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일본속보]'비상(飛翔)'하는 한일 관계를 기원'한일 축제 한마당' in Tokyo] 개최(1)
[이수경의 일본속보]'비상(飛翔)'하는 한일 관계를 기원'한일 축제 한마당' in Tokyo] 개최(1)
  • 이수경 교수(도쿄가쿠게이대학)
  • 승인 2012.10.0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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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 영원의 김옥균 박유굉 등 구 한말 조선인의 발자취를 돌아보다

 

▲한일 축제 한마당 축제 팜프렛

2012년도 개천절을 맞이해 도쿄에서는 예년보다도 더 뜨거웠던 한일 관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다가서기 위해, 서로가 '비상(飛翔)'하는 한일 관계로 거듭나자는 선언과 더불어 [한일 축제 한마당 2012 in Tokyo]의 전야제가 9월28일 금요일 저녁 도쿄 시내의 호텔 뉴 오타니에서 행해졌다.

종군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역사 인식 문제 등 그동안 양국 정부들이 피해왔던 한일 관계의 과거사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한일 교류가 점점 얽혀져 가는 상황 속에 서로 현실을 직시하며 대화와 교류를 통한 신뢰 구축과 다가서기를 위한 시민의 만남의 장을 열어야 하건만 양국 정치가들이나 언론은 각국의 대선이나 총선을 의식하여 국민 감정만 자극하며 여론 몰이를 하는 상황이니 이번 [한일 축제 한마당 2012 in Tokyo]는 조금이라도 서로 만남의 터를 마련하려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신각수 주일 대사의 리셉션 초청장과 다음날의 [한일 축제 한마당 2012]의 초청장이 한국 대사와 사사키 미키오 위원장 이름으로 왔기에 필자는 리셉션이 열리는 9월 28일 아침에 집을 나섰다.

올 해는 학교 업무에 쫓기다 보니 중국과 필리핀 국제 포럼 출석 외에는 도쿄 시내를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모처럼의 외출에 볼 일을 한꺼번에 보려는 의도로 일찌감치 서둘렀다. 지난 8월 중순에 1학기 성적 채점과 현역 교사들 대상의 집중 강의를 마친 뒤, 뜨거운 땡볕에 도쿄 시내의 아오야마 영원(青山霊園, 넓은 공원 묘지라고 생각하면 된다)과 죠우시가야 영원(雑司ヶ谷霊園)을 다니다가 과로로 앓는 바람에 아오야마 영원에서 확인해야 할 묘비를 모두 확인하지 못 한 터라, 아자부의 총영사관에 들렀다가 아오야마 영원과 역도산이 잠들어 있는 이케가미 혼몬지(池上本門寺)를 다녀 왔다.

▲ 총영사관 대선 투표 관련 홍보 사진

아자부의 총영사관 입구 쪽에는 외국 공관의 보호 차원인지 일본의 경찰 기동대 버스가 앞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별다른 우익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영사관에는 올 봄의 총선 보다는 대선의 재외 신고 신청에 대한 다양한 포스터가 붙어져 있었다. 필자도 재외 선거 신고서를 받은 뒤, 전철을 몇 번 갈아타고 아오야마 영원 ([靑山 霊園])으로 갔다.

아오야마 영원에서 만난 비극의 동포와 일본 근대사의 인물들 

▲아오야마 영원

필자는 역사학에 흥미를 가지면서 부터 사람들의 발자취가 깃들여져 있는 곳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무덤을 찾는 습성을 갖게 되었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세계 각지의 공원 묘지나 성당, 사찰, 피라밋 등을 다니며 수많은 역사 속의 인물들이 살다 간 흔적에 젖는 것이 이젠 습관이 되었다. 게다가 아오야마 영원에는 한국과는 엇갈린 입장이 될 수 밖에 없는 근대 제국주의 일본에서 화려히 살다 간 인물들이 많기에 묘비에 새겨진 유족이나 관계자의 글을 읽으면 착잡하고도 허망하기 조차 한 삶을 생각하기도 한다. 공수래 공수거… 하늘을 찌를듯한 권세를 누렸던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이 사회가 과연 그들의 이상이었을까? 100년이 넘도록 역사 청산도 제대로 못하는 외교의 걸림돌을 만든게 원대한 그들의 꿈이었던가?

