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종상 화백]“나를 오늘의 화가로 키워준 고향 예산”
[인터뷰/이종상 화백]“나를 오늘의 화가로 키워준 고향 예산”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이지연 기자
  • 승인 2012.02.25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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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창조성 키울 체험프로그램 등 운영하고 싶어”

 

"자신을 오늘날과 같은 화가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키워준 곳이 바로 고향인 예산”이라고 줄곧 말하는 일랑 선생. 그 때문이었을까. 일랑 선생은 “그 어느 곳에서의 제안보다도 기쁘고 반가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현재의 진행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일랑 선생 마음은 지금 그가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예산군 발연리 120 번지에 가 있다. 조그만 방의 시렁 아래 누워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를 듣곤 했었던 그 어린 날로 말이다. 그는 우리나라 예술가에게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예술원의 회원이면서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 손꼽히는 서울대에서 오랫동안 후학을 가르쳐왔다. 화가로서, 학자로서 최고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그는 끝없는 창조적 열정을 바탕으로 한 도전을 계속했다.

그는 일찍이 국전 최연소 초특선 작가로 화려한 등단을 하고 국전에서 대상을 여러 차례 수상해 예술가로서의 탄탄대로를 보장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눈을 돌리지 않는 외진 분야를 개척했다. 의사 윤봉길을 배출한 의기의 고장인 예산의 숨결이 그를 이끌었을까? 그는 험한 길도 마다 않고 고구려 벽화연구와 독도문화운동을 30년이 넘게 꿋꿋이 지속해온 것이다.

대학 강단에서 이론과 화업의 겸장을 강조해온 그의 교육철학의 근원은 고향의 뛰어난 인물인 추사의 심오한 학문과 예술세계로부터 영향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나 함부로 그릴 수 없는 화폐인물의 초상을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5천원 권과 5만원 권 영정을 제작한 유일한 생존작가다. 그는 조금 느릿한 충청도 말씨로 타인에게는 늘 겸손함과 너그러움을 보이지만, 작업에 있어서는 조금도 준엄한 태도를 늦추지 않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예술인이다.

본지<서울문화투데이>는 한국현대미술의 거장, 일랑 이종상 화백을 만나 고향 예산에서 진행되고 있는 생가복원과 기념관 건립과 관련해 소회를 들어봤다.

 

-생가복원 및 기념관 건립에 대한 소식을 접하시고 감회가 어떠셨는지요.
이번 기념관 건립은 제 남은 여생 동안 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 여기고 열심히 봉사할 겁니다. “무엇보다 제 고향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니, 무척 기쁩니다. 일단 기념관이 건립되면, 몇 몇 신작들을 기증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제가 계속 추진하고 있는 독도운동도 전개하면서 전국 각지에 있는 제자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아 교류하는 장을 한 번 만들어보고 싶네요. 제 나름대로 재밌는 생각도 한 번 해봤어요. 기념관을 찾은 사람들이 직접 저한테 설명을 들으면서 돌아다니는 관광코스를 만들어보는 거예요. 제가 화폐인물의 영정을 그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돈과 관련된 사람이기 때문에, 부자되고 싶은 분들이 혹시나 많이 몰려올지도 몰라요.(웃음) 관광으로서 얼마든지 상품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관광인프라가 구축된다면 제 사후에도 관광지로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일랑 선생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 예산군 발연리 120번지를 항상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가운데 예산에서 자신을 위한 '기념관 건립과 생가복원'을 추진 중이라는 것에 무척 감사해하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고향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하십니다.
“저는 존경하는 추사 선생님께서 태어나신 곳과 가까운 곳에서 제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언제나 자랑스러웠어요. 그래서 저와 관련 있는 모든 서류나 도록에 제가 발연리 120번지 출생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공개했습니다. 고향은 저한테 여러모로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올리면, ‘원퉁이, 벼룩부리, 시리미 고개, 돌고개’ 마상골 고개 등과 같은 단어가 떠오르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시골스럽게 들릴지 모르나, 저한테는 한없이 다정하게 들리는 그리운 단어들입니다. 어릴 때 뛰놀던 고향집 주변의 호수와 들판, 예산장터 등을 떠오르게 해줘요. 고향은 제가 어려서 어떻게 자랐으며 부모님께서 저를 어떻게 키우셨는지 그 기억을 돌이켜보게 만들어주는 매개체입니다. 특히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요. 원예학을 전공하신 아버지는 예산 사과 수종을 개량하는데 크게 일조하셨지요. 밤낮으로 현미경과 씨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려요.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뿐만이 아니라 어른이 돼서도 고향에 빚을 졌네요. 청운의 꿈을 품었던 소년시절, 6.25난리를 고향에서 피할 수 있었습니다. 고향이 저를 두 번 낳은 셈이지요. 저는 그래서 고향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삽니다. 제 수필집에 유난히 고향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이렇듯 제가 고향에 대해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번 기념관 건립은 제 남은 여생 동안 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 여기고 겸허한 자세로 열심히 고향의 문화발전을 위해 봉사할 겁니다.

