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김복희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한국 무용 발전 위한 열정 “지금도 멈출 수 없어…”
[인터뷰-김복희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한국 무용 발전 위한 열정 “지금도 멈출 수 없어…”
  • 이은영 편집국장 / 정리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07.2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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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초 ‘현대무용콩쿠르’ 세계무대로 나아간다

작품 레퍼토리화 주력, 9월 강동아트센터서 ‘슬픈 바람이 머문 집’ 올려
국립현대무용단이 이끌어 국내현대무용계 성장 이끌 것
‘사회무용화’ 무용계 침체 해소하길 기대

     김복희 한국무용협회 이사장(64). 그는 한국 무용계를 이끄는 수장이기 전에 40년 넘게 전통무용보다 더 한국적인 현대무용 확립을 위해 춤춰온 무용수이기도 하다. 겨우 스물 셋의 나이에 무용단을 창단하고 지금까지 70여 작품을 창작했다.

     2005년부터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맡아온 그는 ‘최초’라는 타이틀로 무용계를 위한 많은 성과를 일궈냈다. 세계 최초로 ‘국제현대무용콩쿠르’를 만들어 매년 운영 중에 있으며, 2010년 국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해 대중과의 벽을 허물고 소통 가능한 작품을 개발하도록 물꼬를 텄다.
 
     요즘도 꾸준히 무대에 서고 있는 그는 무용가에겐 몸이 소재이고, 또한 언제라도 춤출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는 몸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검고 긴 생머리와 크고 깊은 눈동자가 고와 육순을 훌쩍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는 반면, 고향인 대구 사투리가 구수해 친근하기도 했다. 한국 무용사에 굵직한 한 획이자 기념비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는 그를 만났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올해 무용인생 40년을 넘겼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다섯 살 때부터 무용을 시작했으니 해온지는 60년이 다 되간다. 하지만 71년 무용단 창단을 기점으로 하면 이제 41년을 맞이한다. 서양에도 현대무용이 있고, 우리 나름대로의 현대무용이 또 존재한다고 생각해 우리의 뿌리와 근본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서양 무용과는 경계를 두려고 했고, 우리만의 현대무용을 세계화한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왔다. 지난해 40주년 기념 공연을 가졌는데, 지금까지 했던 작품들 중 레퍼토리를 갖고 와 네 작품을 올렸다. 무용단 창단 당시에도 불교적 성격이 짙은 작품들을 보여 왔다. 결국은 지금까지도 그 맥락을 이어오고 있다. 종교성도 있지만, 종교적 작품이라기보다는 우리 문화의 뿌리라는 생각으로 해왔다.

현대무용을 전공했다고 해서 그는 하나의 장르에만 얽매이지 않고 여러 장르의 무용과 몸 쓰는 동작들을 섭렵했다. 특히 ‘한국인의 특성에 맞는 춤’을 뽑아내기 위해 태권도부터 무술, 수벽치기 등 다양한 움직임을 배우며, 역동적인 몸짓을 연구했다. 또한 마사 그레이엄의 무용기법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故박외선 이화여대 교수로부터 마사 그레이엄의 현대무용 테크닉을 배우기도 했다.

▲무대 위의 김 이사장

-불교적 세계관을 작품에 투영하기도 하고, 서정주의 시, 토니 모리슨의 소설 등 문학작품을 무용화하기도 했다. 계기가 궁금하다.
어릴 때 방학이면 절에 들어가 자연 속에서 지내곤 했다. 당시 밤에도 혼자 산 속을 돌아다니는 겁 없는 소녀였다.(웃음) 하루 3천배를 일주일 내내 하기도 했다. 다 마치고 나니 큰 성취감으로, 웬만한 어려움은 다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 불교에서는 모든 걸 자신이 해결하라고 한다. 그게 참 좋다. 그런 면에서 작품도 내가 아는 것만큼 나오는 것 아니겠나. 또한 불교의 윤회사상 역시 내 작품과 잘 맞았다. 아무 것도 없지만 다음으로 이어지고, 다시 생성되고 이어지는 것 말이다. 또한 대중들이 친근하게 느끼는 소설이나 시를 무용화하면 관객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겠단 생각에 시나 소설을 인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문학 속 이야기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있는 이야기더라. 인간의 감정이란 다 비슷한가보다. 현재 토니 모리슨의 ‘다시 새를 날리는 이유’을 무용화해 9월에 무대에 올린다. 내년에 ‘노틀담의 곱추’도 준비 중이고…

-뿐만 아니라 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많이 선보였는데…
어느 작품이든 간에 여자가 들어가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웃음) 그런 의미도 있고, 과부 등 억압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특히 ‘삶꽃 바람꽃-신부’는 서정주 시인의 ‘신부’를 무용화한 작품으로, 첫날 밤 버림받은 여인의 한을 그렸다. 훗날 신랑이 다시 그 여인을 찾아 어깨에 손을 올리자 재로 변하는 그 허망함을 무대에선 종이옷을 다 찢고 쓰러지는 장면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솔로작업은 주로 여성을 주제로 작품을 해왔다.