지금은 무덤 앞에 꽃 한송이 조차 놓아주는 사람이 없건만 이 공원 묘지의 한 구역에 묻히려고 그토록 타민족을 지배하고 숱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던가??? 물론 필자의 억지 같은 회의적인 발상도 하면서 이번엔 정문 쪽이 아닌 일본 학술 회의 쪽 뒷문으로 아오야마 영원에 들어갔다.

▲아오야마 영원 외국인 묘지 역사안내판

도쿄 시내에 자리 잡은 아오야마 영원은 1874년에 공동묘지로 되었다가 1926년에 일본 최초의 공영 묘지가 된 곳으로 현재는 도쿄도가 관리를 하는데, 26만 평방 미터의 넓은 토지에는 일본의 주요 인물들은 물론, 한국 근대사와 관련된 수 많은 일본 정치가들이 묻혀 있고, 외국인 묘지도 설치되어 있다.

그 속에는 험난한 시대에 비상한 머리로 태어나 시대를 개척하려고 한말의 개화파가 되었다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민씨 정권에 의해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뒤,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된 김옥균(본 묘는 충남 아산 영인면에 있다)을 기리는 거대한 묘비가 세워져 있다.

▲김옥균 묘

바로 그 묘비 뒷켠에는 조선 말기인 1882년에 수신사 일행의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게이오의숙(慶応義塾)에 입학 후, 1886년에 일본 육군 사관학교 한인 입학생이 되지만 재일 유학생들에 대한 조선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자 조국의 국세 퇴락과 망국이 되어감을 한탄하다 1888년에 권총으로 자결을 한 박유굉(朴裕宏)의 묘도 있다.

주변에는 그 외 서양인 전도사나 학자등 일본에서 활약하다 묻힌 외국인들의 묘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근처를 걷다 보면 일본의 근현대사와 더불어 이 땅에서 살다 간 외국인들의 역사도 느낄 수 있다. 지난 8월의 아오야마 영원 및 죠우시가야 영원에 대해서는 내용이 방대한 인물사가 되기도 하고, 소개하고픈 그들의 에피소드도 많기에 별도 시간이 허락할 때에 소개를 하기로 한다.

아오야마 영원에 대한 좀 유니크한 소개를 하자면, 일본 근대사 최대의 우익단체였던 흑룡회의 우두머리이자 한국 병탄을 조정하며 대륙 낭인이나 숱한 일본 우익들에게 거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토우야마 미츠루(*頭山満;토우야마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기도록 종용했던 일진회 및 회장 이용구를 조종한 흑막으로서 우익의 거물이었던 우치다 료헤이(内田良平)의 스승이다.

▲토우야마 묘

아이러니컬 하게도 김옥균은 갑신정변 이후에 고베에서 그에게 원조를 받게 되고, 김옥균이 죽은 뒤의 아오야마 묘지 조성에도 토우야마가 지원을 한다.

참고로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이 흑룡회에 물심양면의 지원으로 그들과 친했던 일본 제국 의회의 젊은 국회의원이었던 오우미야 에이지에게 안중근은 감옥에서 사형 직전에 동양평화론을 부탁한 편지를 보냈고, 오우미야는 안중근이 사형 당한 날에 매년 제사를 치뤄줬다.)의 묘는 일본의 사상가로서 경찰청 관료들이 묻혀 있는주변에는 한국 근대사와 관련된 일본의 정치가들, 조선 총독 및 관료들 등이 잠들어 있다.

 

그런 반면, 한 구석에는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의 교수였던 주인 우에노 히데사부로(上野英三郎)를 일편 단심으로 따르다 1925년에 주인이 강의 중에 뇌익혈로 사망한 뒤에도 주인이 오가던 시부야 역에서 그를 계속 기다렸던 충견 하치(ハチ)의 보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우에노의 묘 안에는 충견 하치의 묘도 세워져 있다.

 

물론 이 충성스런 개를 기억하기 위해 지금도 시부야 역에는 하치공이라는 동상이 명물로 세워져 있고, 교과서 등에도 소개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결초보은의 마음이야 말로 인간 관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신의이다.