-생가를 비롯해, 화백님의 작업실, 세미나실과 같은 생활터전이 마련되면, 거기서 특별히 계획하신 일이 있으신지요?
"네,제가 특별히 신경 써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요. 바로 제 생가를 일종의 ‘체험학습장’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발연리에 있는 그 집이 저를 화가로 만들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도 사실은 화가가 되기를 소망하셨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꿈을 접으실 수밖에 없으셨어요. 당신께서 직접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안타까움이 크셨던지, 둘째 아들인 제게 화가가 되라고 어렸을 때부터 말씀하셨어요. 뭐든지 종이를 주시면서 그려 보라고 하셨고, 제 그림공부를 지원하기 위해서 집안에 동물원도 조성하셨어요. 지금도 제가 크로키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그 때문인가 봅니다. 저는 단지 집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동물을 그렸을 뿐인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크로키 속사공부였어요. 

▲자신의 기념관이 단지 한 화가의 과거를 옮겨온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문화체험,창조체험장'이 되기를 바란다는 일랑 이종상 화백.

말 그대로 자연 속에서 체험학습을 한 셈이지요. 이렇듯 어렸을 때의 경험이 지금까지도 제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만 봐도, 어린 시절의 교육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 생가가 단순히 한 화가의 과거를 옮겨온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으면 합니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하나의 ‘문화체험, 창조체험장’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풍부한 자연환경을 조성하고, 여러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해 아이들로 하여금 자연을 체험하고, 안목을 넓힐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그것을 종이에 옮겼는데, 거기서 남과 다른 나만의 무언가 발견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창조죠. 이 모든 과정이 하나의 체험학습이 될 겁니다. 또 이를 심화시켜 제자들과 함께 영재교육도 실시하고 싶습니다. "

-화백께서 이루신 큰 업적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5천원, 5만원 권 ‘화폐도안’ 인데요. 기념관이 건립된다면 그와 관련해 구상하는 프로그램이 있으신지요? “우리나라는 화폐와 관련된 정보를 구체적이면서도 재미나게 제공하는 곳이 없습니다. 물론 조폐공사와 한국은행이 나름대로 전시관을 만들어놓긴 했지만, 지나치게 학술적인 내용만 있더라구요. 예를 들어, ‘년도별 화폐 변천사’, ‘화폐의 제조과정’ 등 이론 설명 위주로 딱딱하게 만들어 놨어요. 저는 이와 다르게 아이들이 일일이 체험해 볼 수 있는 ‘화폐전시실’을 꾸려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전시품을 만져볼 수 있게 하고, 화폐를 만드는 종이를 추적해 원료를 어디서 추출하는지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요?(웃음) 이를 통해 화폐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는 아이들이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혹시나 해선데, 주변에 화폐에 내 그림을 넣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진 친구들이 있나요? 내가 그린 돈을 내가 쓰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가진 친구들 말이에요. ‘내 얼굴그림으로 돈 만들기’ 이런 프로그램도 만들어서 아이들과 함께 놀이하면서 돈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나눠보고 싶어요.”