그는 잘못 알려져 있는 게 있다며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2008년 시작돼 올해 5회 째를 맞이하는 대한민국무용대상은 무용계의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항간에는 대한민국무용대상 리셉션이 정부 지원으로 열리면서 너무 성대하게 치러지는 게 아니냐며 매해 말에 열리는 무용인들의 축제에 대해 말이 많았던 것. 이에 대해 그는 '정부 돈'이 아니라며 딱 잘라 말했다. 협회에서 돈은 돈대로 들고, 욕은 욕대로 먹고, 거기에 나름 마음고생까지 얹어가며 매해 대한민국무용대상 개최에 애쓰고 있는 걸 그는 되짚었다.

-세계 최초로 국제현대무용콩쿠르를 만들어 세계 무용계의 이목을 받기도 했다.
협회는 전통무용뿐만 아니라 발레나 현대무용까지도 모두 함께 이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무용제, 전국무용제가 기존에 있었지만 따로 대한민국무용대상을 만든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다.

현대무용제는 현대무용의 장르적 특성 때문에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우리의 현대무용이 세계 현대무용의 지표가 되고, 전 세계 현대무용수들 간의 교류를 위해  선도적으로 지난 2010년 ‘국제현대무용콩쿠르’를 만들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확장하고 있으며, 특히 올해 3회를 맞으며, 해외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과 취재요청을 받았다. 그는 국제현대무용콩쿠르의 세계 무용인들의 참여 및 홍보를 위해 해외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힘쓰고 있다.

-1971년 ‘김복희·김화숙무용단’을 창단했다. 당시 굉장히 이른 나이에 무용단을 만들었다.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던 중 무용단을 해체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무용가라면 직접 안무를 하고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에는 어린 나이에 뭔가 한다는 게 쉬운 일도, 좋은 시선으로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혼자가 아니기에 힘을 합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창단 후 한양대 전임 교수로 임용되고, 결혼 후 자리 잡느라 막상 제대로 된 활동은 2년 정도 후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작품 성향, 제자 육성 등 둘이 함께 하는 것에 무리가 따른다는 걸 깨닫고 90년대 들어서 자연스럽게 해체했다. 원래 이런 일에는 주변인들이 서로를 이간질하기 마련이지만 우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김화숙 국립현대무용단 이사장과는 가깝게 지내고 있다.

▲김복희 무용단

-2010년 한국춤비평가협회가 선정하는 몬도가네(Mondo Cane)상을 유인촌 전 장관과 함께 공동 수상했다. 유쾌한 수상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몬도가네상 : 무용계 발전을 위한 명목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한 인물을 선정)
하도 이런 일을 많이 겪어 당시에도 불쾌함 없이 그저 담담했다. 나는 평론과 무용은 서로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무용가가 미처 생각지 못 한 걸 채워주는 게 바로 평론가라고 본다. 하지만 국내 평론가들은 단순 비판만을 해왔고, 내 스스로도 평론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분들은 내가 일을 잘했다고 해서, 내게 잘했다고 해줄 분들도 아니다. 예전에 나를 비롯해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책을 만든 적이 있다. 무대가 끝난 후에도 무용을 남기자란 생각으로 모인 거다. 중앙 무용가들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용가들도 참여했다. 책이 발간된 후 모두들 각자 자신의 생활로 돌아갔다. 책에 일체 간섭 없이 말이다. 후원하고 도와주기는 했지만 이래라 저래라 간섭은 전혀 없었던 거다. 그런 모습이 참으로 멋있더라.

여러 시련이 있었지만 그는 하고자한걸 다 관철시켰다. 행동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과에 대해 절대 혼자서 이룬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전부터 계속 움직임이 있어왔고, 그 노력이 자신 때 와서 이뤄진 것뿐이라고.

-무용무대가 늘어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무용공연의 티켓구매율은 낮다. 유명발레단의 공연 정도나 관객이 몰린다.
현대무용은 장르적 특성상 마니아만 좋아하는 예술이 됐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무용은 발레의 규격화에 반기를 들고 대중의 입장에 서서 탄생된 거였는데, 오히려 지금은 그 반대다. 발레는 대중들에게 익숙하지만, 현대무용은 점점 더 추상화되며 대중과 멀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국립현대무용단이 앞장서 현대무용의 대중화를 이끌 것이라 기대한다. 큰 단체들이 잘 되면 작은 개인 공연들도 함께 따라오며, 발전하게 될 것이다.

