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여행칼럼] 힐링의 땅 나가노(長野)에서 한국의 흔적을 만나다 (3)
[이수경의 여행칼럼] 힐링의 땅 나가노(長野)에서 한국의 흔적을 만나다 (3)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승인 2012.05.30 11: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고의 원시림과 유황냄새, 온천수 분출하는 협곡사이로 흐르는 눈 녹은 에메랄드빛 아즈사강과 신비의 호수, 백제 불교의 명사찰 젠코지(善光寺), 그리고 마츠시로(松代)

평소에 사적지 나무 덤을 즐겨 찾는 필자로서는 백제 역사도 느낄 수 있는 젠코지에서 한일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라고 권장하고 싶다.

▲젠코치 각처에 세워진 추모비석

 

▲젠코지 주변 풍경

단아하고 정갈한 일본화(자연 바위 색을 녹여서 색채를 내는 기법) 미술을 좋아한다면 대표적인 일본화가 히가시야마가이이(東山魁夷) 미술관이 바로 젠코지 뒤에 붙어있으므로 꼭 한번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필자도 히가시야마의 작품에 흥미를 갖고 그림 을 그렸던 적이 있기에 보는 이를 마음 편하게 해주는 그의 작품과 기법을 소개하고 싶다.

▲젠코지 주변 풍경

 

▲젠코지 주변 풍경

이번엔 시간할애가 어려워서 아쉽게 그곳을 빠져 나왔지만 시간이 있다면 그 주변을 산책하며 옆의 신슈 대학캠퍼스도 걷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를 보내기 전에 한곳을 더 둘러볼 곳이 있어서 일단 젠코지를 빠져나왔다.

▲젠코지 주변 풍경

 

▲젠코지 주변 풍경

급한 발걸음으로 넓은 사원을 뛰었던 터라 허기가 지기에 깔끔하고 세련된 카페가  보여서 잠시 쉬면서 휴식을 취한 뒤, 걸음을 재촉하였다.

▲젠코지 오야키 판매점

사원거리를 빠져 나오면서 나가노 명산인 오야키(다양한 야채양념 속이 들어간 밀가루 찐빵. 소박하지만 따스한 인간미를 느끼는 음식이다)를 몇 개 구입하여 다음 행선지인 마츠시로 대본영을 향해 가면서 먹었다.

오야키는 파는 가게마다 내용이나 가격이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시래기 볶음 맛의 속이 들어간 것이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젠코지의 오야키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것과 달리 모양이 일률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 손으로 만든 자연미가 담긴 것이 별미였다.

▲젠코지 오야키 판매점

오야키를 두 개씩이나 먹다보니 어느새 마츠시로 대본영근처로 왔기에 시립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서 현지에 갔다. 마츠시로 대본영이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군이 해외 각지에서 계속 패전을 당하자  1억 국민(식민지도 포함) 전체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야마토 정신으로 자멸하자며 자살행위를 부추키던 군부의 강한 조장 속에서 본토결전에 대비하여 일본왕족 및 육군 대본영(최고사령부),  국가 주요기관 및 통신 방송 관련 주요기관을 나가노의 산간지역인 마츠시로(松代)로 옮기려고 극비리에 계획, 진행되었던 광대한 지하호를 말한다.

당시 일본 각지의 탄광이나 댐, 군수 건설지 등에 연행되어왔던 한국인 노동자들  7000명이 대거 투입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4000명이 13킬로미터의 대규모 지하호를 파는데 투입되었다. 전후 대부분이 폐쇄되었지만 나가노가 평화 교육의 차원으로 공개하고 있는 죠잔(象山) 지하호는 필자가 한여름인 8월달에 들어가도 서늘한 정도의 장소였다. 그런 곳에서 한겨울에 맨손으로 삽질을 하며 땅굴을 파고, 통풍조차 되지 않는 곳에[국체호지]라는 명분으로 국민 없는 왕족을 살리겠다고 피신시키려했던 초라함이 전쟁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게다가 지휘통수권 다툼으로 육군과 해군의 갈등이 심해져서 해군사령부는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고 다른 곳에 거처를 준비했을 정도이니, 분리된 군부에 의한 국민 없는 국가로 전락하여 일본 및 그 식민지가 궤멸을 했다면 지금쯤 우리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무책임한 위정자들의 탐욕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것을 성전이라고 외쳐대는 살아남은 자들의 과거미화는 보면 볼수록 흉측스럽기만 하다. 아비규환의 지옥에 무슨 성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찢어지는 살과 피투성이가 범벅이 되고 울음과 비명으로 뒤덮이는 전쟁이 무슨 성스러운 싸움일 수 있는가? 짐승들은 차라리 비열하게 변명이나 합리화에 급급하지는 않는다.

