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두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국내작가들, 크게 멀리 넓게 보고 다작해야…
[인터뷰-이두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국내작가들, 크게 멀리 넓게 보고 다작해야…
  • 이은영 편집국장 / 정리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05.3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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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전, 내달 12일까지 선화랑 1·2·3층 전시장서 열려

부산비엔날레, 부산 ‘아시아 미술중심도시’ 도약하는데 힘쓸 것
평생 그림에만 정진, 정치엔 관심 없어

      인터뷰가 있던 날 그는, 청색의 콤비자켓에 얇은 쉬폰의 멋스러운 코사지, 청바지에 굽이 완전히 없는 비 비화(운동화)를 신고 등장했다. 여전히 ‘씩씩한 열정’을 가진 ‘팔팔한 청년 이두식’(66세)이었다.

 “삼매경에 들어가지 않으면 작업할 수가 없죠. 거의 매일 4시간 이상은 작업에 몰두합니다”

     그러나 그는 전날 과음을 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작업을 하지 않는다. 작품에 들어가기 전 명상을 통해 영과 혼을 정갈히 한 다음 작업을 한다는 철칙을 한 번도 그른 적 없이 묵묵히 실천해 오고 있다. 그는 또 뭔가 하고자하는 열망이 있으면 그를 위해 한 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대학 시절,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신상전 최고상, 제7회 문공부 신인예술전 장려상 등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초현실주의 화풍 ‘생의 기원’으로 오리진 멤버로 활동하며 당시 한국미술계에 신선한 돌풍을 몰고온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음악적 요소와 춤을 추는 듯한 리듬감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화면 대부분을 청·적·황·백·흑의 화려한 오방색으로 장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화려한 작품은 관람객에게 신명과 흥을 북돋아주고 잠시나마 어려운 현실을 잊게 해준다.

     2000년 이탈리아 로마의 지하철 플라미니오(Flamonio)역에 동양인으로 유일하게 그의 그림이 벽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가로 인정받으며, 미술계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문화외교관, 미술교육자, 행정가, 국내외 미술자문위원 등으로 종횡무진 활동해 왔다.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로서 후학 양성과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그를 지난 28일 초대전이  열리고 있는 인사동 선화랑에서 만나 그의 작품세계와 삶에 대해 들어봤다.

▲잔칫날(Festival) Acrylic on canvas 116.8x72.7cm 2012

 -이번 전시에는 이제까지 추구해 오셨던 강렬한 오방색의 추상표현주의 작품만이 아닌 담채화로 일정부분 변모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양회화의 진수라고 불리는 수묵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어요. 이런 관심은 10여 년 전인 50대부터 확신이 생겼어요. 서양화를 배웠지만, 예전부터 동양 채색붓인 모필(毛筆)을 이용해 그려왔습니다. 모필은 기운이 드러나고, 에너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수묵추상화란 것도 서양의 추상표현주의와 화면을 꾸려나가는 방식이 비슷해요. 여백이 많고, 담백하게 그려내며, 묘사보단 관념적으로 표현하고… 점점 컬러를 빼고, 먹의 농담을 나타내기 위해 종이작업을 하고, 이젠 전통한지작업도 생각 중입니다. 오방색을 버린다는 건 아니죠. 오방색을 빼놓고도 기운이 살아있어야 하죠. 컬러의 화려함에서 오는 흥 말고도 다른 기운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제 숙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추사의 글씨나 겸재의 풍경화에서 오는 강렬함은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펄펄 살아있죠”

참고로 전시는 내달 12일까지 선화랑 1·2·3층 전시장에서 1980년대 후반부터 일관해오고 있는 '잔칫날(Festival)'의 근작 30여 점과 드로잉 10여 작품을 포함해 총 40여 점을 볼 수 있다.

