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천민정]"시대를 읽는 현장위주의 작가가 되야"
[인터뷰/천민정]"시대를 읽는 현장위주의 작가가 되야"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서문원 기자
  • 승인 2012.02.03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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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색채가 가미된 ‘폴리팝’ ...오는 17일까지 성곡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어

 

작가 천민정 교수의 ‘폴리팝’(Polipop)이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팝아트 전시회는 많았지만 정치이슈를 소재로 한 작품은 국내에서 처음 소개된다. ‘Political Popart’의 약자인 폴리팝은 천교수가 처음 시도하는 분야다. 그 속에는 한국·미국인이라면 잘 아는 정치·사회이슈가 담겨있다. 오바마방, 독도방, 다이아몬드방으로 구성된 3개의 방에 54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천 교수의 작품 배경에는 전 세계인들이 지난 4년간 경제위기를 겪은 뒤 깨달은 ‘기득권을 향한 경고와 메시지’가 담겨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1층에 전시된 오바마 조형물과 스크린 영상이다. 겉은 흑인이지만 실은 백인사회에 안주하며, 그들과 똑같은 권력을 누리는 버락 오바마를 풍자하고 있다. 지난 2007년 전 세계누리꾼들의 주목을 받아 온 다큐동영상 ‘시대정신’(Zeitgeist)과 2008년 ‘오바마 꼼수’(Obama Deception) 스토리와 사뭇 일치한다.

천 교수는 지난 해 오사마 빈 라덴이 체포되던 날, “‘오바마와 오사마’를 합성사진으로 제작하고 있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하면서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차이에 대해 “다른 세계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상호간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연계해 이번 전시회를 열었다“고 전시회 배경을 밝혔다.

한편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미대교수로 활동중인 천 교수는 국내에서는 이화여대 미대초청교수로 활동했으며, 작품활동은 여러나라 작가들과 함께 프로젝트전시회에 참여해왔다. 아울러 그녀는 작가활동과 관련해 “금융위기와 양극화로 시대가 변하고 있다” 라고 밝히며 “다른 작가들처럼 작업실에서 앉아 작품구상에 몰입하기 보다 현장에서 여러 작가들과 참여ㆍ협업을 통해 시대상을 반영해왔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성곡미술관 전시장에서 천민정 교수와 만나 그녀의 작품세계와 배경에 대해 들어봤다.

 

▲ 천민정 교수가 종이인형옷으로 구성한 자신의 작품앞에서 사진촬영을 했다. 겉은 동심세계를 만난듯한 모습이지만 알고보면 이 시대가 걸어온 산업화의 한 단면이다.

-정치이슈·자본주의사회현상, 특히 대중문화비판. 사회현상에 침착한 작품들이 많고, 이번 전시회도 ‘폴리팝’이라는 주제로 열었는데 이런 소재를 투영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2004년도에 북한 금강산을 방문하게 됐어요. 그때 박사과정을 밟던 중이었는데요. 비주얼아트가 아닌 형식주의를 고민하던 때였거든요. 나름 공부하면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게됐는데요. 그 계기가 금강산 여행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계기가 금강산 다녀오면서 남북문제도 관심을 갖게됐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강대국들의 역학구도를 고민했다는 거죠?

금강산을 방문할 당시 제 전공이 ‘후기식민주의’(Postcolonialism)였어요. 에드워드 사이드교수가 후기 식민주의를 대표하는 분인데 ‘오리엔탈리즘’을 저술하셨어요. 저는 이분과 연관된 여러 다양한 학문을 공부해왔구요. 최근에는 ‘테크 오리엔탈리즘’(Tech Orientalism) 등을 연구하면서 판문점 DMZ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2004년 미국학생들을 처음으로 한국에 데려와 후기식민주의를 주제로 공동연구작업을 했는데요. 가령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 사이에 잃어버린 한국의 전통문화, 그리고 물질만능주의로 뒤섞인 현대문화가 연구주제였죠. 서구식 산업화로 파괴된 한국은 현재 서구문명으로 탈바꿈된 게 아니라 굉장히 식민주의적인 모습으로 변이됐기 때문에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겁니다.

▲ 버락오바마와 천민정 교수 자신을 합성시켜 만든 이 작품은 2차세계대전당시 미국여성들의 군수공장참여를 권장하는 홍보포스터를 팝아트로 구성했다.