국민의 전멸, 국가의 파멸을 담보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싸움판에 목숨이나 거는 사욕적 허세에 얼마나 미증유의 생명들이 희생이 되었고,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나? 권력자라는 특권으로 개개인의 승부욕을 채우기 위해 [국민]이나  [애국]이라는 미명하에 숱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던 희생의 구조에 무슨 인간의 지혜를 볼 수가 있고, 희망적 정치가 있었을까?

패전 직전까지 육군대신 아나미는 일억 인구 전원이 죽을 각오로 결사 항전을 해야 한다고 요구를 하다가 결국 45년 8월15일에 할복자살을 한다. 귀축(鬼畜, 아귀 축생의 약어)미국 영국과 전쟁을 서둘러야 한다는 시마다 의원의 과격 연설로 국회가 떠들썩하고 미국과의 대전에 거국전을 치루자는 강경파 군 지휘부의 움직임 속에서 한반도 도공의 피를 잇는 박무덕(일본명은 도고 시게노리, 東鄕茂德) 외무대신은 외교 교섭에 의한 평화론을 주장한다.

오키나와의 초토화 상태(미군에 의한 공격과 함께 자국인 일본군에 의한 자살 강요로 인해 죽게된 오키나와 민간인들도 상당수였다. 오에 겐자부로 재판 승소 참고)와 각 전투지의 패전으로 인해 이미 패북을 예견하던 스즈키 칸타로 수상은 1945년 4월 9일에 당시의 엄청난 사태 수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종전 처리 인물로 도고 시게노리(박무덕)를 지명하게 된다.

45년 8월6일과 9일에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이 투하되자 8월9일 밤 어전회의에서 결사 항전도, 조건을 건 항복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기도 코이치, 고노에 후미마로 등이 참석한 상황에서 도고 시게노리는 [조건 하나만을 내세운 항복], 즉 [천황제 유지]라는 단 하나의 조건을 건 항복론을 제안하고, 모두가 타당하단 결론으로 일본 정부는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도고 시게노리는 강경책을 주장하는 군부의 암살기도나 갖가지 협박 속에서도 최후까지 일본이란 국가를 책임지고 미래를 지향해야 한다는 신념하에 더 이상 무모한 행위로 국민을 내팽개치는 자멸 상태를 저지하려고 외교관의 책임을 관철시킨다.

▲마츠시로 죠잔지하호에서 가이드 가나이씨(우)와 필자

아이러니컬하게도 패전 후인 1946년 4월에 그는 극동 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판결을 받고 수감 중인 1950년7월, 옥중에서 68세의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그가 수감 중에는 같은 가고시마현의 사츠마 도예 마을 출신이던 도예가 심수관이 사식을 넣어주고 면회를 했다고 한다. 도고 시게노리의 외교적 수완은 2차 대전으로 인해 일본이 가장 위급했던 진주만 공격 때와 패전 후의 수습 처리였는데, 외무 대신으로서 그는 오로지 [국민이 우선되는 미래가 있는 국가를 위한 평화 정책]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인물임은 평가할 부분이다.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그런 일본의 근대 전쟁사의 흐름을 더듬으며 우리는 죠잔 지하호에 기다리던 평화 가이드 가나이씨(릿쇼 대학교 영어과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시대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어, 일본어, 영어, 불어에 능통하여 군대의 통역으로 일을 했던 적이 있다고 하였다) 안내로 헬멧을 쓰고 어둡고, 환풍기조차 없어서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지하호로 들어갔다. 죠잔지하호는 1944년11월11일 오전 11시에 착공하여 다음해인 1945년 8월 15일의 패전 날까지 약 9개월간 당시의 금액으로 약 2억엔이란 거액과 총 합계 300만 명이라는 주민 및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열악한 환경과 낡은 공법의 인해전술을 강요하여 공사를 시켰다. 그렇기에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났고, 우리가 들어간 지하호의 암벽에는 한국의 대구府(현재의 대구시)라는 노동자의 출신지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