-어떤 장소에 계셔도 한 눈에 교수님은 금방 눈에 띠시는데요?(웃음) 풍채에서 생동하는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제가 좀 이상하게 생겨서 눈에 잘 띄죠?(웃음) 외모 덕에 손해가 많아요. 군대에 있을 때도 앞장서야 하는 역할에 뽑히곤 해서 곤욕을 많이 치렀죠. 언젠가는 장교들 중에 위험한 일을 할 사람을 뽑는다기에 또 제가 뽑힐 것 같은 예감이 어김없이 들었어요. 그래서 입을 헤벌쭉하게 벌리고 서있었다니까요, 바보같이 보이려고…그런데도 뽑힐 사람은 뽑힙디다”(웃음)

-호탕한 성격으로 선 후배 동료들에게 인기가 많으신데요. 여러사회활동도 많이 하시는데...적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몇몇 악랄한 적들이 있어요. 말도 안 되는 모략을 꾸며, 소문을 퍼뜨리고… 특히 제 그림을 누가 대신 그려준다는 둥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죠. 대체 이 그림을 누가 어떻게 대신 그려주겠습니까? 거참, 정신적 피해가 아주 극심해요. 또 제가 만 48세에 최연소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 됐는데, 당시 얼마나 시기, 질투가 많았겠습니까. 아주 별별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나왔어요. 심지어는 제가 무슨 첩이 둘이 있다고… 거기에다가 덧붙여서 정치하지 않을 거냐며 주변에서 그러는데, 그게 얼마나 스트레스였는지 몰라요. 저는 고1때 서울예고 동창인 아내를 첫 눈에 반해 10년 뒤에 결혼한다고 선언하고, 그렇게 꼭 10년 뒤에 실행했어요. 그래서 당시 동기동창들은 날보고 무서워합니다. 내가 한다면 하는 줄 아니까요”

▲잔칫날(Festival) Acrylic on canvas 162.2x130.3cm 2012-2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이장희, 이상벽 씨 등 ‘세시봉’ 멤버들과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40년이 넘는 우정을 이어오고 계시는데,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사람을 만날 때, 목적을 두고 거래로 만나면 결국은 거래로 끝나겠지만, 저는 정으로 만나 관계가 오래가고 깊이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해줬으니, 너도 이렇게 해줘야한다는 생각으로 사귀는 것보단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저 잘해주고 싶다는 순수함이 있어야 해요. 좋은 친구 하나만 있어도 행복하다는 말이 정말 옳아요”

그는 호방하고 시원시원한 성격과 여러 사회활동과 더불어 두루두루 교분이 넓은 덕분(?)에 정치계에 뛰어

들진 않을까?하는 의혹과 이런저런 시비도 적잖게 받았다. 그러나 그의 평생의 목적과 꿈은 화가로 존재하는 것이다. 서울예고 및 홍대 미대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하고,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평생 그림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는 그다.

-한해에 평균 200~300점 정도로 다작을 하시는 걸로 유명하시잖아요?
“우리나라 작가들의 작품 수량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요. 작품은 많이 그려놔야 합니다. 이중섭이나 박수근을 생각하며 작품 수를 억제하면 안 됩니다. 그건 특별한 경우에요. 드라마틱한 인생사가 플러스가 되고, 그런 다음에 수량이 적으니 작품 값이 그렇게 높게 형성이 된 것이지, 생존 작가들이 그걸 보고 배우면 안 되죠. 사후에 적어도 작품이 500점 내지 1000점 정도는 있어야 시장형성이 됩니다. 현존하는 좋은 작가들 대부분이 작품 수가 500점도 채 되지 않아요. 희소성만 있으면 가격이 계속 올라가지 싶은데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심지어 미국에서는 작품 수가 적으면 전시계약조차 할 수가 없죠. 작품 물량이 모자라는 것은 즉, 생산기계가 좋지 않다고 판단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고흐는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까? 그렇다고 그림 값이 싸거나 그런 것은 전혀 아니죠.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하더라도 정작 우린 몇 점이나 갖고 있나요?… 그런 거예요. 그림을 많이 그려놔야 한다는 거죠”

