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시인, 불쑥 말을 걸다
천재 시인, 불쑥 말을 걸다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09.05.28 09: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결혼은 만화(慢畵)다" 각박한 세상에 던져진 천재 시인의 위트

 천재 시인 이상(李箱. 본명은 김해경金海卿.1910~1937)의 결혼관을 적은 메시지가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구보 박태원(1909~1987)의 결혼식 방명록에 남긴 메모가 그것이다.

 박태원의 장남 일영(70)씨가 오는 6월 15일 청계천 문화관에서 개막할 구보의 유물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 발견된 방명록에서 이상은 결혼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결혼은 즉 만화(慢畵)임에 틀님업고/ 慢畵의 실연(實演)에 틀님없다/ 慢畵實演의 眞摯味는/ 또다시 慢畵로 윤회(輪廻)한다”(1934년 10월 27일)

 만화에 원래 사용되는 한자인 넘칠 ‘만(漫)’자 대신 게으를 ‘만(慢)’자를 넣어 표현한 이 메시지는 필자의 오랜 궁금증을 시원스레 풀어주었다. 천재 시인 이상에 대해 갖고 있던 막연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호기심이 풀린 것이다. 마치 토굴 속에서 10년 면벽 수행하던 스님이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은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이상 시인에 대한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그동안 이 불가사의한 천재 시인에 대해 언뜻 언뜻 스치는 의문점이 많았다.

 도대체 그는 왜 그리 난해한 시를 썼던 것일까? 천재라서 그랬을까? 그의 머리 속엔 무슨 생각들이 가득했던 것일까? 그의 성품은?....꼬리를 무는 궁금증 이었다. 그런데 이번 메시지로 그에 대한 많은 호기심이 풀어졌다.

 이상은 우선 매우 조숙한 사람이었다. 구보 결혼식 방명록에서 메시지를 남길 때 그의 나이는 겨우 24세 였다. 서울 종로 출생으로 보성고보와 경성공고 건축과를 나온 후 조선 총독부 건축기수로 취직했으나 병마와 싸우다 일본행을 결행, 불온사상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 도쿄대 병원에서 병사할 때가 27세였으니 죽기 3년 전의 일이었다. 그 나이에 벌써 인생을 달관한 듯 한 이런 메시지라니...역시 천재라서 그랬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요즘의 24세라면 아직 군대에 있을 나이...고향과 부모와 애인을 그리워 할 그런 나이가 아닌가? 시대상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대단한 시인이었음이 틀림없다. 메시지에서 ‘결혼은 慢畵’ 라고 한 것은 천재인 그의 장난 끼가 발동한 것 같기도 한데, 사실은 결혼과 인생에 대한 그 나름의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漫畵’라고 해 꽉 찬다는 의미의 찰 만(漫)자를 쓸 자리에 모자란다는 의미의 게으를 만(慢)자를 쓴 것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로 풀이할 수 있다. 한 쌍의 남녀가 차근차근 천천히 살림살이를 마련해 나가는 결혼 생활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호화결혼, 혼수 장만에 식장을 가득 채워야만 결혼식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요즘의 우리 결혼 풍조에 전하는 교훈적 메시지 같다.

 ‘慢畵의 實演에 틀님없다’와 ‘慢畵 實演의 眞摯味는 또다시 慢畵로 輪廻한다’라는 구절도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는 재치 섞인 장난 끼를 통해 인생을 너무 각박하게 쫓기듯 살지 말라는 시인의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요즘 사람들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결혼과 인생 자체를 너무 무겁게 너무 진지하게 대하지 말고, 게으른 듯 모자란 듯 여유와 낭만과 달관한 듯 한 태도로 살 필요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慢畵 實演의 眞摯味’도 ‘또다시 慢畵로 輪廻’하고 마는 것이니까...결국 慢畵와 같은 결혼과 인생인 것이다.

 70여 년 전 불우한 시대의 한 천재 시인이 역시 불우한 환경 속에서 남긴 메시지가 오늘 우리들의 각박하고 모진 인생들 앞에 불쑥 말을 건네고 있다.

“꼭 그렇게 남을 짓밟아 가며, 아등바등 욕심을 채우며 미친 듯 살아야 하겠는가? 꼭 그렇게 남을 이기고 죽여야만 했는가? 너희의 眞摯味도 결국은 慢畵로 輪廻하고 말 것이다”            

권대섭 대기자 kd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