사람이 개보다 못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요령주의로 이해타산만 앞서서 사람을 간단히 배신하는 자들을 보다 보면 비록 개이지만 우직한 믿음과 의리를 가지고 상대에게 충실한 개가 되려 뒤통수나 치고 간사한 그런 사람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8월에 필자가 확인했던 인물들의 묘에는 우리 한국사와 관련된 인물들이 숱하게 많고, 그에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 또한 방대하기에 소개를 하려면 일정한 기력과 시간이 확보되어야 하므로 다음 기회를 약속하고, 여기서는 9월 28일에 필자가 확인하고 온 묘만 소개하기로 한다.

김옥균과 박유굉, 박무덕, 그리고 잊지 못할 미우라 고로

▲박유굉 묘

한일 근대사를 전공하는 제자와 함께 다시 김옥균 추모비를 찾았다. 8월의 뜨거운 태양보다도 선선한 초가을 날씨라서 약간 우중충한 가을 하늘이었지만 나름대로 걸어다니기에는 시원했다. 외국인 묘지에 세워진 김옥균의 큰 묘비에는 박영효 찬문(글을 지음)과 이준용(흥선대원군 손주)이 글을 적었다고 적혀져 있다.
원래는 묘비를 사방으로 둘러 싼 금속 체인의 장식이 있었으나 지난 8월이나 이번에 갔을 때는 그 체인의 일부는 녹쓸어서 끊겨져 있었다.

격동의 근대 제국주의 시대 속에 번민하다 처참히 죽어간 김옥균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묵도를 한 뒤, 그 묘비 뒤 쪽 건너편 11시 방향에 피어있는 무궁화 꽃 나무 옆에 세워진 자그마한 비석 앞으로 갔다. 21세의 청년 박유굉이 얼마나 슬프게 조국과 자신이 놓인 상황을 한탄하며 목숨을 끊었을지 그의 고뇌가 전해져 오는 [嗚呼 朴裕宏之墓]의 글이 눈에 들어왔고, 묘비 뒤에는 [타루비(墮淚碑)] 라는 세 글자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근대의 격랑기 속에서 일본의 첫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들어가 최신 병법을 배워서 다가올 조국에 대비하려 했던 청년은 결국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아오야마에 잠들어 있으니 그 넋은 얼마나 더 떠돌아야 할까?

▲박무덕 도고시게노리(東郷茂徳)묘

왠지 숙연해지는 기분으로 스쳐가는 가을 바람을 가르며 길 건너 1종으로 분리된 구역으로 갔다. 1895년 10월에 명성황후(당시 민비) 살해의 지도를 하기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획책으로 당시 동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 정권 하의 꼭두각시가 되어 조선에 파견되어 일본 정부의 사혹대로 그녀를 살해 후, 히로시마 지방 재판소서 무죄를 받았던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의 묘로 갔다. 필자가 미우라의 수기 다섯 권을 비롯해 미우라의 명성황후 살해 과정과 관련되는 상황을 연구한 적이 있기에 꼭 가보고 싶었는데 지난 번에는 다른 근대 인물들의 묘를 뒤지다가 체력 부족으로 미뤄놓았던 터이다. 미우라의 묘는 다른 사람들의 묘와는 달리 한 구역 자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미우라 고로 묘
한국과 깊이 얽혀있는 야마구치현 출신자이자 송병준이 은거했던 하기에서 태어나 나중에 관수장군으로 불리는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는 유럽에서 병역제도를 배웠고, 일본의 징병제를 만든 동향 출신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대립하게 된다. 학습원 대학의 학습원장, 귀족원 의원등을 역임하였다가 1926년에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렇게 오래 살았건만 명성황후를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존재로 인해 그 삶을 제대로 살지도 못한 채 처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런 갈등 탓인지 노후에는 불교에 몰입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미우라의 묘를 보고 있자니 한일 근대 관계를 복잡하게 만든 장본인의 영혼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년이 넘도록 해결은 커녕 한국인 가슴에 만행을 상기시키는 명성황후 살해 사건과 그 후의 한국 병탄, 그가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배출한 수 많은 군인들이 폭압 제어라는 명목 하에 죽인 숱한 한국의 항일 의병들의 비명… 군부에 의해 전쟁 이라는 명목하에 공적 대량 살상을 반복해 온 인류사의 야만성이 흐릿한 가을 하늘과 더불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여기 까지 왔으니 한 사람 더 확인하고 싶었던 인물이 있었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