-다작과 더불어 작품 가격이 명성에 비해 굉장히 낮기도 한데요.
“주변에서는 그림 값 올려야 한다고 하죠. 제 후배들, 제자들이 저보다 그림 값이 높으니까… 하지만 전 지금 제 작품 값이 적정하다고 생각해요. 작품 희소성에 의해 가격이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되도록 많이 그려서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길 바라거든요. 돈 많은 사람만 제 작품을 갖기보다는 미술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들부터 일반 사람들까지도 작품을 즐길 수 있어야죠. 그런데… 실은 그렇게 싼 것도 아니에요.(웃음) 제가 생각하기엔 그림 값이란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거예요. 제가 먼저 가격을 확 올리고 시류에 따라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아마 내년이면 정년이라 그 때쯤 올라가지 않을까...합니다. 미국에서도 큰 전람회 많이 했지만, 다 팔렸습니다. 한마디로 나중에 웃을 생각하면 됩니다”(웃음)

막힘없고, 호기로운 이 교수를 보고 있으면 아마도 부유한 집안 환경에서 자랐을 걸로 예상되지만, 전혀 아니란다. 젊은 시절에 극심한 가난으로 고생하며, 한 때는 소위 말하는 ‘이발소그림’으로 7년을 먹고 살았다. 겨우 세 시간이나 자며 생활 했을까. 그러고 밤에는 자신의 작품에 열중했다고. 힘든 상황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고 봐주는게 아니라 운좋고 아주 영악하다 그렇게 본다. 그런 점에 일정의 울분도 그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잔칫날(Festival) Acrylic on canvas 72.7x60.6cm 2012-3

-한국과 중국 미술 교류 증진에 힘써오며, 상하이 칭푸구 정부의 예술고문, 베이징·상하이·선양 순회전 및 다수의 개인전 개최 등… 중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최근 중국의 큰 전람회에 두 번 참여했습니다. 전람회에 참가하기 위해선 중간에 다리역할을 해주는 매치메이커가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심의 통과를 받아 참여를 할 수 있었던 거죠. 중국미술관에서 한국인 작가가 전시를 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어요. 굉장히 자존심이 세거든요. 중국의 가장 일류 사설미술관인 금일미술관에서의 전시도 굉장히 까다로웠었죠”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연임에 성공해 2013년 7월까지 부산비엔날레를 맡게 되셨어요. 지금까지의 성과와 앞으로 부산비엔날레가 가져야할 역할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광주비엔날레 예산에 반도 못 미치는 예산으로 운영 중이라 많이 힘듭니다.(웃음) 유료관람객 수가 성공의 기준인데, 입장료 7천원으로, 지난해에 유료관람객 20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대성공인 거죠. 올해는 최소한 그 이상이길 바라죠. 25만 명 이상 예상하고 있습니다. 올해 부산비엔날레는 ‘배움의 정원’이란 타이틀이 붙었어요. 배움이란 동참한다는 뜻이고, 서로 주고받는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많은 시민들을 작품제작에 참여하게할 예정이에요. 또한 부산은 물류중심 도시이자 해양 도시로, 아시아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부산이 아시아의 미술중심도시로서, 문화적, 예술적 도시로 도약하는데 부산비엔날레가 큰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 텃밭에서 자란 국내 미술가들이 세계적인 예술가로 발 돋음 하는 길목에 우리 부산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처음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을 맡았을 때, 그가 권위적이고 소유욕이 강할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세력을 구축해 힘을 과시할까봐 주변에서 그를 경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겉보기와는 다른 털털하고 솔직한 성격으로 이를 모두 불식시켰다.

-지난해 말,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후보 최종 3인에 들기도 하셨습니다.
“한창 면접이 진행되는 중에 심사위원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관장이 된다면 작품 활동과 전시에도 제약이 있을 텐데 괜찮겠냐며 말예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전 안 되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지금 활동 중인 작가인데, 개인전을 갖지 못한다는 건 상상이 안 갔어요”

-당시에 논문표절 시비로 곤욕도 치루셨는데요. 그에 대해 하실 말씀도 많으실 듯합니다.
 “일본교토대학조형학 명예박사(예술학) 받은 것을 시비걸고 넘어졌죠. 명예박사는 논문으로 받는게 아니잖아요. 그야말로 명예인데...전 바로 다음날 기자회견을 해서 밝혔어요. 명예박사 받을 당시 내 작품 도록을 하나 냈는데 거기에 무슨 인용을 하고 표절을 하고 있겠어요?그리고 ‘국립현대’는 논문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애초부터 말도 나오지도 않았던 겁니다.그런데 악의적으로 누군가가 저를 음해하기 위해 만들어낸거였죠. 이 자리를 통해 다시 한 번 정확히 짚고 넘어가고 싶네요.”