-한국도 최근 몇년동안 팝아트, 미디어아트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팝아트를 더 많이 활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번에 ‘폴리팝’을 주제로 한 팝아트전시회에서 ‘디지탈페인팅’ 기법을 사용한 건 ‘프로파간다적인 포스터’(정치선동포스터) 배너와 같이 묘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전에 작품구상을 하면서 광고계에서 사용하는 비주얼언어를 염두했구요. 주로 원색적인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그동안 미디어와 여론에 소개된 사회정치현상과 정치적 메시지를 그대로 투영했어요. 가령 앤디 워홀이 미국화폐인 달러의 심볼을 자신의 작품에 많이 사용했는데요. 그 이미지가 결과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상징인데, 앤디 워홀은 그 돈(자본주의)의 가치가 매우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이라고 표현했어요. 이를테면 그의 작품들은 비판적이기 보다 사회현상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역할을 했던거죠. 저 역시 팝아트장르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쉽다는 점과 대중매체를 다룰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하이아트’(고급문화)가 아닌 ‘뉴아트’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팝아트 양식을 의식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덧붙여 작품주제가 정치와 선동이 합쳐지다 보니 선거포스터와 이에 사용되는 선동적 구호를 표현한 게 더 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회화와 뉴미디어를 전공했는데요. 이 두 전공분야를 순차적으로 합성시켜가면서 기본바탕은 회화, 거기에 뉴미디어를 가미해 표현했습니다.

미대통령 버락 오바마 조형물이 전시된 성곡미술관 1층 오바마의 방.

-앞서 천민정 작가가 전시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오바마 대통령을 모델로 한 전시관을 함께 봤는데요. 작품들 중 미국의 전시체제 홍보포스터. 당시 여성들의 노동력을 부추겼던 미행정부의 정책적인 홍보배너가 어떻게 오바마를 주제로 한 작품전과 연계됐는지요?

그게 디지털페인팅기법으로 사용된 첫 작품인데요. 3년 전 오바마 대통령후보의 유명한 대통령선거구호인 ‘Yes We Can’을 찾아보니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군수공장 여직공들을 모델로 제작된 홍보포스터슬로건(We can do it)과 너무 유사하더군요. 이것을 재미있게 구성한 겁니다. 이미 오바마 얼굴을 사용한 ‘희망’(HOPE)이라는 제목의 포스터도 유명 컨템퍼러리 디자이너 세퍼드 페리(Shepard Fairey)의 작품으로 나와있어요. 과거 중국의 마오쩌둥도 중국이 친근한 이미지로 바꿔서 대중홍보를 했잖습니까?

오바마도 대선후보시절 중국의 마오쩌둥 홍보선전책과 유사한 선거활동을 했었죠. 그럼에도 미국 역사상 첫 흑인대통령이기 때문에 그의 정치지도력과 자격을 놓고 함부로 논하진 않습니다. 현지에서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라서요. 예를 들면 흑인과 백인들이 사는 동네가 달라요. 계층간의 격차와 인종차별이 존재하는거죠. 이런 인식이 배경으로 존재하다보니 어쩌면 오바마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극과 극을 오간답니다. 그런 연유일까요?

최근들어 쏟아지는 오바마에 관한 비판 중에는 ‘흑인이면서 동시에 상류층’이라는 인식도 있습니다. 색깔만 다를 뿐 백인이라는거죠. 더 심한건 ‘오바마는 백인들이 싸놓은 똥이나 치우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노예’라는 말도 있어요. 알고보면 전임 대통령 조지 부시가 재임동안 저지른 적대정책과 전쟁 때문에 늘어난 막대한 부채를 안은 오바마 대통령의 운명을 말하려던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고 보니 앞서 전시관에서 본 오바마 조형물이 백인처럼 보이더군요.

예전에 제가 딸에게 기념품으로 오바마 캐릭터인형(Do it yourself)을 사다줬는데 칠을 하지 않은채 보니까 백인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이슈다’ 싶어 작품구상까지 하게된거죠. 흥미로운 건 오바마 대통령이 사망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살아있는 정치인물을 모델로 기념품으로 판매한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는 겁니다. 마치 구소련의 공산주의가 연상되기도 하고, 그걸 확대해서 만든 겁니다. 그리고 그 오바마 조형물이 가리키는 손위치는 원래 왼쪽에 위치했는데 ‘블랙파워’라는 뜻을 가미해 오른쪽으로 바꿨습니다.

-특별히 오바마에 관심을 갖게된 이유가 있나요?

