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나온책] “말로 쓰여진 것 모두가 시는 아니다”
[새로나온책] “말로 쓰여진 것 모두가 시는 아니다”
  • 이소리 논설위원
  • 승인 2012.09.1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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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민영 첫 문학비평집 <격변의 시대의 문학> 펴내

“이 평론집의 제목을 <격변의 시대의 문학>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때가 우리 사회가 크게 달라지며 요동치던 ‘격변기’였기 때문이다. 1960년 5월의 쿠데타 이후 정권을 잡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에 자신이 거느리던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암살되고, 잠시 동안의 ‘서울의 봄’을 거쳐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전두환 군사집단이 그곳까지 몰려가서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것이 바로 5.18 광주항쟁의 시작이었다.” -‘머리말’ 몇 토막

고은(79), 신경림(76) 등과 함께 우리나라 참여시단을 이끌고 있는 원로시인 민영(78)이 문학비평집 <격변의 시대의 문학>(푸른사상)을 펴냈다. 이 문학비평집에는 1920년~1980년대에 걸쳐 나온 시집들이 품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현상을 꼼꼼히 다룬 서평들로 빼곡하다. 그 시대 시인들은 과연 어떤 고민을 하며 어떤 시를 썼을까.

이 책은 모두 4부에 시인들이 펴낸 시집에게 바치는 ‘채찍과 당근’을 닮은 서평 23꼭지가 따가운 가을햇살에 저도 모르게 톡톡 터지는 깨알처럼 촘촘하게 박혀 있다. 때론 은근슬쩍 꼬집기도 하고, 때론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론 ‘빼어나! 빼어나!’ 박수를 짝짝짝 치기도 하면서.

‘시와 인간의 구제’, ‘두 권의 노동시와 두 권의 아리랑’, ‘시대를 초월하는 서정의 힘’,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과 소망’, ‘1950년대 시의 물길’, ‘1970년대 전기의 시인과 시’, ‘1950년대 시의 물길’, ‘1970년대 전기의 시인과 시’, ‘그 겸허한 노년의 세계’, ‘희망을 지키는 파수꾼의 노래시’, ‘지뢰꽃 마을의 시인들’ 등이 그것.

시인 민영은 ‘머리말’에서 “이 평론집에 수록된 서평은 1987년 가을에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 계신 백낙청 선생 권유로 쓰기 시작한 글”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는 “그 이전에 나는 시 쓰는 것이 내 천직이므로 청탁이 오는 대로 정성껏 써 보냈지만, 남이 쓴 시를 평하는 것은 내 소임이 아닌 것 같아서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고 속내를 털어 놓았다.

그는 “갑자기 계간지 가을호에 서평을 쓰지 않겠느냐는 청을 받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번 써보시오’ 하는 말을 듣고는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하고 붓을 들었다”며 “때가 때인 만큼 우리가 놓인 시대적 상황과 내 눈에 비친 것을 노골적으로 다 표현할 순 없었지만 서평을 무엇에 초점을 두고 써야 하는지를 늘 잊지 않으려고 힘썼다”고 적었다.

피로 쓴 소박한 시가 상처 후비는 날카로운 칼날

“가끔 시 쓰는 친구들끼리 모이면, 문익환의 시의 기교적인 미숙을 거론하는 일이 있다. 그의 결곡하고 치열한 감정(사상이라고 해도 좋다)이 앞뒤가 딱 짜인 기교로써 표현됐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필자도 그 의견에는 어느 정도 생각이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17쪽, ‘시와 인간의 구제’ 몇 토막

이번 평론집 제1부는 시인 민영이 1978년부터 1992년까지 <창작과비평>에 실었던 서평들이다. 문익환 시집 <꿈을 비는 마음>에서부터 장이두, 김기종, 김종삼, 양정자, 박남준, 강세환, 정일남, 김해화, 박세현, 박상률, 이성선, 조정권, 호인수, 김남주, 마종기, 김명수, 김규동, 강인한, 정세훈 등이 펴낸 시집들이 그것.

시인 민영은 인용 글 끝자락에서 시인 문익환 목사가 쓴 시에 대해 ‘이런 생각도 해본다’고 했다. ‘이런 생

▲시인 민영
각’은 무슨 생각일까. 문익환은 살아생전 스스로 ‘순수예술론자’로 말하곤 했다. 그 순수는 “모든 비순수와 담을 쌓고 지내는 빛바랜 순수가 아니라 모든 불순한 것을 불살라 버리는 불길의 순수”(<꿈을 비는 마음> ‘후기’)다.

