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일본속보] 구로다 또 망언 '위안부 독립유공자 대우 한국언론 이해안돼"-②
[이수경의 일본속보] 구로다 또 망언 '위안부 독립유공자 대우 한국언론 이해안돼"-②
  • 이수경 교수(일본도쿄가쿠게이대학)
  • 승인 2012.03.0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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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 이어]

한편, 같은 날에 소개된 산케이 신문 서울 지국장인 구로다씨의 코멘트도 인상적이었다.

[놀라운 것은 위안부 출신의 나이 든 여인들이 지금은 매스컴으로부터 독립유공자와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등을 특이한 한국인의 역사관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한국에 살면서 가해측인 일본의 보수 언론인으로서, 남성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코멘트이기 때문에 역사관이 피해자측과 일치할 수는 없는 것이고 새삼 언급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여기에는 한국 사회가 자성하고, 간과해서는 안되는 문제가 몇 가지 내재되어 있기에 지적해두고 싶다.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앞에서 필자.

1. 나이 든 여인들, 즉 지금까지 살아 온 시간보다 살아가야 할 시간이 많지 않은 그 분들이 그렇게 심신의 멍투성이 상흔과 트라우마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수요 집회를 계속 하려는 의지는 자신들의 삶을 일제 강점기 공간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었고, 그동안 훼손되어 온 명예를 회복하려는 인간 회복을 향한 투지이다.

2. 매스컴은 오랜 유교 사상으로 뿌리 깊게 박혀 온 여성들의 정조관념을 사회적 도덕으로 중시 여기던 나라에서 자란 그녀들이 자신들을 지배해 온 일본군에게 만신창이가 된 심신으로 돌아 왔을 때, 한국의 남성 중심 군부 정권은 유린되어 온 그녀들의 삶을 돌봐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속히 산업 공업화를 일궈서 한국 사회를 일으켜세워야 한다는 조급함때문에 한일 양국의 무수한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65년에 한일협정을 맺었고, 민심을 무시한 채 폭압적으로 휘어잡으려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녀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내팽겨쳐졌다.

그러다 1980년대에 인간적 권리 및 [위안부]로 끌려다녔던 일생에 대한 명예 회복과, 여성으로서의 치욕적 삶의 내용을 윤정옥, 이효재 등의 여성 연구자들이 치밀하게 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일본에서는 요시미 요시아키 등 양심적 학자의 자료 발굴 및 일본 정부의 책임 문제를 추궁하며 그때까지 일본정부가 은폐하려고 했던 내용들이 밝혀지게 된다.

그런 불행했던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볼 시민들의 자각과 의식의 고양, 언론의 사회적 역할이 중요시 되고, 한국 언론은 민주화 운동 이후 자신들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비중을 두고 취재를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지금도 색깔 논쟁 등으로 한국의 언론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많으나 시민들의 고발 문화(SNS등의 발달) 및 옴브즈만 같은 사회 책임 의식이 높아진 만큼 위안부 문제 해결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자각을 하고, 사실을 알리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90% 이상이 남성 으로 구성되어 왔던 그동안의 한국 언론의 무심함은 분명 자성하여야 할 부분이고, 대중영합주의에 휩쓸리는 것보다 자신들의 신념으로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언론의 사회적 시대적 책임에 대해서도 앞으로 중책을 느낀 행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구로다씨로서는 그가 만약 한국인이었다면 한국 역사문제에 공감하고 이해할 내용이겠으나, 한국측과는 역사 인식이 절대 일치될 수 없는 가해자측 시점으로 일본의 근대사를 옹호해 온 입장이기에 한국의 움직임이 불편한 것이다. 물론 그가 전쟁의 희생이 된 그 분들의 삶을 자신의 어머니나 누나, 혹은 아내의 입장으로 이해를 했다면 결코 그런 코멘트가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욕적인 대상으로 만들어서 과거 일본군의 책임 회피와 한국을 배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려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매춘부][창녀]등의 호칭으로 비하하며 일본의 미래까지 무책임한 나라로 몰고 가려는 어리석은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본의 침략 전쟁이 없었다면 그녀들의 삶이 위안부로 전락되거나 그토록 매도당하며 굴욕적인 삶을 강요당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없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문제는 무엇이 발단이었나? 그리고 왜 과거에 일어난 잘못 된 전쟁에서 파생된 우행을 비열하게 변명하고 부정을 하나? 과거의 책임 문제를 하루 속히 씻고 글로벌 세계의 동반자의 길을 가야 하는게 시대의 흐름을 읽고 숲을 보는 혜안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모르고 태어난 차세대를 짊어질 우리의 후손들에게 응어리를 남기지 않는 책임있는 행동이다.

