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기획] 한국 혼이 담긴 우리시대 영원한 아티스트 `黑雨' 김대환
[스페셜기획] 한국 혼이 담긴 우리시대 영원한 아티스트 `黑雨' 김대환
  • 이은영 기자
  • 승인 2012.03.1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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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 추모공연 매년 열려,그를 매개로 시대·민족 뛰어넘는 우정의 무대 펼쳐져

일찍이 한 사내가 있었다.
검은 가죽 재킷, 검은 안경, 검은 두건을 쓰고 자신이 좋아하는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음악에까지 끌어올린 사내.

▲黑雨(흑우) 김대환 선생

한국적인 리듬과 소리'를 찾는 끈질긴 작업으로 많은 뮤지션들의 존경과 따름을 받아온 사내. 사내는 또 기이하게(?) 쌀알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 넣는 세서미각(細書微刻)으로 도올 김용옥도 찬탄해마지 않았으며 기네스북에까지도 오른 달인이기도 했다. 또 자신의 일부로 생각해온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무대에 올려 모터소리를 음악의 일부로 사용하는 등 새로운 소리에 대해 끝없는 도전을 꾀했다.

그 사내는 72년 이라는 이 땅의 일기로 그토록 자신이 사랑했던 음악을 뒤로한 채 세상 밖으로 떠났다. 사내는 그의 애마인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헬리콥터에 매달려 많은 음악 동지들의 잘 가라는 환송 인사에 손 흔들며 유유히 하늘나라로 올라갔다.(이 부분은 그가 세상과 이별하는 날 해금 연주가 강은일 교수가 꾼 꿈 이야기에서 차용해 왔다.). 2004년 3월 1일 이었다.

사내는 드러머이자 타악기 솔리스트, 프리뮤지션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목 흑우(黑雨) 김대환 선생이다.

▲해금연주가 강은일 교수(좌)와 소리꾼 장사익 선생(우)이 연주자들의 공연을 흐믓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기자가 김대환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5여 년 전 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의 ‘홍대 앞 문화’가 태동될 시기, 홍대 앞 Zero Theater에서 펼쳐진 그의 타악기 연주 무대였다. 그때의 세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굵기가 다른 8개의 스틱을 양손가락에 나누어 끼고 치는 그의 폭발적인 드럼연주는 경이로움을 넘어 숨 막히는 긴박감마저 던져 주었다. 그리고 공연 마지막에 쌀알에 글씨를 써 넣는 그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그것이 과연 실제 상황이 맞는지 헛갈렸던 기억이 뚜렷하다.

기자가 김대환 선생을 굳이 ‘사내’라고 칭하는 이유는 기자의 기억 속에 그는 아직도 ‘젊음’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젊은 기운으로 펄펄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시류에 영합하거나 속박되지 않고 끝없이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과 삶에 대한 철학과 자세로 인해 그에게는 ‘사나이’보다도 ‘사내’라는 칭호가 가장 잘 어울린다. 그의 야생마 같은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청춘의 헌사라고나 할까?(조금 불경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바란다.)

▲사물놀이 창시자 이광수 명인의 공연이 시작되자 무대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조용필을 오늘날 국민가수로 이끈 숨은 공로자, 김대환

오늘날의 국민가수라 칭해지는 조용필의 존재는 전적으로 김대환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미 8군에서 노래하던 조용필을 방송무대로 불러 올려 세상의 빛을 보게 한 것이다. 그럴 정도로 김대환 선생은 당시 음악계의 중심에 있었다. 이후 그는 조용필과 기타리스트 최이철(후에 ‘사랑과 평화’의 이남이로 대체됨)을 규합해 자신의 성을 딴 ‘김트리오’로 맹활약을 펼쳤다. 또한 세계적인 그룹이 된 코리아나의 드럼주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인디 듀오 '홍대입구'

그 후 대중음악의 한계성을 인식, 국내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모던재즈를 수년간 독학, 최초의 프리 뮤직연주가로 변신하게 됐다. 78년부터 ‘강태환트리오’의 멤버로 공간사랑에서 매월 정기연주회를 가져 동양정신을 간직한 아주 귀한 재즈그룹이라고 순수 음악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순수 음악에서 현대무용, 판토마임 퍼포먼스 등에도 활발히 참여했으며 이러한 독특한 음악작업은 세계적인 재즈잡지 `리듬 & 드럼'에 `한국혼이 담긴 재즈아티스트'라는 제목의 특집기사로 소개되기도 했다.

지난 3월1일 그의 8주기를 추모하는 공연이 종로 북촌창우극장에서 올려졌다.
그 날 사내는 홀연히 이승으로 내려와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걸판지게’ 한 판 놀다갔다.

▲북촌 창우극장의 대표이자 거문고 연주가인 허윤정씨. '우리시대의 광대'라 불리길 기꺼이 즐거워했던  故 허규 전 국립극장장의 딸이기도 하다.

◆ 추모공연=경건한 잔칫집(?)

이번 추모공연은 소리꾼 장사익 선생이 기획하고 한국문화의집 예술감독 진옥섭의 사회로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과 그를 추종하는 일본의 유명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했다.

▲재즈 트럼펫 명인 최선배 선생

 국내에서는 사물놀이 창시자 이광수(민족음악원장, 대불대 교수)와 재즈트럼펫 명인 최선배 선생, 해금 연주가 강은일(서울예술대학 교수)과 거문고 연주가 허윤정(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이수자), 해금연주그룹 ‘활’, 기타리스트 김광석과 젊은 듀오 뮤지션인 ‘홍대입구’가 참여했으며 김대환 선생의 양자로 일컬어지는 일본 타악명인 오쿠라 쇼노스케(관련기사 18면)와 그의 친구들이 참여하고 사네즈씨의 부토춤 등을 비롯 장사익의 정성스런 무대가 이어졌다. 무대와 관객이 하나 된 이날 공연은 관객들의 기립박수가 여러 차례 터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출연진과 관객들이 하나 돼 ‘아리랑’을 합창하며 이날의 대미를 장식했다.