-‘생가복원이 이런 식으로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하실 부분도 있으실 듯 합니다.
“제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달라고 재정사정이 넉넉치 않은 군에 쉽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대략적인 부분만 바라고 있습니다. 저와 협의를 거치지 않고 진행되는 문제들이 아무래도 있으니까요. 저는 다른 걸 다 떠나 생가에 뽕밭을 조성하고 누에를 쳤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뽕밭에 대한 추억과 낭만이 있거든요. 뽕잎을 따서 선반 위에 쫙 놔요. 그러면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가 났는데 마치 소나기가 내리는 소리와 같았죠. 쏴아~ 하는 소리였어요. 어려서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잤어요. 하얀 누에들이 머리를 내밀고 느리게 휘적거리고 있는데 전 신기하게도 그게 무섭거나 징그럽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번데기 먹고, 오디 먹고 군것질도 상당히 많이 했어요. 그렇게 어린 시절을 재미나게 보내면서 제가 가진 감수성의 많은 부분이 형성됐던 것 같아요. 기념관에 자연생태학습장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제공하고 싶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제가 느꼈던 걸,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아이들의 감수성을 풍부하게 길러주고, 자연학습 체험을 통해 아이들의 창조성과 독창성을 마음껏 발휘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일랑   이종상 화백 프로필                                                                                             

 1938년 7월 20일 충남 예산읍 발연리 120번지에서 출생

◆학력 및 학위
1942년 충남예산군 예산공립유치원 입학
1945년 충남서산군 서산사립유치원 졸업
1950년 6.25 발발로 서울삼광초등학교 6학년 중퇴 피난
1956년 대전보문중학교 졸업
1959년 대전고등학교 졸업
196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미술학사 : 동양화전공)
1979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 석사과정 졸업
(문학석사 : 비교미학 전공)
1989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과정 졸업
(철학박사 :동양철학 전공)

◆수상 및 서훈
1943년 예산군 및 전국 유아동 우량아신체검사 1등상 수상
1961년 제 10회 『국전』동양화부 초특선
1962년 제   1회 『신인예술상』 최고특상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 수상)
1962년 제 11회 『국전』 무감사   특 선  (내각수반상 수상)
1963년 제 12회 『국전』 무감사   특 선  (문교부장관상 수상)
2003년 제180호 『은관문화훈장』  서 훈  (대한민국 대통령)

◆작품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호암미술관 Leeum/ 63Gallery/ 서울대학교미술관/ 연세대학교
박물관/ 한양대학교 박물관/ 학교법인 연세대학교재단 세브란스빌딩대벽화/ 막/학교법인 이화재단 계림빌딩로비벽화/ 대법원청사 로비대벽화/ 서울지방검찰청사 로비벽화/
서울법원 종합청사 로비대벽화/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로비대벽화/고양시아람누리오페라 무대막
국립국악원 대극장 '예악당'무대면막/ 세종대왕기념회관/ 한국민족문화센터(현 국립극장)로비대벽화/
문예진흥원대극장로비/ (주)예음사옥/ 삼성그릅 본관로비대벽화/ 무역진흥공사 회관 본관로비벽화/
여의도 대림그룹 서울증권 사옥로비대벽화/ 포스코 신축빌딩로비/ 문화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사/ 동아일보 /한림미술관(대전)/ 선재미술관(경주)/ 경남도청 창원도청 신축청사(창원/
의정부 법원지원 본관(의정부)/ 광양제철소 금호문화관 백운아트홀(광양)/ 포항문화예술회관(포항)/ 서현역
삼성Plaza(분당)/ The University of Texas at Dallas Art Gallery (Dallas, USA), Galerie Gana-Beaubourg (Paris, france)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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