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權道)를 권하다
권도(權道)를 권하다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09.06.11 09:3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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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통령, 이념 넘어 권도에서 실용을 찾아라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가 자기를 알아 줄 군주를 찾아 뜻을 펼치려 주유천하 할 때 일이다. 예(禮)와 도(道)를 논하던 당시였던지라 ‘남녀칠세부동석’(남자와 여자는 7세가 되면 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순우곤 이란 사람이 공자를 만났다.

“선생님, 남녀칠세부동석이면 물에 빠진 여자를 남자가 손잡아 건져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물에 빠진 여자를 손잡고 구해 주는 것은 권도(權道)에 적합한 일이니라”

예외적이고 특수한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게 대처할 줄 아는 재량을 유학에서는 ‘권도’라고 한다. 적절한 임기응변적 수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 유학에서 행위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행위가 규범에 일치하는가를 묻는 규범성과 행위가 상황에 적절했는가를 묻는 적시성(適時性)에 있다. 예의가 규범성을 묻는 개념이라면, 권도는 상황성을 중시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남녀가 물건을 주고받을 때 직접 손을 맞대지 않는 것이 예의라면, 여자가 물에 빠졌을 때 손잡아 건져주는 것은 권도인 것이다. 권도란 이처럼 특수한 상황에서 정당성을 갖는 행위이다. 편법을 뜻하거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문에 <춘추공양전>에선 “권도는 경(經)에 어긋난 뒤에 선한 것”이라 했고, 율곡 이이도 “때에 따라 중용(中庸)을 얻는 것을 권도라 하고, 일에 대응하여 마땅함을 얻는 것을 의(義)라 한다”고 말했다.

김시습도 말하기를 “상황의 변화에 따른 권도와 불변하는 경(經)을 일치시켜 가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있지, 도(道)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는 진리나 특정한 사상과 규범의 획일적인 지배와 우위를 부정하고, 오히려 인간이 진리나 사상이나 규범을 상황에 맞게 능동적으로 실천함으로써 가치창조의 주체가 돼야 함을 의미한다. 진리나 사상이나 규범이 인간을 얽맬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알맞게 운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난 1979년 이래 중국대륙의 변화를 이끈 등소평의 실용주의 개방노선은 그 시기 가장 적절했던 ‘사회주의 권도’의 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등소평은 당시까지 문화대혁명과 홍위병으로 상징되는 ‘교조적 사회주의’로 상처 입고 있던 중국 사회에 시장 경제를 받아들임으로써 한 차원 높은 ‘고도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사회주의를 유지하면서도 경제대국으로 성장, 미국을 넘 볼 정도가 된 오늘의 중국이 그 모습이다. 등소평은 ‘시장 사회주의’로 지칭 받는 실용노선을 취함으로써 자국의 부국강병을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냉전을 해체하고 세계적 데탕트를 이끄는 역할도 했다.

딱 10년 뒤인 1980년대 말에 시작된 소련의 변화가 그것이다. 고르초프의 글라노스트(경제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정치개혁)로 표현된 소련의 변화는 소련 그 자체를 해체했고, 미ㆍ소간 무기경쟁을 중단시켰으며, 독일의 통일을 파생시켰다.

어린 시절 사회주의 공산진영은 무력으로 세계적화를 꿈꾸는 악의 세력이라는 말만 들었기에, 사회주의 진영의 변화가 냉전해체와 무기감축을 이끌었다는 점이 ‘반공교육’에 익숙한 대한민국 국민들로선 혼란스럽겠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오히려 그 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남은 미국(세계평화의 사도요, 선의 세력을 대표한 나라로 알았던)에 의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주도되고, 무기개발이 강화되며, 평화 위기와 경제 위기가 닥쳐 온 것은 지난 10여 년 간 보아 온 그대로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이념을 넘어 실용’을 말하며,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등소평의 실용주의를 연상했다.

등소평이 사회주의 이념보다는 실용노선을 취함으로써 중국을 살린 것 처럼 이 대통령도 오랜 이념대결에 시달린 한반도에서 남북화해를 추구하며,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보다 조화롭게 공생하는 사회를 만들어 줄 줄 알았다. 중국대륙의 ‘사회주의적 권도’에 필적할 한반도의 ‘자유주의적 권도’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겪은 이 대통령의 치세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이 대통령은 이념보다 실용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는 이념갈등을 부추겨 남한 내의 진보ㆍ보수 대결을 격화시켰으며, 남북관계도 후퇴시켜 개성공단의 위기 등 경제해법도 어렵게 하고 있다.

심지어는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관계까지 유발됨으로써 ‘제2차 한국전쟁론’까지 시중에 나돌고 있다.

등소평이 사회주의를 전향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중국을 살리고 세계적 데탕트를 견인한 ‘실용적 권도’를 행했듯, 이 대통령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전향적으로 운용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살리고 한반도 평화와 세계평화에 기여할 ‘실용적 권도’를 행할 수는 없을까?

그런 철학과 역사의식이 이 정부에는 없는 것일까? 묻고 싶다. 그리고 권하고 싶다. 경제를 살리며 나라를 살리고, 평화를 담보할 진정한 실용주의를 위해 권도(權道)에 적합한 정치를 펼칠 것을 진심으로 권한다.

지금의 정부가 이념을 넘어 권도에 적합한 큰 정치를 펼칠 때 사회통합도, 남북화해도, 북핵문제도, 경제도, 평화도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말했던 ‘실용’을 ‘권도’에서 찾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서울문화투데이 권대섭 대기자 kd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