격동하는 글로벌 시대의 일본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깔끔한 역사 청산과 더불어 신뢰받는 이웃나라와의 파트너 쉽이 절대적이다. 고위 정치가나 특권층의 조상들이 행했던 침략 전쟁이기에 그들 후손인 2세 3세 의원들이 합리화를 하며 미화시키려 하는 행위는 되려 나라의 이미지를 망치는 무책임하고 수준 낮은 정치 놀이이다. 이젠 책임질 수 있는 최선의 태도를 보여서 전쟁없는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선진 일본을 보여줄 때가 아닐까?

필자에게 있어서는 일제 강점기 공간에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한은 특별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는 같은 여성으로서 가슴이 미어지는 증언을 들어야만 했었고, 1923년 9월의 관동대진재의 희생자 구조나 전쟁 중에 혼혈정책으로 한국인과 결혼하면 우생학적으로 우수한 인자가 배출된다는 국책으로 한국인 좋다고 결혼했다가 버림을 받고 귀국하지 못했던 나자레원의 여인들의 삶과 더불어 필자에겐 참으로 힘들게 마주해야 했던 근대사였다.

필자가 90년대 말에 박사 논문을 준비할 당시,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의 이케우치 야스코 교수(당시 필자를 많이 지탱해 주셨던 이케우치 교수는 한국과 많은 인연을 맺었으나 아쉽게도 올해로 정년 퇴임을 하셨다)등의 초청으로 증언을 하러 오셨던 김순덕 할머니(지금은 고인)는 통역을 맡았던 필자에게 위안부 시절 트라우마 때문에 숨쉬기가 고통스러워 힘들다고 내 품에 안기셨던 그 기억이 지금도 선명히 남아있다. 그 뒤, 당시 나눔의 집을 맡고 있었던 혜진 스님의 안내로 몇 번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가서 할머니들의 위안부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식사를 나누면서 가슴이 미어져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미 많은 분이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필자는 1875년 이후의 일본과 얽혀진 우리 근대사를 다루며 희생이 되었던 많은 분들의 아픔이나 반복되는 불행의 구조, 그분들의 삶을 규명하여 왔으나 지금도 과연 필자가 어디까지 그분들의 아픔을 덜어드릴 수 있나? 번민한다. 그래서 남들이 가지 않는 탄광촌 등의 현장을 찾아 다니기도 했고, 시간만 나면 관계자의 무덤을 찾아 가서 그들의 영혼을 되새겨보는 시간도 가져보기도 했다. 제자들을 데리고 대마도나 나가사키에 세미나 여행을 갔을 때 별칭 [무덤 투어]라고 불릴 정도로 묘지만 찾아 다녔던 기억도 있다.

당연히 1906년에 대마도에 유배되었던 항일투사 최익현의 순국비 앞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였고, 그런 맥락에서 올1월 말에 몇 년 걸린 왕산 허위의 항일 운동과 체포에 관련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아픔이나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결심하여 학교측에서 부탁받은 인권 교육 수업에서 인류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교육적 사례로 소개를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된 것은 한국인만이 아니라 아시아 각처에서 많은 민족의 여성들이 희생되었다.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이국땅에서의 전쟁에 염세적으로 된 군인들이 야반 도주를 하게 되었고, 젊은 나이의 성적 본능을 절제하지 못하여 현지 민간인의 강간 행위가 속출하자 그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터의 성적 노리개로 여성들을 전쟁터로 불러 들인 일본군 위안부 제도. 그것은 민간인 업자가 운영했다고 해서 국가적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나 근본적 원인은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인한 것이다. 그런 국가 규모로 행해진, 그래서 창녀니 매춘부 등의 모멸스런 용어로 치부하고 싶은 수치스런 근대사는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다른 분쟁 지역에서 비인간적인 구조로 행해지고 있는 인류의 불행사로 되풀이 되고 있음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쟁과 군인과 여성]이란 폭력적 구조는 일본의 패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내전 중인 아프리카 각지를 비롯한 지구촌에서 발발하는 무력 분쟁터에서 위협과 협박으로 절제력을 잃은 소년병들 혹은 강압에 견디지 못하고 마약을 취하게 된 비정상적인 상태의 병사들에 의한 집단 강간 살해 구조로 일어나고 있다.

그렇기에 하루속히 군 위안부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고, 지금도 사욕적인 무력 분쟁으로 인해 야만적인 행위가 횡행하는 지역에서 아비규환의 공포 속에 희생되는 수많은 인명을 구하는데 한일 사회가 협력하여 지구촌의 불행을 막는 선진 사회의 파트너 쉽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전쟁을 경험하고 폐허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한일 사회가 세계에 보일 성숙한 모습이자 교육적 시대적 사명이다.

2012년3월2일 새벽 도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