호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임민자 회원 등단 기념으로 당선작 ‘장마’ 등 6편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

초대시에는 철원 출신 시인 민영 ‘하늘나리꽃’과 이소리 ‘가마’, 허림 ‘붉은 고요의 중심’, 정춘근 ‘반국 노래자랑’이, 초대글에는 이태기 ‘흔들바위 가는 길’이 분단현실이 지닌 모순을 아프게 꼬집어내고 있다. 시와 수필란에는 이수옥, 임인자, 이선미, 이병희, 황금진, 서미화, 임지현, 박정은, 현미숙, 김백란, 허경숙, 이소진, 허경자, 황기숙, 원숙자가 쓴 글들이 눈빛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문학동인 모을동비가 여섯 번째 펴낸 <선물>은 철원지역에서 살아가는 문학인과 문학인을 꿈꾸는 예비문인들이 한데 모여 가시 박힌 철조망에 지르는 ‘통일의 불꽃’이다. 그렇다고 이들 동인들이 늘 분단과 통일만 노래하는 것은 아니다. 철원 들판에서 자라는 채소에서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줍기도 하고, 철조망 아래 예쁘게 피어난 애기똥풀에서 잡초처럼 버림 받는 삶을 한껏 보듬기도 한다.

늙은이의 얼굴에 장식품 같은 시인 되고 싶지 않다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정년퇴임한 시인 김대환이 첫 시집 <살구꽃>(일광)을 펴냈다. 이 시집은 고향을 떠나 부산에 삶터를 닦았던 시인이 어릴 때 울산 방어진 바닷가를 낀 고향마을을 핑크빛 사랑처럼 뒤덮은 그 살구꽃과 그 바다를 통해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속살 깊은 정을 나눠주고 있다.

“살구꽃이 꽃등처럼 환하게 피어나 / 온 동네를 비춰주던 봄날 / 그 집 누나는 얌전이 / 작은 누나는 금전이 // 아들 없는 그 집 / 나는 단골손님이 되어 / 잘 익어 벌어진 살구 열매는 / 내 차지 되고 // 누나네 아버지 고기 잡으러 / 횃불 뿌리고 바다 나가던 날 / 누나들과 오징어 죽 맛있게 먹던 / 기억이 나네”-33쪽, ‘살구꽃’ 몇 토막

김대환 시인은 어릴 때 살구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던 고향마을에서 함께 살았던 얌전이 누나와 금전이 누나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얌전이 누나는 시집을 갔지만 금전이 누나는 시집가는 날을 잡아놓고 그만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 시인은 그 슬픔과 아픔을 지금도 삭이지 못한다. 해마다 봄이면 그 살구꽃이 그 누나들 웃음처럼 환하게 피어나기 때문이다.

“늙은이의 얼굴에 장식품 같은 시인이라는 이름이 되지 않게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사랑받는 시를 쓰고 싶다”는 김대환 시인. 그는 울산 방어진 바닷가를 낀 한적한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날을 보낸 뒤 부산에서 평생 교편을 잡았다. 지금 강서문학회와 한국농민문학협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