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죽어도 제 작품과 자존심, 헐값에 안 팔죠
굶어죽어도 제 작품과 자존심, 헐값에 안 팔죠
  • 편보경 기자
  • 승인 2009.06.11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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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의 절대미를 종이로 재현하는 지승공예가 조은실 씨

“지승공예를 하면서 인생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인생은 지름길이 없잖아요. 절대 앞질러 갈 수도 없고 남이 해줄 수도 없지요. 차분히 시간에 충실해야지요.”

국내에 제대로 알려져 있기나 할까. 하지만 30여년간 한결같이 그 길을 지켜온 이가 있다. 서울 마포구 성산2동에서 자그마한 공방을 운영하면서 지승공예에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는 조은실 씨(48)가 그 주인공.

지승공예란 일정 크기의 너비로 한지를 자른 다음, 꼬아서 엮어 옷감을 짜듯 바구니, 망태, 상, 요강, 옷 따위를 만들고 그 위에 옻칠을 입혀 사용하는 공예를 말한다.

닥종이를 재료로 하는 지호공예, 한지로 꽃이나 새 모양을 만들거나 한지에 당초문이나 민화 등을 그리는 지화공예, 한지를 여러 겹 덧발라 반짇고리 등을 만드는 전지공예 등과 함께 한지공예의 한 분야이다.

지승공예는 옛 사대부 양반들이 낡아서 못 쓰는 책과 문풍지를 사용하여 만들었기에 주로 남자들이 쓰는 물건들이 많이 전해진다.

“충남무형문화재였던 고 김영복 선생이 저희 증조할아버지셨어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가 만든 작품들을 많이 접해왔었죠. 막연한 호기심을 가졌었는데 언젠가 한번 증조할아버지께서 작품을 직접 만드시는 광경을 보고는 저도 지승공예에 빠져 버렸어요. 그때가 고등학생일 때였죠. 너무 좋아서 밤을 새서 배우곤 했습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소위 ‘건설적인 것들’에 한창 시간을 투자해야 할 젊은 나이에 ‘한지 줄이나 꼬고 있는’ 모습을 주위 사람들이 한심해했다는 것.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딸의 손재주를 알아보고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셨단다. 대학에서는 도자공예를 전공하고 맛보기 식으로 염색도 배웠다. 그런 것들이 모두 지승공예의 바탕이 되어 작품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작품, 소더비 경매 내놓을 꿈꿔

그의 작품들은 꼭 그처럼 수수하면서도 꾸밈없는 모습을 닮았다. 작년에는 전승공예대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국내 전통 공예를 지켜가는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경합을 벌이는 자리인 데다 재료에서부터 제작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평가하기 때문에 이만저만 까다로운 대회가 아니란다.

“몇 년 전부터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절대미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이것을 지승공예로 재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졌죠. 자그마치 2년이 꼬박 걸리는 일이었어요. 절대미인 그 곡선을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죠. 그렇게 작품을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뿌듯했지만 예상 밖으로 수상까지 하게 되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 수제자인 신지은씨(우측)와 함께

한지를 꼬은 줄로 청자를 만들려면 좌우 대칭과 높이들을 다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여간 섬세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조 씨는 작년 수상을 계기로 한국 특유의 단아한 곡선미가 담긴 작품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했다.

조 씨에게는 청출어람과 같은 15년 제자 신지은 씨가 있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작품 활동에만 전념해 온 조 씨에게는 친동생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수제자다.

 지승공예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기 때문에 홍익대 근처에서 금속공예숍을 운영하면서 연이 닿게 됐다. 함께 운영하는 숍에서 사부는 전통을 지켜가고 제자는 지승공예를 현대적인 시선으로 풀어낸다.

작업실 한편에 걸려 있는 지승공예로 만든 드레스를 가리키며 조 씨는 제자 자랑에 여념이 없다.

“저는 지승으로 옷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지은이가 의상 공부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모두 끈으로 이어지면서도 사람이 입을 수 있는 드레스를 만든 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요. 지난 2006년에는 뉴질랜드에서 열렸던 wow(world of wearable art)대회에서 수상도 했어요. 그때 귀국해서는 인터뷰 요청도 많이 들어오고 엄청 주목을 받았었죠.”

옆에서 듣고 있던 신 씨가 이번에는 스승 자랑에 나선다.      

“선생님은 한 작품을 만들 때 맘에 들 때까지 하는 분이세요. 1밀리만 틀려도 다른 작품이 된다고 늘 말씀을 하시죠. 저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 정도는 해야 장인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작품을 대할 때의 진지함, 집중력을 선생님께 많이 배웁니다.”

스승과 제자는 언젠가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소더비 경매에 내놓을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조 씨는 지승공예를 지켜가는 것이 녹록치만은 않다고 했다.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금속공예를 그만두니 생계수단이 막막한 것이다.

◆ 인간문화재 준비 차곡차곡

뉴질랜드 대회에 무작정 짐을 싸들고 제자 지은씨와 함께 갔던 것도 외국에서 주목을 받고 돌아오면 어딘가에서 후원이라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해서였다. 국내 전통공예 판은 학연, 지연이 판을 치고 있어서 줄이 없으면 지원받기도 쉽지 않은 까닭이다.

“작품만 연구하고 다음 세대가 이 공예를 잘 이어갈 수 있는 방안도 연구하고 싶은데 생활이 너무나 어렵지요.”  

또 사람들이 지승공예로 만든 작품의 가치를 잘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판매가격을 제시하면 무조건 불신의 눈빛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조 씨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며 만든 작품과 자존심을 헐값에 넘길 생각은 없다 했다. 굶어죽더라도 그렇게는 못 한다고 했다.

“작품 활동, 비장하게 하고 있어요. 사실 힘들다는 말은 잘 안 하는데 너무들 모르시는 것 같더라고요.”

지승공예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해 대중화를 위한 노력도 하고 있다.

“공예를 배우고 싶다는 문의는 많이들 해 오세요. 그래서 일단 액세서리 제작 같은 작은 것으로부터 접근해 보려고 해요. 지승공예는 너무나 정직한 공예예요.

사람의 내면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해주는 예술이지요. 산만한 아이들이 지승공예를 배우면 차분해지고 성인이 도를 닦는 데도 아주 좋은 것 같아요.

마치 인생 같지요. 적당히 넘어갈 수도 없고요. 그래서 매력이 있습니다. 지승공예로 만든 작품은 세월이 지나면 더 멋있어져요. 썩지도 않고 때 묻은 게 더 예쁘지요. 시간이 지나도 한결같은 지승공예처럼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 템포 느리게 말이죠.” 

죽으면 자신의 몸에서도 아마 사리가 한 바가지는 나올 거라며 농담을 하는 그는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젊음의 기운’을 다하여 작품 활동에 전념할 계획이라고 각오를 내비친다.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면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데 내 작품들도 그런 색깔이 나올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그는 자신이 점점 증조할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 같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이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바랐던 바로 그 모습.

“앞으로도 다양한 형태의 청자를 만들어 보려고 해요. 제 작품은 전부 제 손으로 마무리하고 싶어 옻칠도 배울 계획입니다. 전시회도 열고 싶습니다. 또 인간문화재가 될 준비도 차곡차곡 해가려고 합니다.

지수와 같은 젊은 지승공예가들이 편안하게 활동할 수 있는 장도 만들고 싶고요.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랑스럽고 값진 한국의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서울문화투데이 편보경 기자 jasper@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