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 찬가’가 쓰여진 그곳, 시민들의 광장 됐다
‘서울시장 찬가’가 쓰여진 그곳, 시민들의 광장 됐다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2.06.25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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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천변풍경] ‘인공적인 청계천’의 시작, 청계광장

1936년에 발표된 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청계천 주변 사람들의 일상을 사진첩처럼 묘사한 작품이다. 어떤 통일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의 일상을 나열하듯이 쓴 이 작품에서 우리는 1930년대 청계천의 모습을 어림잡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를 지나 서울의 중심을 흘러갔던 청계천. 판자집 아낙네들의 빨래터, 장사하는 사람들의 터전이 됐던 '맑은 천' 청계천은 한때 '경제발전'의 이름 아래 제 모습을 잃어버렸던 곳이기도 하다.

광통교, 관수교, 수표교 등 청계천을 상징했던 다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이름이 됐고 그 곳에는 청계고가도로가 경제발전의 상징처럼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밑은 공장 노동자들의 아픔으로 가득찼고 마침내 한 남자가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바로 전태일이었다.

시장 골목과 공구상가, '교통 정체구역'으로만 인식되던 청계천은 2005년 '맑은 천'으로 다시 복원됐다.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동아일보)부터 마장동 신답철교까지 흘러 중랑천으로 합쳐지는 그 곳이 바로 청계천이다. 그리고 그 곳은 관광명소가 됐다. 패션쇼가 열리고 '청혼의 벽'이 생겼다. 새로운 형태의 다리도 생겼다.

하지만, 인공적으로 청계천은 복원됐지만, 그 청게천을 따라 우리의 삶, 우리의 역사를 증거했던 옛 모습들은 하나씩 둘씩 없어지고 있다. 'OO터'라는 이름의 석조물이 그곳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보여주지만 잘 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청계천 안내판에도 어느 하나 숨겨진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흘렀던 청계천. 박태원이 <천변풍경>을 쓴 지 76년이 지난 2012년에 우리는 또 하나의 <천변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청계천의 물길을 따라다니며 그 물길이 보여주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담담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 청계천변을 찾은 시민들


청계천의 다리들과 상징으로만 남은 터들을 통해 그 역사를 같이 이야기하고 사라진 청계고가도로의 추억, 사라진 기억 속의 장소들을 함께 떠올려본다. 청계천 상가에서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도 보고 전태일 거리에서 전태일의 시선으로 청계천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노래로 유명해진 청계천 8가의 풍경을 보고, 청계천의 끝에서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본다.

이제 <2012 천변풍경>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청계천의 삶을 살펴보자.

청계천이 흘러간 역사

청계천 이야기의 시작은 청계천 발원지에 세워진 청계광장이다.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가 청계천의 발원지라면 청계광장은 ‘인공적인 청계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평일에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을 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모이고 시민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청계광장을 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봤을 다슬기 모양의 조형물. 바로 청계천 복원의 상징인‘스프링(Spring)'이다. 팝아티스트인 클래스 올덴버그와 코샤 반 브루건이 만든 이 조형물은 바로 이 곳이 청계천의 시작이며 계속해서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흐를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 청계광장의 상징 '스프링'



개천(開川). 즉 ‘열린 천’으로 불렸던 청계천은 큰 비가 오면 항상 도성 근처의 물길이 막히면서 하천이 범람해 피해가 많았다. 1411년 조선 태종은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 하폭을 넓히고 제방을 쌓는 개천공사를 감행한다. 이어 세종 때는 물난리를 방지하기 위해 물의 양을 파악하는 수표(水標)를 설치한다. 물의 양은 각각 평수(平水), 대수(大水), 갈수(渴水)로 파악했다.

그러나 이후 인구가 늘어나고 잦은 벌목과 경지 개간으로 인해 자연재해가 빈번해지면서 토사가 청계천 다리까지 쌓이는 일까지 벌어지자 영조는 1760년 하천을 재정비하는 대공사인 ‘경진준천’을 실시한다. 이 때 토사를 쌓았던 ‘가산터’는 지금도 동대문 사거리에 남아있다.

이 청계천이 도시의 물결에 휩쓸린 것은 바로 일제 시대때다. 일제는 옛 다리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로 만든 다리를 놓았다. 게다가 청계천의 대표적인 다리로 어가가 지나다녔던 광통교 위에는 전차길까지 만들었다. 이 때부터 청계천은 본래의 ‘개천’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고 경제 발전을 외치던 군부 독재때는 고가도로가 설치되면서 하천의 모습은 아스팔트 밑으로 사라지고 만다.

▲ '인공적인 청계천'이 이곳에서 시작된다.



‘확고한 신념과 담대한 추진력’ 중견 작가의 낯뜨거운 찬사

광장에서 청계천 밑으로 내려가면 작가 박범신이 쓴 ‘청계천 살림의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을 바탕으로 청계천 복원의 과정을 살펴보자.

‘일시적인 수리 등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한 이명박 시장은 오랫동안 해외 사례등을 검토하여... 마침내 청계천 복원을 공식 선언하였다. (중략)

이명박 시장은 확고한 신념과 담대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역사성과 세계성을 함께 아우르는 의미 깊은 대역사의 진군나팔을 울렸다. 시민들의 열렬한 성원과 지역 상인들의 대승적인 협조가 큰 힘이 되었고 환경과 문화의 지킴이들이 기꺼이 나서주었으며 최고의 기술진과 첨단 장비의 역량이 여기에 보태졌다 (후략)’

이 박범신의 글은 온전히 청계천의 복원을 ‘이명박 서울시장의 담대한 추진력’ 덕분이라고 추켜세우고 있다. 하지만 박범신이 상인들의 협조를 칭찬했을 때 정작 그 상인들은 ‘가든파이브’라는 곳으로 밀려나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하고 텅 빈 매장을 지키고 있다.

▲ 작가 박범신이 쓴 '청계천 살림의 어제, 오늘, 내일'. 청계천을 이명박 서울시장의 치적이라 쓴 글이다.



박범신이 추앙했던 이명박 서울시장은 이 청계천을 바탕으로 대권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청계광장은 ‘실천하는 경제대통령 이명박’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의 꿈이 이루어진지 불과 5개월 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촛불을 들고 바로 그 상징인 청계광장으로 모였다. 그렇게 청계광장의 이미지는 바뀌었다.

‘인간다운 세상’을 외치는 목소리의 광장

‘경제대통령’의 탄생을 알린 광장에는 바로 그 대통령의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물결로 채워졌다. 청계광장이, 서울광장이 채워졌고 마침내 남녀노소가 모두 모여 촛불을 밝혔다. 2008년 촛불집회는 그렇게 열렸다. 인왕산에서 이 대통령은 자신이 만든 청계광장에서 시민들이 <아침이슬>을 부르는 것을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물대포와 ‘명박산성’으로만 시민들에게 비춰졌다.

청계광장은 서울의 관광지가 됐지만 또한 인간다운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무료로 인권영화를 상영하는 인권영화제가 열린 곳도 이 곳이고 시민들이 하고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민발언대 ‘할 말 있어요’가 열리는 곳도 이 곳이다.

낯뜨거운 정치인 찬가가 벽에 새겨진 그 곳.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건물이 자신들이 ‘최고의 언론’이라고 폼을 잡는 그 곳. 그렇지만 그곳은 지금 시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곳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청계천은 그렇게 변화를 시작하고 있다.

▲ 청계광장은 이제 '시민이 목소리를 내는' 광장으로 변화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