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상 화백의 독도칼럼]모화근성(募華根性)에서 섬 그리기 의도적 꺼려왔던 것 문제
[이종상 화백의 독도칼럼]모화근성(募華根性)에서 섬 그리기 의도적 꺼려왔던 것 문제
  • 일랑 이 종 상(대한민국예술원 회원/화가)
  • 승인 2012.03.12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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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독도를 지키자/해돋이의 땅 독도(獨島)-2

 [지난 호에 이어]

▲일랑 이종상 화백

독립기념관이 2003년 교원연수생 100여 명과 함께 독도 현장체험을 한 이래 줄곧 독도문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2008년에는 최초의 태극기 게양행사를 ‘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와 공동주최로 독도 현지에서 거행되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태극기가 원형대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3본을 만들어 독립기념관과 울릉경찰서독도수비대와 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에 각각 보존해 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독립기념관이 나라사랑의 실천장이 되어오고 있는 것은 독립정신이 한 낱 지난역사로서 기록적 가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민족자존의 창조적 독립정신을 교육시키는 좋은 사례로 남을 것입니다.

한국미술사는 고구려 벽화로부터 연원하여 재료기법은 물론 표현양식까지도 고려시대 불화로, 다시 조선시대 회화로 이어오면서 한중일 동일문화권 안에서 문화적 보편성과 조형적 특수성을 지녀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언제 부턴가 문화사대주의에 젖은 모화사상(慕華思想)은 동기창의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에 기울어 전통적인 채색기법이 폄하되고 문인사대부 취향의 남종문인화풍이 유행하여 이 땅의 화가들은 중국의 산수와 수묵담채 기법을 추종하는데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화제(畵題)와 소재(素材)가 중국의 개자원(介子園)이나 심죽재화보(尋竹齋畵譜)아니면 고씨화보(高氏畵譜) 등에 수록된 대륙의 화북(華北)지방의 웅장한 산수경을 이상향으로 삼으며 고구려 벽화나 고려 불화 등에서 우리 미술의 전통을 찾기보다, 오히려 중국미술에서 편승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겸재(謙齋) 정선이 동국지진경(東國之眞景)을 그리게 되면서 오랜 문화적 모화근성(募華根性)에서 벗어나 비로써 자국의 국토를 사랑하고 우리의 자연을 소재로 삼는 회화적 자각운동이 일어나면서 오랜만에 우리미술이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이런 시도는 계속되어 왔으나 속화로 폄하 당하는 일이 대부분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때 겸재 정선이 우리의 국토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많은 진경작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수요계층의 오랜 기호와 관습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중국의 산수와 흡사한 한국의 고원심산경(高原深山景)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아쉬움을 남긴 것이 어쩔 수 없는 당시의 현실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대륙의 태산준령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오는 잠재적 산수관(山水觀)에서 아직도 열등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으로 해서, 한국 산하의 저지대, 들판이나 어촌, 바닷가나 섬에 대한 산수소재에 대한 기피현상을 보였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반도적 특성을 갖는 긴 리아스식 해안의 발달로 많은 섬과 해양문화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막상 진경화가(眞景畵家)들 마저도 들판의 농경생활이나 바닷가 어민들의 생활, 또는 그 많고 많은 섬 그리기를 의도적으로 그리기를 꺼려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진정, 겸재가 한국미술의 독립(?)을 선언했다면, 당시 조선 땅의 그 길고 긴 저지대 해안선을 따라 모듬살이가 형성되어 온 어촌의 풍광과 독도를 비롯한 울릉. 제주, 백령도 등의 섬 그림들이 고지도(古地圖)보다 훨씬 먼저 그려졌어야 옳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그토록 중요시하는 지도의 어버이는 산수화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측량술이 발달하기 이전부터 고지도는 분명 화가들의 몫이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고심평원법(高深平遠法)의 산수화에서 이동시점이 응용되고 조감(鳥瞰), 부감산수화(俯瞰山水畵)로 발전하면서 더욱 넓은 지역을 담아내려는 평면 지도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영토분쟁이 있을 때마다 많은 사가들이 고지도를 찾기 전에 차라리 한 점의 산수도를 찾는 일이 더 현명함을 알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한국의 민속신앙인 사신사상으로 볼 때 한라 백록담이 남주작(南朱雀)을, 강화 첨성단이 우백호(右白虎)를 백두의 천지가 북현무(北玄武)를 상징해오고 있다면, 막상 동쪽을 수호하는 좌청룡(左靑龍)은 어디일까를 생각해 본 일이 있으신지요? 그러나 이런 의문에 대해 삼국유사의 만파식적을 만들었던 대나무를 얻어온 동해의 기이한 섬, 문무대왕의 수장유언(水葬遺言)을 떠올리며 선뜻 독섬(獨島)이라고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성싶습니다.[다음 호에 계속]


▲일랑 이종상: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전 서울대동양화과 교수/전 서울대미술관장 및 박물관장

이 글은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5천원권과 5만원권 화폐 영정을 그리신  일랑 이종상 화백(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이 우리나라 최초로 독도에 입도해 독도를 그릴 당시의 소회를 ‘60인의 문화의병’ 작품집 도록에 실은 글의 일부를 발췌해 연재로 싣고 있습니다. 특히 이 글은 당시 대한민국의 한 젊은 화가에 의해 예술 창작품으로 독도가 처음 태어나던 감격스러운 입도 순간을 작가노트를 통해 발표한 것입니다.

일랑 선생은 우리 영토를 문화로 지켜야한다는 일념으로 독도문화심기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이후 독립기념관과 유수의 신문 등과 공동주최로 '겨레의 집'에서 ‘독도사랑,독도수호’범국민문화축제가 열리게 했습니다. 이후 독립기념관 초대로 ‘일랑 이종상, 독도사랑 30년 특별초대전’이 한 달가량이나 독도와 관련된 귀중한 자료들과 함께 전시돼 독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켰습니다.

2012년 현재까지도 일랑 선생은 ‘문화로 독도를 지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독도그리기와 전시를 통해 우리 영토 독도의 중요함과 사랑을 널리 알리는데 혼신을 다해 오고 있습니다.

서울문화투데이는 일랑 이종상 화백님의 이런 그간의 헌신을 높이 기리며 그 뜻을 함께 하기 위해 2012년 연중 캠페인으로 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와 함께 ‘문화로 독도를 지키자’를 전개합니다. 아울러 앞서 밝힌 일랑 선생님의 작가노트 글을 계속해서 싣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