3년전 미국대선에 출마한 버락 오바마 홍보 포스터는 유명 스트리트아티스트인 세퍼트 페리가 만든 작품입니다. 이것이 대선 캠페인기간동안 유투브와 거리 곳곳에 걸려있던 ‘Change’라는 구호가 들어간 상징적인 이슈가 된 겁니다. 세퍼드는 그 후에도 그의 예술활동과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정치, 사회 다방면을 통해 확산된 거예요.

미국 현지는 과거와 달리 정치,사회,양극화 등 여러 갈등이 표출되면서 관련 이슈와 분위기가 조성된 상황입니다. ‘폴리팝’은 제가 구상한 아이템이지만 저는 단지 참여할 뿐이지, 앞서 말한 세퍼드처럼 선구자는 아니예요. 이 시대와 문화패러다임이 전환될 때 마다 그걸 정리해주는 사람들 중 하나인거죠. 현재 작가들은 마냥 작업실에 앉아 작가주의적 작품을 내놓지 않고,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시민으로서 현장에서 활동하는 추세라서요.

이 작품은 영국 윌리엄황태자의 결혼식을 토대로 권위주의와 상업성이 가미된 세계를 있는 그대로 투영했다.

-천 작가는 여성이면서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보면 엘리트잖아요? 가령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중이기도 하고 성공한 작가로서 부러움의 대상이 될수도 있는데요.

그건 오해예요. 하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정말 모르겠네요. 살기가 얼마나 힘들고 복잡한지.. 에드워드 사이드교수의 제자인 츠비박 교수가 이 이슈를 똑같이 다뤘는데요. 그분의 시민권이 인도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분이 인도에 가면 기득권이나 다름없는 백인으로 봅니다. 하지만 영국에서 캐나다로 왕래할 때마다 공항검사대에서 자주 걸리나봐요. 국적 때문이죠. 결국 상황에 따라서 월등하게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제 남편은 유대계 미국인인 미국시민권자인데 저는 한국시민권을 갖고 있어서 매 번 미국으로 들어갈 때 마다 공항에서 지문테스트도 받고 제 여행가방도 따로 조사받아요. 이런 점들이 제가 겪는 현실이죠. 또 한 가지는 아버지가 제 아이들을 한국에서 자라게 해주려고 애를 많이 써주셨는데요. 지난 몇 년간 아이들 거주등록조차 어려운거예요. 더구나 아이들이 서울시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받았던 인종차별을 보면서 그게 과연 엘리트의 삶인지 저로서는 좀 그러네요. 다행인건 제 아이들이 한국말이 늘면서 많이 익숙해져서 생활하는데 조금씩 나아진 게 그나마 받은 위로였어요. 어쨌든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살기에는 여기가 쉽지 않은 곳인 것 같습니다.

 

▲ 위 사진은 독도의 모습을 CG로 표현한 팝아트작품이다. (2층 독도의 방에서)


-한국국적을 포기않고 자기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힘겨웠군요. 많은 경험을 겪으셨군요. 그러고 보니 이번 전시회에서 ‘독도의 방’을 따로 만들고 한국만이 가진 특수상황을 이슈로 많이 다루셨더군요.

현장 경험이 아무래도 중요하지요. 매년 여름마다 유학생처럼 자주 한국을 찾았어요. 그때 TV방송에서 2008년 촛불집회를 보면서 광우병, 한미FTA 등 여러 반응들을 담은 뉴스를 봤어요. 그랬던 이슈가 반미로 넘어가자 독도관련 뉴스가 나오고 이슈가 집중되더군요. 반미가 반일로 변한거예요. 시청자 입장에서 보면 내러티브는 결과적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은 거잖아요. 게다가 여름휴가기간이 끝나고 미국으로 갔더니 현지 미디어에서 ‘전쟁이슈’까지 터졌어요. 저보고 미국 친구, 동료들이 ‘한국에서 전쟁이 날 것 같으니까. 미국으로 도망왔구나?’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한국에서 출국 전까지 너무도 평온했는데 미국으로 가니까, 한국에 사는 현지인들도 모르는 이야기가 화제가 된 거예요. 이런 연유로 독도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독도와 관련해 지정학적인 위치, 어업협정권, 배타적경제수역 등을 찾아보기 시작한거죠.

 

▲ 성곡미술관 2층 ‘독도의 방’에 마련된 위 작품은 인왕산과 역대 대통령의 모습이 담겨있다.

