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평우의 우리문화 바로보기]용산 미군기지! 꾸역꾸역 채우려거나 비우려거나 치유하려고 들이대지 마라.
[황평우의 우리문화 바로보기]용산 미군기지! 꾸역꾸역 채우려거나 비우려거나 치유하려고 들이대지 마라.
  •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 승인 2012.09.2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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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용산은 용과 같은 형체의 산줄기로부터 유래되었다. 즉 한양도성 서쪽 무악의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약현(만리동 입구에서 충정로3가 넘어가는 곳에 약초를 재배하던 밭이 있어 약초밭, 약밭, 약전, 약전현, 약현으로 불렸다.

지금의 중림동과 봉래동2가)과 만리현(세종대 문신 崔萬里가 살았던 곳에서 유래)을 지나 서쪽으로 한강변을  향해 구불구불 나아간 모양이 마치 용이 몸을 틀어 나아간 것 같고, 또 한강변 지금의 용산구와 마포구 경계에서는 용이 머리를 등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산은 한양도성 외곽에서 교통과 물류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어쨌거나 도성의 외곽에 있었다. 그리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용산은 서울의 한복판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섬 아닌 섬이었으며, 지구상 가장 문어발식 군대가 많은 미합중국이 주둔비용을 한 푼도 안내며 온갖 만용을 부리며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수도 한복판에 외국군의 대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나라는 오직 한국뿐이다. 용산 미군기지는 남산공원의 1.2배, 서울대공원의 3배, 어린이공원의 6배, 서울 고궁을 다 합친 것이나 여의도 전체보다도 더 넓다. 또한 용산 미군기지는 뉴욕의 자랑인 센트럴 파크에 버금가고, 런던의 자랑인 하이드파크의 2.4배에 이르는 넓은 땅이다.

이 땅이 이제야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다. 그런데 주인을 만나기 전부터 객들이 서로 나눠먹겠다고 난리다.
용산은 고려 말 몽고군의 병참기지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을 침략한 왜군의 보급기지가,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오장경 부대 3천 명의 병력이 주둔했으며, 청일전쟁 때는 일본 육군 6천 명이 주둔한 이후 일제의 세력 확장의 요충지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 주한미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조선시대 교통의 중심지인 용산은 서강, 마포, 두모포, 송파와 함께 한강의 수운을 통해 전국 물자가 집결한 장소였으며, 숭례문(崇禮門)과 동작진(銅雀津)을 연결하여 시흥, 군포, 수원 화성으로 가는 정조의 남행길이었다. 즉 조선의 핵심 도로였던 것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미24사단은 일본 기지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저항 없이 용산에 정착하게 된다. 미군의 용산 점령은 서울 시민 생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군부대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물자와 미8군 무대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 대중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1년 미군 골프장이 한국 측에 반환됨에 따라 반환부지에 용산 가족공원이 조성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이전했다. 1993년에는 메인포스트의 일부가 반환되어 1995년 전쟁기념관이 건축되었다.
현재의 용산 미군기지는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기념관이 위치한 블록이 메인포스트(Main Post)로 중앙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사우스 포스트(South Post), 북쪽으로 캠프 코이너(Camp Coiner)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용산 미군기지안에는 시대별 많은 문화재들이 존재하며, 발굴조사를 해야할 곳도 여러 곳이다. 현재 용산 미군기지 안에 있는 문화재를 살펴보면 고려·조선시대 유물·유적터 7곳과 일제 때 지어진 업무·주거용 건물 226동, 교량·석축 6개, 문인석 10여기 등 문화재 250여점이 있다.

특히 캠프 코이너 북동쪽의 작은 구릉 지역에서는 조선시대 제천행사를 열었던 남단(南檀) 터가 발견됐다. 남악해독단(南嶽海瀆壇) 또는 산천단(山川壇)으로 불렸는데 국가의 안전과 발전의 기원, 즉 국태안민(國泰安民)을 기원하기 위한 제단인 것이다.

기지 내 곳곳에선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문인석(文人石) 10여기가 확인됐다. 본래 기지 내에 있던 묘지 앞에 세워졌던 이들 문인석은 도로 부근 등지로 옮겨져 조경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부 석상은 파손되거나 페인트로 훼손된 상태다.

또 사우스 포스트에서 발견된 군용 감옥은 1908년 완공된 서대문형무소(사적324호)보다 앞선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건물은 현재 미군 의무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또 용산 미군기지 내에는 미확인 되어 반드시 발굴조사를 통해 유적의 성격을 파악해야 할 곳이 다수 있는데 이처럼 용산 미군기지내와 주변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문화재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300년 넘게 그 자리에 서있으며 지켜봤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보다 못한 존재이다. 이 자리에 무엇을 꾸역꾸역 채우려거나 비우려거나 치유하려고 들이대지 마라.

우선 그냥 두고 몇 십 년, 아니 몇 년 이라도 그냥 두고 좀 놔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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