▲해금 연주가 강은일 씨가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

 

▲이광수 명인의 열정적인 꽹과리 연주

김대환 선생에게 바쳐진 이날 공연은 나이와 지위, 국적과 민족을 뛰어넘은 즐겁고 유쾌한 한 판 굿(good)놀이였다. 특히 이날 공연이 3시간이 넘게 이어지면서 자칫 지루해 질수도 있는 순간에는 사회자인 진옥섭씨가 재치 있는 입담으로 관객들의 웃음을 쏟아내게 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김대환 선생의 젯상 앞에 예를 올리다

또 이날 무대에 오른 뮤지션들은 김대환 선생의 대형 사진과 제사상이 차려진 무대에 예를 갖춘 뒤 공연에 임했다. 이는 선배 예술가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후배들의 모습으로, 관객들에게는 감동 그 자체였을 것이다.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

한편 공연 시작 전 북촌창우극장 앞은 마치 잔칫집처럼 삼삼오오 몰려든 사람들로 어느 듯 골목이 가득 찼고 반가운 얼굴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광경은 꼭 잔칫집 분위기였다. 또 뒤 늦게 이날 공연을 알고 찾아온 이들은 객석 자리가 없어 무대 바닥에 앉아 끝까지 공연을 함께하기도 했다. 공연장 안에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공연이 열리기 전 창우극장 앞 골목은 김대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랫만에 만난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광경이 마치 잔칫집을 연상케 한다

이번 공연을 앞두고 “경건한 마음을 갖기 위해 하루 전부터 금식을 했다”며 무대에 오른 일본 타악 명인 오쿠라 쇼노스케 씨는 김대환 선생의 일화 한 토막을 소개했다.

“공연을 앞두고 선생님의 손가락이 부러진 적이 있었어요. 스틱을 잡으셔야하는데 골절돼있어 그럴 수 없었죠. 그러자 선생님께선 손가락에 스틱을 고무줄로 감아 고정시켜 연주를 하셨지요.” 김대환 선생의 무대와 음악에 대한 투혼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김대환 선생의 양아들로 일컬어지는 일본 타악명인 오쿠라 쇼노스케(윗 사진). 그 아래는 오쿠라쇼노스케의 친구들과 부토무용가 카가나 사나에씨의 공연 모습.

◆ 우리전통음악 재창조해 세계화시켜

이번 공연을 기획한 장사익 선생은 “원래 우리음악은 마당무대에서 꽃피웠다. 예전에 공간사랑 같은 소극장 무대가 많아서 오늘날과 같이 아름답게 우리 문화를 키워온 것”이라며 “.관객과 연주자가 함께 웃고 우는 이런 분위기가 소중하기 때문에 소극장에서 김대환 선생을 추모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선생님은 국악과 양악을 접목한 퓨전과 프리음악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그의 활동들이 전통음악에 영향을 미쳐서 오늘날 우리음악을 풍부하게 해 세계적인 관심 갖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선생의 음악은 대단히 창조적인 것이다”고 존경심을 내보이며 “8개 북채, 북, 오토바이, 쌀 글씨 등… 그래서 선생의 우산(영향)아래 있던 우리가 선생을 추모하면서 우리 음악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책무가 있다."고 말했다.

▲장사익 선생의 절창

그는 "특히 일본인들이 매 번 추모 공연 때마다 자신들이 비용을 들여서 온다."며 "이는 사상과 민족을 떠나서 한 예술가의 영향력이 특별한 날을 만들고 특별한 음악을 하게 한다”고 이번 공연의 의의를 밝혔다.

◆ 김대환 선생, 국내·외 예술계에 길이 남을 것

김대환 선생은 세상을 뜨는 그 해 2월에 한성대에서 명예철학박사를 받았다.

그의 철학박사 수여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는 음악에 대한 것은 물론 삶 자체에서도 그냥 하는 일은 없었다. 그는 쌀알에 글씨를 새기는 미세음각에 대해 “소리는 우리의 이 작은 몸으로 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몸을 가장 작게 움직여 가장 작은 모습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더 작게 글씨를 새기며 쓰고 있는 내 몸을 보게 됐다”라며 타악기 연주의 지존인 그가 마흔 넘어 작은 물체에 글씨를 새기거나 쓰는 음각에 몰입하게 된 연유를 밝힌 대목이다.

▲전 출연진이 나와서 관객들과 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며 대미를 장식했다.

“목표를 가지고 살려고 하지 말라”고 김대환 선생이 해금 연주가 강은일 교수에게 준 가르침은 예술가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한 말일 듯하다. 삶을, 일을 예술을 즐기고 사랑하면 그 자체로서 행복한 삶을 살 것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목표하지 않아도 어느 자리에 가 있을 거라는 얘기다. 이렇듯 그의 말처럼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과 도전을 해 왔고, 그런 그의 삶이 철학 그 자체라고 해도 절대 무리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는 죽어서도 대중음악계는 물론 우리 전통 음악인들과 해외의 예술인들의 가슴에까지 ‘혼’으로 살아있는 참 행복한 사내다.

뮤지션들의 선배와 스승에 대한 이런 자발적인 헌정 공연은 요절한 몇 몇 뮤지션들에 대해서는 있어왔지만 나름 일가를 이룬 대 선배들에게 행해지는 모습은 잘 볼 수 없었다. 매년 행해지는 김대환 추모 공연은 후배들에게 전범이 되는 공연으로서 훗날 국내외 예술계에 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