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도시 한성백제, 하수도 시설까지 있었다!
계획도시 한성백제, 하수도 시설까지 있었다!
  • 이지연 기자
  • 승인 2012.02.21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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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한성백제박물관 김기섭 전시기획과장]

◆오는 4월 30일 개관, 고대토목기술 결정체 ‘풍납토성 성벽’도 선보여

백제 때 서울의 모습은 어땠을까? 어떤 역사적 맥락을 통해 현재의 우리가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백제는 자기들의 첫 수도로 서울을 선택했다. 한성백제기의 유물전시와 풍납토성의 복원을 통해 수도 서울의 역사를 재조명한다는 ‘한성백제박물관’이 오는 4월 30일에 개관한다.

박물관은 백제의 도읍을 정교하게 복원한 모형과 영상을 선보이고, ‘고대토목기술의 결정체’라 평가받는 풍납토성의 성벽단면을 고스란히 옮겨와 로비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단순히 유물감상의 기회만을 제공하는 박물관이 아닌, 다양한 체험전시를 선보일 한성백제박물관의 이모저모를 미리 만나봤다. 다음은 전시기획을 맡고 있는 김기섭 전시기획과장과의 일문일답.

▲ 한성백제박물관 김기섭 전시기획과장

-오는 4월에 한성백제박물관이 개관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개관 막바지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유물을 진열장에 넣고 배치해야 하는데, 다른 곳에서 빌려오는 유물들이 현재 오고 있는 중이며, 유물을 담을 진열장, 그릇, 모형 등은 이미 다 제작을 마친 상태입니다. 전시에 시각적 재미를 더하고자, 디자인과 색상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다양한 그래픽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달 정도만 더 준비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지난해 박물관은 홍보를 위해 ‘한성백제 아카데미’ ‘온조역사문화체험교실’과 같은 프로그램을 실시한 걸로 아는데요. 수강생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서울이 백제의 500년 수도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놀랐어요. 저희가 집계하기에, 서울이 백제의 수도였음을 아는 사람이 10%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한성’이라는 이름을 백제때부터 사용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많았어요. 수강생들 대부분이 몰랐던 사실을 새로 알게 되니까 만족도는 높은 편이었습니다. 사실, 서울의 선사·고대역사는 불모지나 다름없습니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경제중심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만 신경썼지, 문화마인드를 높이는데는 관심도가 낮았으니까요. 이런 프로그램을 자주 마련해 우리의 선사·고대역사를 많이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순히 백제박물관이라고 명명하지 않고, 앞에 ‘한성’이란 글자를 붙여, 박물관의 성격을 특화시킨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성’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조선시대 수도를 관할했던 관청인 한성부를 먼저 떠올립니다. 사실 ‘한성’이란 단어를 가장 먼저 쓴 건 백제입니다. 그러다가 천년쯤 지난 뒤에 백제 때의 전통을 이어 조선왕조가 수도를 한성이라고 부르지요.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의 개국자들은 이 지역이 백제의 한성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을 거라고 학자들은 보고 있어요. 우리가 보통 조선시대의 한성만을 떠올리는 이유는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에요. 백제 때, 서울을 한성이라고 불렀던 시기가 약 400념이 넘습니다. 정확히 백제가 건국된 해(BC18년)부터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AD475)까지 493년인데, 조선왕조 500년과 거의 맞먹는 기간입니다. 웅진(공주)은 63년동안 백제의 도읍이었고, 사비(부여)는 122년동안 도읍이었는데, 둘을 합쳐 봐야 185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렇듯 한성백제가 백제의 전체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백제’하면, 웅진과 사비만 떠올립니다. 국사교과서에는 분명히 한성이라는 명칭이 나옵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백제 때의 한성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어요.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긴 대다수 사람들이 백제도읍지를 떠올릴 때, 공주와 부여부터 떠올리지요.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점이 있습니까?

한성도읍시기가 백제의 전성기였기 때문입니다. 가장 국력이 강했던 시기에요. 4세기 근초고왕이 통치하던 시절이 최전성기였는데, 이 때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까지 합니다. 군사적 자신감이 중국에까지 뻗쳤고,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정확히 파악해 중국대륙의 전통성을 이어받은 국가인 동진과 상당한 수준의 외교활동을 이 때 당시에 펼쳤습니다. 이 시기를 등한시하고 어떻게 백제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웅진·사비기를 중심으로 백제사를 이해하다 보니, 백제사의 진면목을 볼 수가 없었던 겁니다. 웅진·사비기는 백제 전성기 이후에요. 웅진기는 고구려전성기, 사비기는 신라전성기입니다. 백제전성기를 빼고, 백제의 국력이 약간 꺾인 웅진·사비기 위주로 백제를 이해하다보니, 왜곡된 백제의 이미지가 형성된 겁니다. 백제는 왠지 모르게 연약하고, 약한 나라라는 인식이 있어요. 이렇게 왜곡된 백제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역사의 전체 흐름을 바르게 잡아보기 위해 ‘한성백제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이게 됐습니다.

▲한성백제박물관 전경.

-한성백제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유물이 있다면 설명해주세요.

한성백제 왕성에서 당시 하수관으로 사용됐던 ‘토관’이라는 유물이 있습니다. 이 유물은 백제왕성에서만 발견됐어요. 불과 100년 전의 조선도성안에도 하수관이 없는 곳이 많았다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발견입니다. 하수관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 재력, 권력이 동원됩니다. 이를 통해 당시 백제왕이 상당한 권력을 가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한성이 계획도시였다는 사실 또한 추론할 수 있습니다. 겉보기에 초라해 보이는 이 작은 유물에 이렇게 많은 의미가 포함돼있습니다. 이런 것들의 가치를 발견하고 설명하는게 저희 박물관이 할 일이겠지요.

-박물관의 로비와 전시실에서 백제초기의 도성모습을 복원 전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는데요. 이 풍납토성의 복원전시가 지닌 의미는 무엇입니까?

풍납토성은 왕이 살았던 ‘한성도읍지의 핵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의 가치를 몰라요. ‘흙성이 뭐가 대단해? 돌성도 아닌데’라고 시시하게 여깁니다. 높이 4미터밖에 안되는 왜소하고 볼품없는 성으로 취급해요. 그러나 풍납토성은 대단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성입니다. 한반도에 남아있는 고대 토성중에 풍납토성만한 규모가 없어요. 흙으로 제작된 풍납토성은 1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거치는 사이에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습니다. 홍수로 인해 지대가 높아지면서, 성벽은 낮아지고 사람들이 밟는 지표면은 높아졌습니다. 실제 풍납토성의 성벽은 땅속에 4m정도가 더 남아있어요. 성벽의 남아있는 모습을 생선회 뜨듯 옮겨와, 땅속에 숨어있는 부분도 볼 수 있게 전시할 예정입니다. 언제든지 저희 박물관에 오시면 백제인들이 쌓은 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체험할 수 있어요.구구절절 교과서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닌,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겁니다. 일종의 ‘살아있는 역사체험’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