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일본속보]일본탄광에 끌려갔던 김경봉옹의 호소
[이수경의 일본속보]일본탄광에 끌려갔던 김경봉옹의 호소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 승인 2012.02.04 15: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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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다시 고통받는 역사가 없어야기에 김 옹이 겪은 일들 바로 알려 젊은 세대에 교훈줘야

필자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연구전념기간을 끝내고 돌아온 2011년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쿄 김포간을 왕복했다. 대지진 등으로 지친 학생들을 인솔한 사적답사나 각 지역의평화기념관시설견학, 공동연구관계조정, 기업초청 등의 격무를 보고나면 학교일이 쌓인 터라 정신없이 시간에 쫓기며 도쿄로 와야만 했다.

필자가 만난 최근의 김경봉 옹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꼭만나 뵙고 인사를 드려야하는 분이 계셨기에 개인적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 자신을 자책하며 일과에 쫓겨야만했다. 그런 필자의 마음이 통해서일까? 12월말에 은사이신 교토평화박물관 안자이이쿠로교수가 한국의평화시설이 설정한 2011년도 평화인권상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수상식에 참석한 뒤, 개인시간을 확보하여 김경봉 (金景鳳,91세)옹을 찾아뵐수 있었다.

김경봉 옹은 1922년에 경북영일군(현재는포항시) 기계면 인비동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다가 18세의 나이인 1941년 7월에 영문도 모르는 채 들이닥친 일본형사에 의해 트럭에실려 끌려갔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 내리자같은 야마구치현의 해저탄광촌인우베(宇部)쵸세이(長生) 탄광으로 배치되었다(야마구치현에대해서는서울문화투데이에 명성황후는능욕당했다시리즈기사에서자세히서술).

일제강점기 시대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비교적 한적한 농촌에서 살았기에 설마당신이 일본으로 무턱대고 끌려오는 입장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김경봉옹이 무작정 끌려간 야마구치쵸세이탄광에서의 생활은 지옥의 시작이었고, 소자본의 일본인이 전쟁군수산업정책에 편승하여 식민지노동자를 착취하던 쵸세이탄광은 우베에서도 열악한 해저시설이었다. 참지 못해서 몇 번이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본보기로 맞다가 죽어가는 것을 봐야만 하는 불안과 고통의 나날이었다.

물론 김경봉옹도 도주를 시도했다가 전신멍투성이 상태가된 적이 있다. 육지도 아닌 해저탄광이기에 바다 속의 좁은 갱도를 내려가서 석탄을 캐오는 작업을 하지만, 천정이 언제 무너질지도모른다는 어둠과 공포의 불안이 엄습하는 매일이었고, 환기도 제대로 안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콜레라 등의 전염병으로 쓰러지는 사람들이 들것으로 실려가거나 죽어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김경봉옹도 전염병에 걸려서 화장터로 보내려고 영구차를 기다리는데 짚더미속에서 의식을 회복한 김경봉옹을 아는 형이 살려냈다고 한다. 그 때 영구차가 늦게왔기에 살았다고하니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치료를 받고 돌아온 탄광촌의 고통이 힘들어서 3명이 탈주를 시도했다가 같은 동포의 보초한테 잡혀서 두사람은 맞아서 죽었고, 본인은 18살의 어린나이라서 실컷 맞기만했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열악한 탄광시설은 수압을 견디지를 못하고 1942년 2월 3일에 갱도가 무너진다. 결과적으로 한국인을 포함한 183명이 그대로 바다속에 생매장이되어 버리고, 그들을 구하기는커녕 사태수습이란 게 갱도의 입구를 소나무 판자로 막아버린 것이었다. 교대를 마치고 숙사로 돌아온 직 후에 터진 사고에 대한 불안함과 비인간적인 처사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다시 동료 2명과 탈주를 시도한 김경봉옹은밤낮으로 물 한모금 못 마신 채 도망을 치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른 탄광촌에서 일을 하게된다.

후쿠오카의 야와타철공소 등을 옮겨다니며 막노동을 하게된 김경봉옹이 일본에서 무엇보다 슬펐던 것은 같은 동포의 조장이나 감독이 더욱 더 심하게 동포를 착취했고, 그래서 그들에게 걸리는게 가장 겁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국땅에서 그토록 동포를학대해야 했는지, 참으로 악랄했던 그들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하니 지배받은 민족의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폐허가 된 해저탄광 입구

한일병탄전후, 나라를 되찾겠다고 독립운동에 모든 인생을 투여했던 항일의병군들을 밀고한 것도 대부분 이같은 동포였고, 민족을 팔아넘긴 것도 조선인 고위 지배계급이었던 것을, 그래서 을사오적이나 친일파란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역사적 수치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탄광촌이나 공사장에서 동포들이 그토록 많이 끌려가고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한 배경에는 자신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던 사람들에 대한 재고찰도 필요할 것이다.