▲잔칫날(Festival) Acrylic on canvas 162.2x130.3cm 2012-1

-한국대학배구연맹 회장을 역임하셨어요. 배구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으신가요?
“사실 배구는 신사적인 운동이예요. 네트를 가운데 놓고 서로 공격하니까 몸싸움이 없잖아요. 본격적인 인연은 홍대 배구팀 창단부터라 할 수 있겠네요. 제 키가 181cm로 당시 제일 크기도 했고, 제가 배구를 좀 잘 했거든요.(웃음) 교직원 배구할 때도 꼭 나가서 뛰고 했죠. 자연스럽게 대학배구연맹 부회장을 맡고, 그러다가 회장을 맡게 된 겁니다. 재작년엔 배구실업연맹이 재조직되면서 회장을 맡게 됐어요. 배구는 여전히 좋아합니다. 지금은 직접 경기를 뛸 기회는 별로 없지만, 경기는 늘 챙겨보고 있어요. 요즘은 배구도 인기 많이 좋아졌어요. 결승전 같은 경우엔 암표가 돌 정도더라니까?”

-오늘날 미술계에는 홍대중심의 화단이 구축돼 기득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비판도 많은데요.
“이번 년도 홍대 미대 신입생 정원이 500명이었어요. 대학원까지 하면 재학 중인 학생이 아마 3천 명가량 될 겁니다. 서울대 서양화전공 학생은 고작 열 몇 명인데 비해서 말예요. 이렇게 사람 수가 많다보니 어딜 가나 홍대 출신의 작가들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거죠. ‘홍대가 다 해 먹는다’란 말은 억하심정에서 나온 말이라고 밖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다들 아무 말 못 하곤 해요. 맞는 말이니 할 말이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교육자로서, 또 미협이사장도 역임하셨고 여러 화단의 일을 많이 하고 계신데, 국내 문화예술발전을 위해 현재 문제점과 개선방향에 대해 하실 말씀도 많으실 듯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미술교육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학교에서 예능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만든 것은 결국 없앤 것과 마찬가지이죠. 학생들이 마냥 아이돌 노래만 들어선 되겠습니까? 심도 있는 것도 필요하죠. 그러기 위해선 학교교육이 그 부분을 담당해야 하는데…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에겐 정서교육으로서의 음악과 미술 교육이 중요하죠. 저는 요즘 문제인 학교폭력은 정서교육의 부재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어요. 그만큼 예능과목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앞으로 전시계획과 어떤 목표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내년 이맘때쯤 큰 기획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2층 전관에서 개최되니 규모가 어마어마한 거죠. 드로잉부터 스케치 등 그동안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보도록 하는거죠. 목표라면 특별한 것은 없고… 그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길 바라고요. 작품은 하면 할수록 늘던데, 꾸준히 해나가면 저대로의 뭔가가 정착되지 않을까 생각돼요. 그리고 좋은 기회가 와서 해외전시를 통해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싶기도 하고요”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 / 부산비엔날레 운영위원장 / 한국실업배구연맹 회장 / 예술의 전당 이사 / 서울메트로 미술자문위원장

△학력 및 경력
서울예고 미술과 졸업 / 홍익대 미대·동대학원 회화과 졸업 / 일본 교토 조형예술대학 명예박사 / 제17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역임 / 외교통상부 미술자문위원 / 한국 대학 배구연맹 회장 / 서울미술협회 이사장 / 홍익대학교 미술대 학장 역임

△소장처
국립현대미술관 / 연세 세브란스 빌딩(서울) / Jimmy Carter Foundation(미국) / Flaminio 지하철역 벽화(로마, 이탈리아) / 불가리아 국립미술관 외 다수

△수상
1968 신상전 최고상 / 1972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 1988 선 미술상 / 1995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寶冠文化勳章) / 2001 MANIF (서울국제아트페어) 대상 / 2005 제4회 문신 미술상 / 2007 제4회 한국미술공로대상 / 2010 중국 요녕성 '외국인 전문가 영예상'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