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칼럼]청량산,“음습에 뿌리, 생명·반란이 잉태하는 땅”
[여행칼럼]청량산,“음습에 뿌리, 생명·반란이 잉태하는 땅”
  • 최방식 대기자
  • 승인 2012.03.11 20: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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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방식의 길거리통신/‘현무’ 지키는 북문넘어 ‘초록환희’ 피워내는 숲...

조선왕조 전반기 2백여 년 간 법궁이었던 경복궁 뒤편에 가면 ‘신무문’((神武門)이 있다. 궁궐의 네 개의 문 중 하나이며 북문으로도 불린다. 임금이나 공신들이 궁궐 후원 나들이를 하지 않는 한 늘 닫아두는 문이다. 음습한 기운이 들어올 수 있어서 그렇다.

풍수지리를 살필 때 기(氣)가 모이는 곳, 집터를 고르는 ‘양택론’(陽宅)에 보면 이렇다. 음향오행도 유사한데, 북쪽은 어둠·죽음·살상을 의미하며 이 방향을 상징하는 상상속의 신수(神獸)는 현무다. ‘북현무’(거북)를 말하는데, 색깔로는 검정이다.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이 흐르는 곳’(배산임수), ‘바람을 막고 물을 얻는 곳’(장풍득수)에서 북쪽은 산으로 이어지는 곳이니 당연히 죽음의 세계와 연결된 곳이다. 음습(陰濕)한 숲으로 향하는 길목이다. 그래서 어둠과 무력을 지배하는 현무가 지킨다.

◆배산임수 장풍득수 터전엔...

음습(陰濕)한 청량산 숲을 주말이면 찾아가는 건 이유가 있다. 동쪽이니 봄이 먼저 들르는 곳이기에 그렇다. 기나긴 겨울을 서둘러 탈출하려는 애절한 마음 때문이다. 말라버린 기(氣)에 음의 기운을 채우고 뒤틀린 육신의 균형을 잡아보려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곳은 음과 양이 만나는 곳. 습(濕과) 건(乾)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니까. 산은 양(陽)이지만 음인 땅과 물에 뿌리를 박고 있으니까. 밝고 높은 봉우리는 어둡고 깊은 계곡에 걸터앉아야 비로소 위용을 갖출 수 있으니까. 기상과 기백을 자랑하려면 그만큼의 음습한 뿌리를 뻗어야 하니까.

인간이 음의 기운을 채워야 하는 이유는 많다.늘 불타는 태양에 돌진하는 부나방이기에. 찬란하고 화려한 곳, 경쟁자들의 시샘이 모이는 그 곳으로 늘 쉬지 않고 달려가야 하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강함은 부드러움 없이는 부러지기 십상이다. 밝고 찬란해도 어두움이 없다면 실감할 수 없듯이. 높음은 낮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불과 열은 물과 냉기의 상극이면서 상생이듯이.

솔·우산이끼가 눌러 붙은 음습한 나무 밑동, 실개천 곁 너럭바위엔 생명의 기운이 넘쳐난다. 높고 푸른 하늘을 향한 고사리의 초록 춤사위나 대나무 밭 한 가운데 밤나무의 ‘삼정승 음기'는 그래서 내 오랜 벗이다.

◆“실개천 곁엔 생명의 기운이

그 못, 그 늪지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흐드러진 자태, 하얀 속살의 유혹이 늘 아른 거리니까. 제 몸도 녹이기 전 새 생명을 잉태했다. 검은 숯 몇개라도 끼워 금기줄이라도 둘러쳐야 할 성 싶은데... 오면 가고, 그저 그런 인연일 뿐이다.

바위 곁에서는 새 여행이 시작됐다. 하얀 뿌리 한 가닥에 의지해 조막손을 막 치켜든 도토리. 긴 겨울 제 속살을 뜯으며 버텨온 장한 생명이다. 행자에게 들리지 않고 용케도 버텨낸 조마거림이 이제 환희로 피워오를 것이다.
춥디추운 겨울 연약한 육신을 추스르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온 건 생명의 의지 때문이다. 음습한 땅에 뿌리를 박고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허공으로 쭉 벋어갈 영광의 날을 기다린 것이다. 시작은 앙증맞게도 작고 나약하지만... 음습은 생명이 잉태하는 곳이다. 뭇 생명은 그 곳에서 태어나 뿌리를 박고 자란다. 그러니까 생태계의 자궁인 것이다. 햇볕과 바람, 그리고 하늘을 이고서 첫 걸음을 떼는 운명의 터전. 임을 봐야 뽕을 딴다고 했던가.

음습을 즐기려고 숲에 가지만 거기 오래 머물지는 못한다. 인간은 음습에서 잉태하고 제 몸을 키워가지만 정작 그 곳에 기거하지는 못하는 운명을 가졌다. 다만 음습 덕에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다. 음양의 조화인 것이지. 우주 생명의 섭리이고.

◆“하얀 속살의 유혹에 화들짝”

음습하지 않은 곳에 살며 음습의 이치를 깨닫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냥 삶의 조건이고 본능일 뿐이다. 음습을 등지고(숲 아래) 사는 배산임수. 머잖아 북문을 거쳐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요즘 음습을 파헤치려는 이들이 있다. 불온하다고, 음험하다고, 때론 무섭다고 외면하더니 이젠 없애버리자고 그런다. 음습이 인간 생명을 해친다는 거짓말은 애초 믿지 않았다. 헌데, 바닥을 긁어내잔다. 돈벌이가 될 것이라면서. 음습지가 사라지는데 어떻게 생명이 온전할 수 있겠는가? 개울이 마르고 강이 사라지면 세상도 생명도 타들어갈 텐데... 강바닥을 긁어봐야 고인 물이 썩기나 할 테고. 목숨이 간당간당하게 생겼다.

음습을 지켜야 산다. 북문이 비록 무섭더라도 필요한 날 사용하게 거기 그대로 둬야 한다. 너무 자주는 아니더라도 신무문 넘어 음습지를 다닐 수 있어야겠지. 물이 필요하든, 음기가 필요하든, 아님 숲속 생태계로 귀의하든 간에.

북문은 반란의 문이기도 하다. 경복궁 신무문으로 홍경주 등 기묘사화 주인공들이 들이닥쳐 개혁정치를 펴던 조광조 등을 몰아내고 홀대받던 반정공신의 공적을 다시 세웠던 것. ‘走肖爲王’(조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파자(破字) 사건을 거쳐.

◆생명을 파헤치는 음험한 破字...

 

신무문 바로 안쪽, 그러니까 궁궐의 가장 북쪽에는 건청궁(乾淸宮)이 있다. 고종이 정궁을 창덕궁에서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고 자신과 왕비의 거처로 쓰려고 비밀리에 지은 궁인데 을미사변 때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비운의 살해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신무문으로 건청궁을 나서면 경복궁 후원이다. 조선왕조 법궁을 처절하게 파괴한 일본 총독이 살았던 관저가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알 것이다. 지금 누가 사는지. 이승만의 경무대였고, 이젠 청와대가 자리한 곳이다. 그러니까 청와대는 신무문 밖 음습한 숲속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최방식 대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