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신]최광식 장관, “한옥 표준화하면 곳곳에 한옥촌 건립 가능하다.”
[2신]최광식 장관, “한옥 표준화하면 곳곳에 한옥촌 건립 가능하다.”
  • 이은영 기자
  • 승인 2012.03.08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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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한류문화소통투어 중 전주한옥마을에서 밝혀

 

▲최광식 장관이 한옥 예찬론을 펼치고 있다.

“한옥에서 살고 싶다”

최광식 장관은 지난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전주와 광주를 방문하는 한류문화소통투어에서 이같이 말하며 한옥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최 장관은 첫 번째 지역으로 선택한 전주 한옥마을 내 고택 ‘학인당(學忍堂)’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기자들과 담소 자리에서 “최근에 은평구 쪽에 한옥을 표준화시켜서 대량생산 가능하다는 뉴스를 접했다”며 “한옥도 표준화를 시키면 가격이 낮아져 살고 싶은 사람들이 살 수 있고, 자연스럽게 한옥촌이 형성돼 우리 고유의 가옥문화를 지켜갈 수 있을 것” 이라며 한옥 대량 생산화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다.

그는 "이번 일정에 호텔 숙박을 취소하고 우리 전통가옥구조인 온돌이 있는 한옥에서 묵을 것을 결정했다”며 한옥이 가진 멋과 맛에 대해 설파했다. 아울러 자신도 한옥에 살고 싶다는 강한 바람을 나타냈다.

최장관은 “한옥이 표준화가 된다면 서울의 각 구마다 한옥촌이 하나씩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밝히고 “다만 너무 똑 같은 것보다 각각 특색을 살려 약간씩 달라야 한다.”며 자칫 표준화와 대량화에 따른 획일성을 경계하기도 했다.

◆일제 억압에 문화로 항거한 '학인당'

이어 최장관은 “일제는 우리 민족문화 결집의 구심점이 되는 놀이 제사와 축제를 말살하기 위해 당시 각 가정에서 빚는 술을 ‘밀주’라 칭하고 대대적인 밀주 단속에 나섰다. 이는 우회적으로 제사와 축제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 설명하고 “전주에 뼈대있는 집안에서 일제의 압제에 맞서, 문화로 저항하기 위해 한옥을 지은 것”이라고 학인당을 소개했다.

▲학인당 전경
▲학인당 내부. 다구 등이 정갈하게 갖춰져있고 찻상의 나무결이 이 집이 범상치않은 곳임을 나타내주고 있는 듯하다.

그는 특히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이 되기를 소원하셨던 백범 김구 선생도 여기서 두 번이나 묵었다“며 문화부장관으로서 학인당 숙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학인당에서 묵은 뒤 함께한 일행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사랑채 내 방에 걸려있다.
사랑채 방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당시에 묵었던 일행들과 함께 사랑채 문 앞에서 찍은 사진이 걸려 있기도 하다.

학인당은 1908년에 민간주택에 궁궐의 건축양식을 적용한 전형적인 가옥으로 수원 백씨 종손인 백낙중이 우리 공연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2년 6개월에 걸쳐 지은 집이다.

당시 백낙중은 전주의 전통축제인 ‘전주대사습’을 비롯 우리 소리문화를 지키기 위해 공연이 있을 때면 사랑채의 대청과 큰 방을 터서 공연장으로 내놨다. 오늘날 전주 대사습이 전승보존돼 오는 것은 전적으로 '학인당'의 공이 크다할 것이다.

학인당에는 특이하게 후원을 두는 우리 옛 건축양식인과는 달리 집의 전면에 정원을 조성했다. 이 집 안주인에 따르면 앞쪽 우물이 이 집안의 혈자리로서 이 우물을 제대로 간직하기 위해 옆에 연못을 판 정원을 조성했다는 설명이다. 정원에는 수려한 위용을 뿜어내는 소나무를 비롯 철쭉 등의 나무와 돌탑, 전통굴뚝 등이 단아하게 가꿔져 있다.

▲이 집안의 혈자리인 우물. 지금은 김치냉장고(?)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학인당,고종황제로부터 효심 인정받은 백낙중의 정신 고스란히 건물에 스며 있어

▲고종이 백낙중의 효심을 높이사 승훈랑 영릉참봉에 봉한 교지를 현판으로 걸어놨다.
한편 학인당은 서울 북촌 윤보선 고택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형한옥(전체 면적 540평, 건평 67평)으로 수원백씨 종택으로서 3대에 걸쳐서 효자문을 하사받은 집이다. 특히 효심이 깊었던 백낙중에 대해 고종황제는 그의 효행을 높이 사서 '효자 승훈랑 영릉참봉'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백낙중 사후 그의 효심을 널리 알리기 위해 당시 뛰어난 명필이었던  성당 김돈의(1871-1936) 선생이 고종의 교지를 현판에 새겨 지금도 솟을  대문 홍살문 밑에는‘백낙중지려(白樂中之閭)’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학인당의 당호 또한 백낙중의 호 인제(忍濟)의 '인'자를 따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