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운산 송순섭 명창]“판소리, 이대로도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인가?” - ②
[인터뷰 - 운산 송순섭 명창]“판소리, 이대로도 자랑스러운 세계문화유산인가?” - ②
  • 이은영 편집국장 / 정리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08.06 15:5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악계 Mr.쓴소리, 판소리계 자성하고 제대로 공부해야

[①에 이어서]

◆사비 털어 송만갑 명창 동상 설립·박봉술 명창 묘 이장과 현상사업 도와

송 명창은 경제적으로 늘 쪼들리는 생활을 하면서도, 광주시문화상을 수상하여 받은 상금 1천 5백만 원에 사비 5백만 원을 보태 구례에 송만갑 명창의 동상을 세우고, 2006년 박봉술 명창을 '순천문화인물'로 추대하고 순천시로부터 현창사업비 3천만 원을 지원받은 것에 사비 또한 수천만 원을 보태 박봉술 명창의 묘를 순천으로 이장하고, 소리비를 세웠다. 그는 지금껏 단순히 소리에만 매달려온 게 아니라 판소리의 올바른 전승과 송만갑 명창과 박봉술 명창의 소리의 계승 사업을 위해 힘써왔다. 더불어 그는 송만갑 선생이 극찬한 '순천대사습'의 전통을 살려 순천에서 판소리 축제를 반드시 올리겠다는 다짐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달 20일 열린 '득음지설' 리허설 무대 위의 송 명창.

송 명창은 24년을 부산에서 국악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그는 부산 국악회관 마련을 위해 1977년 부산에서 대대적인 서화전시를 개최해 당시 지역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전국을 돌며 대가들로부터 직접 수집한 서화 250여 점을 전시했고 당시 부산시장, 부산지방법원장 부산시 교육감 등 부산의 저명인사들은 모두 참여해 그의 전시에 후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故김지태 삼화그룹 회장은 전시 기획과 의도에 큰 감동을 받고 1천만원의 후원금을 선뜻 내 주시면서 부산국악발전을 위해 참으로 좋은 일을 한다고 격려해주셨다.그리고 1978년에 부산 예술제가 시작되는데 예총에서 부산시 지원금 1천만을 가지고 분배를 하면서 연극 무용 음악 협회만 지원을 하고 국악은 제외시켰다. 그때 부산시와 예총을 쫓아다니며 간곡히 설득하여 1백만원의 여산을 얻어가지고 부산예술제에 참여하였다. 그때 전시회를 해서 예산이 있었기에 예술제에 참여를 했지 그런 돈이 없었으면 부산예술제에 낙오하고 말았을 것이다.

“당시 남농 선생님께서 부산국악회관을 오셔 보시고 ”자네가 이렇게 큰일을 한줄 모르고 작품을 너무 적게 해주었으니 벽에 걸 큰작품을 다시해주시겠다며 큰작품을 보내주셨다.“

▲지난달 20일 열린 '득음지설' 리허설 무대 위의 송 명창.

눌원문화재단이 부산 및 경남 지역의 인재들에게 수여하는 눌원문화상 수상(1983년)을 송 명창은 가장 자랑스럽게 꼽는다. “전라도 놈이 부산ㆍ경남지역문화인들에게 주는 문화상을 받은 것”이라며, “다른 상들도 다 뜻 깊긴 하지만 국악인들하고만 경쟁한 게 아니라 부산경남의 문화예술인들을 통 털어서 주는상을 내가 수상한 것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송 명창은 부산에서 흑의장국,유관순전,‘동래부사 송상현’, ‘순교자 이차돈’선화공주 공쥐팥쥐 , ‘원효대사’, 등을 기획·제작해 무대에 올리자 수천 명 관객의 재창공연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국악계와 언론으로부터 창의적이고 작품성이 높다는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때 했던 대로 지금  하라고 하면 아무도 안할 거다. 당시 단원들에게 출연료는 고사하고 교통비도 주지못하고 고생만 시켰는데…” 그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지난달 20일 열린 '득음지설' 리허설 무대 위의 송 명창.

이런 마음고생을 거치며 부산지역 국악발전을 위해 헌신한 송 명창은  1985년 제5회 대한민국 국악제
를 부산에 유치해 크게 성공한 공을 인정받아 문예진흥원으로부터 1천만원을 지원받아 창극 선화공주는 호화로운 무대를 만들었으며 부산에서 판소리 적벽가 완창을해 성공을 거뒀다.