-박사논문을 보니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 무속신앙’을 보면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나라에 없는 한국적인 스토리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그 중 하나가 인왕산이구요. 그곳은 무속신앙과 여러 종교가 모여 있어요. 물론 인왕산은 ‘무속행위 금지’로 소개 되어 있지만 굳이 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말았으면 하네요.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신비주의에 관심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정체성을 알리면서 전통문화로 소개해보는 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예전에 김금화 선생님 초대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굿을 하는 장면을 봤는데요. 미국과 호주, 영국 등지에서는 샤머니즘에 대해 주요문화로 소개했는데요. 그런 인연으로 김금화 선생님이 뉴욕 링컨센터에 가서 공연도 하고, 호주에서는 관객들이 침을 흘리고 볼 정도로 높은 관심을 받았어요.

백남준 선생님도 한국적인 샤머니즘을 작품전에서 자주 활용했어요. 그런데 한국토속신앙과 문화에 대해 학구적으로 풀어낸 게 많지 않아요. 인사동 쌈지길에서 백 선생 추모 굿을 위해 아버님이 김금화 선생을 초대하셨어요. 그때 그걸 보면서 미디어와 무속신앙을 연계해서 연구 발표한 거예요.

-오늘날 천민정 작가가 있기까지 아버지(전 쌈지길 대표 천호선)와 얼마전 서울시립미술관장에 선임된 어머니 김홍희 관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것 같은데요?

제가 미술 분야에서 여태까지 큰 사고 없이 성장한건 부모님의 영향이 크죠. 가족이 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다보니 늘 조언해주고 항상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계셔주셨죠. 어릴 적 부터 아티스트가 되겠다고 초지일관 했어요. 가족 주변에서 전시회도 열고 만나는 사람들도 같은 예술가들이다 보니 그런 분위기가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플럭서스’(Fluxus, 1960년대부터 서유럽에서 나타난 전위예술운동)작가들을 지금도 만나고 있구요. 가장 중요한 도움이 된건 어머니의 영향이지 싶습니다. 항상 공부하고, 옆에서 저도 같이 미술공부를 하고 그랬었죠. 아버지는 남녀차별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개방적으로 키워주셨고, 미술공부와 작가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어요. 하하 그것때문에 엘리트라고 하면 할 말이 하하..

▲ 위 작품은 ‘독도의 방’에 따로 마련된 북한관련 작품들중 하나다. 일본만화영화 포켓몬스터를 차용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포켓맨으로 표현했다.

-천민정 교수가 바라보는 뉴욕과 한국의 미술계에는 어떤 간극이 있을까요?

뉴욕은 좀 상업적이고, 전 세계를 짚어가며 활동합니다. 예전과 같은 무대를 보기 힘듭니다. 현대 작가들은 50년대부터 ‘뉴욕카페’같은 유형의 퍼포먼스보다는 프로젝트위주로 활동합니다. 대부분의 뉴욕작가들은 브룩클린에 살고, 뉴욕은 활동장소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경우는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 같고, 저는 한국 문화와 미술계에 참여하는 정도로 만족하구요. 반대로 미국은 제가 개척하는 방향으로 활동했답니다. 그중에서 아프리칸-아메리칸 예술계와 자주 교류하고 있습니다. 제3세계국가 예술영역이 저와 교류가 많았어요.

2008년에도 볼티모어에서 제 작품이 전시됐을 당시는 ‘뉴욕 필하모닉심포니’가 북한에 방문했던 때여서 우연히 제 작품과 전시회가 많이 보도됐어요. 물론 국내미술 쪽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평론을 받고 인정받는 게 중요하지 매스미디어를 통해 알려져서 뭐하냐?’하는 핀잔도 들려요. 그럼에도 저는 제 길에 대해 선택을 강요받지도 않았고, 자유롭게 작가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하나 더 묻자면 한국의 미술시장과 미국의 경우는 어떤 차이가 날까요?

한국은 “국내에서 출세해야지 외국에서 알려진다”라고 하고, 미국은 ‘장르가 명확한 아티스트라면 그곳에 집중해야 돼’라고 말하곤 합니다. 또 한국인이라고 한국적인 모습을 다음 작품을 보여줘도 잠시 동안 시선이 집중될 뿐 큰 의미는 없습니다. 미술계의 동향만 따지면 상업적인 예술가가 되니까. 적어도 자기 주관을 갖고 작품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위해 활동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알고 보면 한국도, 미국 미술계도 작고 오밀조밀한 면이 있습니다. 신중하게 접근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