김경봉 옹은 그뒤, 효고켄 등의 일본중부지방을 전전하다가 인간적인 일본인을 만나서그 집에서 세탁소 일도 하게된다. 그러던 어느날 도쿄 요코하마 근처에서는 연합군의 공습이 심해지고, 김경봉옹에게 아시도메(수 일내로 군대소집영장이 나올테니 멀리가지말라는 명령)전보가 와서 군대에 가려고 오사카에 도착하니 불바다가되어 교통이 마비되어 있었다. 수많은 일본여성들이 통곡을 하는 반면, 조선인 동포들이 태극기를 들고만세를 외치는 것을 보고 일본이 패전했음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인간 대접받으며 같이 살자고 권유하던 일본인 세탁소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김경봉옹은 한국으로 귀국하지만 강제노동의 후유증으로 몸을 쓸 수없어서 당분간 움직이질 못했고, 겨우 회복이 되었을 때는 1950년의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다시 전쟁터로 가서 수많은 아픔과 처참한 상황을 보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몇 번이고 죽으려고 했으나 그것도쉽지 않았기에, 되려 이렇게된 이상 끝까지 살아서 전쟁 때 뭐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널리 알려야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의 학교에서 강연중인 김경봉 옹

김경봉옹은 응모하여 돈을 벌러간 노동자가 아니라 강제연행된 전시노동자였기에 임금은 받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전시피해보상의 절차조차 제대로 못밟아서 가난의 대물림과 수술・치료의 연속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가슴에 못박힌 우리근대사의 한을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잊지말고 불행을 초래하는 일을 결코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김경봉옹은 지금도 그런 신념으로 어디서나 증언을 원하면 모든 힘을 쥐어짜서라도 달려간다. 그런 불행했던 삶이 우리들의 어두운 역사였음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양심적인 일본인들은 과거의 잘못을 알리고 기억하려고 하는데한국은 되려 화려한 표면이 앞서서 어두운 불행의 역사를 알려고 하지 않는게 가슴이 더 아프다고 되뇌이는 김경봉옹의 남은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불행했던 우리의 과거사를 기억하는 생존자가 격감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학교와 같은 교육의 현장, 혹은 많은 시민단체들이 협력하여 자칫 불행한 역사를 용인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참한 생활을 당하고 희생을 당하는지를 들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마련하여 미래가 결코 불행한 역사가 되지 않도록 기록하고, 기억하여 상기하는 계기가 되도록 김경봉옹과의 시간을 만들어준다면 좋겠다. 

오른쪽이 김경봉 옹, 그 왼쪽이 설도술 옹(나머지 생존자)

필자가 쵸세이탄광 조사를 위해 현지에 갔다가 김경봉옹을 만난 뒤 제법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그분을 필자의학교에 모셔서 강연을 듣기도 했고, 관련 연구논문이나 책도 발표하여 조금은 그 분의 아픔을 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김경봉옹 같은 어두운 역사의 희생자에 대해 관심이 적은 것 같아서 아쉽다.

김경봉옹은 그동안 필자에게 이쁘게 말린 낙엽과 그림을 그린 편지와 더불어 숱한 당시의 자료 등을 보내주셨다. 그런 성의를 필자가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기억이 된다. 그래서 교단에 서 있는 지인들에게 그분의 강연을 통해 자라는 학생들에게 자칫 역사가 잘못 엉켜지면 얼마나 불행한 삶이 되는지를 가르치고, 평화와인권성장을 리더하는 차세대육성을 위해 그 분의 체험을 들어주기를 바라는 의뢰를 하였다. 몇 학교나 단체에서는 이미 실행을 해주었고, 91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그 뜻과 경험을 강연하셨다고 한다.

필자도 꽃피는 신학기가 돌아오고 김경봉옹이 건강히 계셔주신다면 다시 한번 도쿄로 모셔서 일본의 내일을 짊어질 우리 학생들에게 평화의 간절한 바램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겠다고 약속드렸다. 하지만 그 분에겐도쿄행도 의미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국내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필자에게 주기적으로 보내주시는 당시의 기억을 술회한 그림과 글들

의식주를 해결하면 예의를 안다는 말이있다. 우리사회는 글로벌사회를 이끄는 IT 및 첨단과학기술과  한류문화의 발상지로 세계각지에서 주목을 받고있다. 그러나 정작 외교적 걸림돌이 되고있는 근대사문제를 제대로청산하지않고 화려한외관 물질지상주의 사회만 추구한다면, 소외받고 희생이 된 수 많은 사람들의 치유되지 않은 눈물과 더불어 미래는 더 무거운 과제를  짊어질 수가 있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한일간의 역사문제, 그렇기에 우리는 김경봉옹의 뜨거운 호소가 내일을 염려하며 경종을 울리는 시대의 디딤돌임을 잊지말고, 이 분이 우리사회에 남기려는 체험담과 바램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마련하도록 협력과 관심을 가져주길 부탁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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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ika 2012-05-11 15:42:37
Was ttoally stuck until I read this, now back up and run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