-동아대와 영남대 무용과가 없어졌고, 여러 대학의 무용과 통폐합되며 무용과가 사라지고 있다. 무용계로서는 우울한 소식이다. 무용계의 침체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용 전공자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용이 사회무용화가 돼야 하며, 그렇게 되면 관련 직업 창출이 활발해질 것이라 기대한다. 댄스 테라피, 노인을 위한 프로그램 등 삶의 질을 높이고, 신체와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쪽으로 개발돼야 한다. 그 이전에는 중고등학교 교과목에 표기과목으로라도 무용이 설 자리가 생겨야 할 것이다. 특히 여학교에서는 무용을 선택과목으로 지정해 학생들에게 자율적으로 선택할 기회를 줬으면 한다. 또한 ‘영어발레’ 등으로 좀 더 특화시켜 유치원부터 초중고교까지 퍼져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수요가 늘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관건이겠다. 현재 노인건강보험공단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할 강좌를 구상 중이다. 일본에 그런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어 얼마 전 답사도 다녀왔다.

그는 한양대 교수로 40년 가까이 학생들과 함께 하며, 엄격한 스승으로서, 때로는 친근한 어머니로서 그들에게 넓은 세상과 예술의 길을 깨우쳐 주려고 노력했다. 해외무대를 갈 때면, 꼭 시간을 내 일부러 학생들을 그 나라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관람하고 소감을 적게 했다. 어린 학생들이 귀찮은 마음에 안 보고도 본 척할라치면 끝까지 데리고 가 관람하게 했다. 그저 책에서 보기만 했던 예술 작품들을 학생들이 직접 보게 함으로써 그들의 예술 견문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확장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개인적으로 준비 중인 일들이 있다면?
오는 9월에는 강동아트센터에서 ‘슬픈 바람이 머문 집’(2001)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 마침 강동아트센터가 앞으로 춤 공연 기획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하니 무용인으로서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작품 레퍼토리화에 집중하고 싶다. 내년에 1999년에 초연했던 ‘노틀담의 곱추’를 다시 공연할 생각이다. 이 외에도 내 작품들에 대한 상징성을 주제로 책을 준비 중이다. 교재보다는 덜 무겁고 딱딱한 안무 지침서라고 할까. 작품 준비 과정과 작품의 오브제의 목적과 이유 등 그런 걸 다루려고 한다. 예를 들어 ‘피의 결혼식’에서 한삼을 한손에만 각기 다른 색을 착용했는데, 그게 상징하는 의미와 이유에 대해 정리한 거다.

-앞으로의 꿈은?
협회에서 운영 중인 서울무용제나 국제현대무용콩쿠르 등이 더 커져서 세계적인 무용제로 우뚝 서길 바란다. 특히 국제현대무용콩쿠르의 ‘국제’란 말이 더 이상 무색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개인적인 소망으로는… 학교에 있으면 학생들을 무용수가 아닌 제자로 볼 수밖에 없다. 기회를 많이 주고, 보듬어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생각했던 대로 완벽한 작품을 뽑아내기가 힘들었는데, 2년 뒤 정년 후에는 정말 나와 맞는 사람들과 콤팩트하게 작업하고 싶다.

-자신에게 춤이란 무엇인가?
‘무용은 내 인생’이라고 무용가들은 말하곤 한다. 나 역시 춤에 모든 걸 걸긴 했지만, 이 나이쯤 되고 보니 춤만이 전부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돌아보면 가족도 있고, 학교도 있고, 무용인들도 있었기에 지금의 내 자신이 존재했다고도 본다. 인생의 소중함이 다른 곳에도 있더라. 하지만 내 삶의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게 춤이란 걸 부정할 수는 없다.

김복희 △1948년 대구 출생 △현재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이화여대 및 동 대학원 졸업. 원광대 철학석사(1992), 경기대 이학박사(1994) △대한무용학회 회장, 한국현대춤협회 회장, 한양대 체육대학장 역임 △2007 문화관광부 문화예술상 수상, 1990 대한민국무용제 안무상, 1987 한국공연예술평론가협의회 최우수예술가 선정, 1979 대한민국무용제 우수상 △안무작 『법열의 시』(1971, 김복희·김화숙 현대무용단 창단공연) 『춘향이야기』(1975) 『찡갱맨이의 편지』(1981) 『혼돈』(1988) 『뒤로 돌아 소리를』(1990) 『진달래꽃』(1993) 『꿈, 탐욕이 있는 그림』(1995) 『달과 까마귀-이중섭이야기』(2002) 『삶꽃 바람꽃-두번째 이야기』(2003)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