1986년도 부산시 문화상에 송명창은 단독후보로 추천됐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수상하지 못하는 어이없는일을겪게 된다. 이때 송 명창은 부산시와 심시위원들이 괘씸하기도, 서운하기도해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수상자 자격요건과 심사위원들의 자격에 너무나 모순이 많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부산시 문화상 수상대상자는 부산에서 10년 이상 거주해야 한다'는 자격요건이 전제됐는데, 정작 어이없는 일은 부산시가 4년 전(1982년)에 설립된 부산대 국악과 교수들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한 것이었다. 겨우 3~4년이나 거주했을까 말까한 이들이? 20년 이상 그 고장에서 뿌리내리고 국악발전에 공헌해온 송 명창을 떨어뜨린 것이다.

송 명창은 이 일로 크게 실망해 24년을 살아온 부산을 떠나 광주로 이주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도 부산시문화상을 수상한 국악인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송 명창은 광주로 옮겨와 대통령상 수상에, 인간문화재 선정까지 국악인으로 누릴 영예를 다 누렸으니 오히려 轉禍爲福전화위복으로 부산을뜬 것이 '아주 잘한 일'이 됐다.

광주와 부산의 국악을 자리 잡게 하고, 판소리의 올바른 전승을 위해 힘써온 그는 부산국악관현악단 창단과 부산문화예술제 탄생, 대한민국국악제 부산유치를 성공적 개최에 기여하고, 이후 4년간 광주시립국극단을 이끌며 고경명 장군, 안중근 열사, 유관순, 백범김구 등 우리 역사 속 인물을 소재로 한 창극을 제작, 광주뿐만 아니라 서울, 천안, 창원, 대구, 부산 등 전국을 돌며 광주의 국악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8·9월 창무극 ‘백범 김구’ 앵콜공연에 ‘문화강국 대한민국’ 정신 받든다

“올해 열릴 ‘백범 김구’ 공연에 보다 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이란 메시지를 좀 더 강조하려고 한다” 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자 송 명창은 올해 다시 무대에 오르는 ‘백범 김구’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평상복으로 멋스럽게 양복을 입고 다니는 송순섭 명창.그의 나이를 무색하게 한다.

송 명창은 지난해 용산아트홀에서 열린 창무극 ‘백범 김구’의 예술총감독을 맡았다. 공연이 다 끝나고도 천 여 명의 관객들은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기립박수가 아트홀을 가득 채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고난의 삶을 산 김구 선생의 일생을 창극으로 재현한 창무극 ‘백범 김구’는 백범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전남도립국악단의 창악부, 무용부, 기악부를 주축으로 객원배우까지 모두 100여 명이 출연한 대형 공연이었다. 역사의 거목을 창극화한 만큼 장중한 무대에 어울리게 구성이 견고하고, 비교적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백범의 삶을 웅대하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범 김구’는 8, 9월 국립국악원, 서울대학교 등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판소리 이론가 동리 신재효 선생은 ‘소리꾼은 첫째 인물치례, 둘째 사설치례 그 다음이 득음’이라고 했다." 신 선생이 말한 소리꾼의 덕목을 온전히 갖춘 소리꾼이 송순섭 명창이아닐까 싶다.

송 명창은 인물치례뿐만 아니라 무대복이라 할 수 있는 한복은 물론 평상시 입고 다니는 양복도 멋스럽게 연출해내는 '복장치례'도 탁월하다. 국악계뿐만 아니라 예술계를 통 털어 손꼽힐만한 스타일리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설과 득음에 있어서는 더 이상 말해 무엇 할까? 게다가 학문적 토대까지 갖추려 부단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무대에서도 감동을 선사하는 그는, 우리시대의 진정한 장인이자 스승 그 자체이다. 오랫동안 송 명창의 소리를 무대에서 들을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운산 송순섭 명창은 1936년 전남 고흥 출생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적벽가 예능보유자이다. 현재 동편제판소리보존회 이사장, 운산판소리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경력>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적벽가 예능보유자▲한국예술종합학교 ▲서울대학교 국악과 강사 ▲부산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 강사 ▲한국국악협회 부산지부장 ▲전남도립국악단 창악부장 ▲전남대학교 국악과 강사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심사위원▲ 광주시립국극단 단장 등 역임

<주요 수상>

▲부산 눌원문화상(1983)▲ 전주대사습놀이 명창부 장원 ▲대통령상(1994), KBS 판소리부문 국악대상(1999) ▲광주시 국악상(2003) ▲화관문화 훈장(2009) ▲동리국악상(2009)한민족문화예술대상 국악부문(2010) ▲제비꽃 문화인 명창가상(2011)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