시인 민영은 이에 대해 “시는 말로써 씌어지는 것이지만, 말로 쓰여진 것 모두가 시는 아니다”고 못 박는다. 그는 문익환 시에 대해 “허식하는 말에 사로잡힌 직업적인 시인들에게는 그(문익환)의 피로 쓴 소박한 시가 상처를 후비는 날카로운 칼날일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곧 문익환 스스로 “이 나라의 억눌린 민주주의와 민중을 행동으로써 구제하기 위한 속죄양과 같은 사명을 띤 시인”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청마 유치환,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청마는 생명력에 넘친 다작형의 시인이다. 그는 1950년대 이전에 낸 4권의 시집(<청마시초> <생명의 서> <울릉도> <청령일기>)으로 이미 남성적인 웅혼한 시세계를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종길은 그를 가리켜 ‘대가다운 풍격을 갖춘 시인’이라고 평했다.” -115쪽, ‘1950년대 시의 물길’ 몇 토막

제2부에는 ‘1950년대 시의 물길’에 이어 ‘1920년대의 시인과 시’, ‘1950년대 전기의 시인과 시’, ‘1970년대 전기의 시인과 시’에 대한 서평이 눈을 번득이고 있다. 시인 민영은 그 가운데 ‘청마 유치환’이란 작은 제목을 붙인 글에서 “청마는 기질상 이 사회의 부조리도 외면하지 못하는 시인이라 이승만 정권의 강압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고 되짚었다.

청마 유치환은 시집 <생명의 서> ‘서문’에서 이렇게 적은 바 있다.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만약 나를 시인으로 친다면 그것은 분류학자의 독단과 취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요, 어찌 사슴이 초식동물이 되려고 앨 써 풀을 씹고 있겠읍니까”라고 밝힌 바 있다. 시인 민영은 이에 대해 “굳이 시인의 장인의식을 부정하고 시적인 꾸밈을 부정한 거칠지만 고양된 시편들을 보여주었다”고 썼다.

시인 민영은 청마가 쓴 시가 오늘날 독자들 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도 한 마디 툭 던진다. 그는 “현실에 저항한 그의 시 정신에도 불구하고 시에 사용된 무절제한 한자의 범람이 한글세대인 젊은 독자들에게 경원하는 마음을 일으켰고, 시적 기교를 무시한 결과 초래된 함축미의 부족이 독자들의 예민한 감각에 읽는 재미를 못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못 박았다.

저승 갈 때 입는 옷에는 호주머니가 없다

저승 갈 때 입는 옷 말입니다

그 옷에는

호주머니가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정말 다행입니다

-186쪽, ‘수의’, 이선관 시집 <우리들의 손에는>에서

제3부는 시인 서정주, 양성우, 이선관, 정세훈, 안금자가 펴낸 시집에 대한 평론과 김학철 산문집에 대한 평론, 한하운에 대한 평론이 실려 있다. 제4부는 초정 김상옥과 시인 천상병에 대한 평론과 함께 ‘지뢰꽃 마을의 시인들’(<강원작가> 창간호), ‘시인, 그리고 고향’(<숨소리> 2003, 여름)을 되짚고 있다.

시인 민영이 펴낸 문학비평집 <격변의 시대의 문학>은 말 그대로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아냈고, 살아온 시인들이 펴낸 시집들에서 시인이 그 참혹한 시대와 어떻게 맞서 살아야 하는지, 왜 그 시인들은 스스로 사는 시대를 벗어나 요상한(?) 시를 썼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이 책은 시로 읽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이자 시집으로 읽는 시인들 자화상이다.

시인 민영은 193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57년 <현대문학>에 시 ‘동원(童願)’이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단장(斷章)>, <용인(龍仁) 지나는 길에>, <냉이를 캐며>, <엉겅퀴꽃>, <바람 부는 날>, <유사를 바라보며>, <해지기 전의 사랑>, <방울새에게>가 있다. 시선집으로 <달밤>(창작과비평사, 2004), 옮긴 책으로 <비단 버선 신은 발이 밤새도록 시립니다>를 펴냈다. 1983년 ‘한국평론가협회 문학상’, 1991년 제6회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이소리 논설위원 sc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