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명동은 노래와 시에 취했다
그날 밤, 명동은 노래와 시에 취했다
  • 임동현 객원기자
  • 승인 2012.02.0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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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현대문학] ‘애정남’ 박인환의 ‘달과 서울 사이’(3)

박인희의 노래로 더 잘 알려진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유작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된 시점에서 벌써부터 유작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센티멘탈리즘’에 사로잡힌 박인환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다. <세월이 가면>은 그의 멋내기와 감격벽,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사랑,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 그것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낸 노래였다. 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세월이 가면>의 탄생이다.

술집에서 탄생된 ‘명동의 샹송’

1956년 봄,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동방살롱 앞 ‘경상도집’. 이 곳에는 그날도 문인, 예술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상고머리 스타일의 미남 박인환과 그의 친구인 작곡가 이진섭, 시인 조병화, 그리고 가수 나애심. 취기가 무르익자 사람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다. 하지만 나애심은 자꾸만 ‘뺐다’. 마땅이 부를 노래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때 박인환이 종이 조각에 이런 글을 쓰기 시작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어...’

옆에 있던 이진섭이 이를 보더니 즉석에서 악보를 만들어 작곡을 하기 시작한다. 순간 술자리는 그들이 종이에 무엇인가를 쓰는 소리만 가득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박인환의 시에 곡을 붙인 이진섭은 그 악보를 나애심에게 건넸고 나애심은 생전 처음 만난 그 애절한 노래를 낭랑한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가 경상도집에 퍼지고 명동에 퍼지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던 사람들도 애잔한 가사와 음악, 그리고 나애심의 목소리에 푹 빠져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흩어지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의 사랑이 사라진다해도...’

한참 후 나애심이 돌아가고 그 빈자리에 테너 임만섭과 ‘명동백작’ 이봉구가 앉았다. 이번엔 임만섭의 목소리로 애잔한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졸지에 술집은 리사이틀장이 됐고 명동을 지나던 사람들은 모두 그 노래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쩌자고 그런 노래를 지었노?”

박인환은 감격했다. “자, 다시 한 번”을 반복하며 그는 대폿잔을 쉴 새없이 기울였다. 술이 떨어지자 그는 술을 더 가져오라고 주인에게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텅 빈 주머니 사정을 잘 아는 주인이 이를 곧이곧대로 들었겠는가?

“술 좀 더 가져와!” “또 외상이야?” “갚으면 되잖아.” “어느 세월에?” “꽃피기 전에 갚으면 되지.” “꽃 피기 전에 죽으면 우짜노?” “명태도 좀 더 가져와!” “나도 돈 없어 몬살겄다” 이렇게 박인환과 티격태격 설전을 벌이던 주인도 끝내 눈가를 훔치며 “어쩌자고 그런 노래를 지었노?” 라고 말하며 술을 내주고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명태 두어 마리를 사오라 시킨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그렇게 그 노래는 ‘명동의 샹송’, ‘명동의 엘레지’가 됐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불려지고 있는 <세월이 가면>의 탄생이다.

<세월이 가면>이 나올 당시 박인환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활기 대신 병기가 돌았고 집에 쌀이 떨어지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회사마저 그만둔 채 날마다 술에 취해 살아왔다. 일설에 의하면 박인환은 이 시를 쓰기 직전 망우리에 있는 첫사랑의 무덤을 찾았고 이를 통해 박인환이 스스로 삶을 정리하려고 할 때 이 시가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낭만, 박인환에겐 생존의 이유였다

시인 이상을 추모한다고 박인환은 3~4일 연속으로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해 이상의 시를 읊조리며 또다시 감격벽을 발휘했다. 그렇게 술을 마셔대던 3월의 어느 아침, 그는 겨울 외투를 입고 명동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것은 멋을 내려고 입은 것이 아니었다. 돈이 없어 세탁소에 맡긴 봄 외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술이 억병이 되어 집에 돌아온 박인환은 숨을 거뒀다. ‘답답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꽃 피기 전에 죽으면 우짜노?”라고 농을 치던 경상도집의 주인은 좀 더 잘해주지 못한 후회 속에 눈물을 흘렸다.

그는 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단축시켜나갔을까? 전쟁이 남긴 상처들을 헤치고 잃어버린 사랑, 잃어버린 추억들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했던 마음이 너무 지나쳤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바로 그것이 박인환에게는 생존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박인환의 시가 서양의 시를 모방하고, 전쟁에 상처받은 이들을 생각하지 않은 채 자기 기분에만 취해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감정에 매몰된, 추상적인 단어로 도배된 현실과 동떨어진 시. 그런데 우리는 지금 박인환을 따라가면서 그가 왜 그 혼란과 빈곤의 시대에 그런 시를 썼는가를 생각해보고 있다. 그리고 그 혼란과 빈곤을 어떻게든 뛰어넘어보려는, 하지만 결국 약해지고 마는 한 인간의 슬픔을 보고 있다.

죽음마저 센티멘털한 모습을 보여준 박인환. 하지만 그것만으로 박인환을 말할 수는 없다. 다음 편에서 그의 또 다른 면모를 소개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