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윤성주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국립무용단 전통레파토리, 업그레이드 해 나간다
[인터뷰-윤성주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국립무용단 전통레파토리, 업그레이드 해 나간다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11.0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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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수에게 연습은 당연한 덕목"

     국립무용단은 국립레퍼토리시즌 첫 공연으로 '도미부인'을 지난 9월, 20년 만에 무대에 다시 올리며, 레퍼토리 공연의 성공적인 첫 시작을 알렸다.

     전통 감성을 지키되 시대에 맞게끔 업그레이드해 나가는 방식으로 전통 레퍼토리에 좀 더 신경을 쓰겠다고 밝힌 윤성주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그는 국립무용단원 출신으로, 한국무용수에서 보기 드문 행정가이다.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무용인을 위한 상해지원, 직업전환재교육,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해 크게 힘썼고, 특히 오는 11월부터 시행되는 예술인복지법의 기초 토대를 만들었으며, 또한 무용수 인력시장인 '댄서스잡마켓'을 개최해, 제자라면 스승의 아래 안주해야만 하는 게 당연시되던 국내 무용수들에게 보다 폭 넓은 선택권과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오는 11월 16일부터 1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되는 '그대, 논개여'를 앞두고 연습에 여념이 없는 단원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한 어느 날, 예술감독실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현재 국립무용단 예술감독(2012.6.~)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 학·석사 △2007-2010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제1대 이사장 △최현우리춤원 회장 △JOO댄스컴퍼니 예술감독 △국립국악중고등학교 교사 △1979-1994 국립무용단 단원

-지난 6월부터 국립무용단의 수장을 맡고 있다. 늦었지만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
“이렇게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을 줄 몰랐다.(웃음) 예술적 마인드를 가다듬고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나마 내가 행정 업무에 경험이 있어서 자신이 있다. 실은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아이들 성향이 각자 다 다르고, 같은 질문에 다양한 대답이 나오는 상황이 참 흥미롭더라. 그런 면에서 난 여러 개의 의견을 조율하는 게 내겐 잘 맞았다. 무용가들은 대게 자기 포커스에만 집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렇듯 다양한 걸 하나로 묶어 조율하는 것 역시 무용가의 역할이란 생각이 들더라. 우연한 기회에 이렇게 국립무용단 예술감독을 맡게 돼 정말 행운이라고 본다.”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게 ‘우연한 기회’라고 했는데, 이와 관련한 어떤 사연이 있는 건가?
“공채공고가 나왔을 때, 서류를 준비해볼까 했지만, 여러 선생님들도 많이 나오시는데, 내가 낄 자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당시 친정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셨다. 내가 뭔 출세를 얼마나 하려고 가정을 등지겠나 싶어서 공채 준비를 중도에 그만두고 어머니 옆을 지켰다. 몇 달 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상을 치루고 나니 재공모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머니가 30년 동안 병상에 계셨었는데, 어머니 그렇게 보내드리고, 여러 심경을 정리하다보니, 다시 이렇게 공모 기회가 온 건 어머니의 선물이란 생각에 용기가 났다. 그렇게 다시 서류를 준비하게 됐고, 생각지도 못하게 예술감독을 맡게 된 거다.”

-국립무용단은 창작 작품보다는 전통 레퍼토리 작품에 더 주력하겠다고 했다.
“전통레퍼토리를 그대로 무대에 올리겠다는 건 아니었고, 좀 더 다양성에 집중하겠다는 뜻이었다. 무조건 창작 작품만 고집하면 우리의 고전 작품이 빛을 못 보는 것 같다. 무용 역사 50년을 뒤돌아보니 우리 작품 자산이 엄청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걸 그냥 다 묻고 새로운 걸 또 만들고, 만들고 하면서 왔던 거다. 우리 것을 언제라도 꺼내서 내보일 수 있는 게 바로 레퍼토리라고 생각한다. 마침 국립극장의 ‘국립레퍼토리시즌’과 맞물려, 내 생각과 국립극장의 계획이 함께 갈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국립무용단의 첫 레퍼토리 작품으로 지난 9월 ‘도미부인’을 선보였다. ‘도미부인’은 1980년대 작품으로, 1992년 공연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볼 수 없었던 작품으로, 9월 공연 당시 화제가 됐었다.
“한 달밖에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단원들의 캐릭터를 연구하고, 안무를 다듬었다. 수정안무라고 표기는 하지만, 수정까지는 아니고 좀 정리하고 동작이 부족한 부분을 합리적으로 다듬어 이해도를 높였다. 거기에다가 우리 단원들의 실력이 원체 뛰어나기 때문에 시간 단축에 큰 도움이 됐다. 송범 선생님의 모든 작품이 ‘도미부인’ 하나로 모아진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춤의 집대성이라고나 할까. 그만큼 구성이 탄탄하고, 극적인 전개가 일품이다. 그래서 레퍼토리 작품 중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전 세계를 돌면서 200회를 넘게 했으니 말이다. 생전 송범 선생님께서도 대표 작품이라고 자평하셨다.”

-현재 국립무용단의 인원과 성비는 어떻게 되는가?
“인원이 정단원은 53명, 인턴까지 합하면 61명이다. 남성 무용수 구하기 힘든 요즘에 15명의 남성 단원을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당히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라성 같은 남자 무용수들이 국립무용단에 있다고 보면 된다.”

-예술감독은 자식 뒷바라지에 힘쓰는 따뜻한 ‘엄마’이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점을 엄하게 꾸짖고 올바르게 이끄는 ‘아빠’이기도 하다. 국립무용단원들에게 내세우는 방침이 있는가?
“처음에 단원들을 쭉 보니, 소속감이 없는 단원들, 자기가 돋보이길 바라는 단원들, 기회가 오질 않아 불만에 찬 단원들 등 각자 마음이 다양하더라. 난 그걸 해소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첫 시작부터 단원들 모두 모아놓고 공표했다. 앞으로 놀 시간도 없을 거라고, 의무를 다 해야 권리주장도 할 수 있는 거라고 말이다. 의무가 바로 연습이다. 아직까지는 별일 없이 단원들 모두 잘 따라와 주고 있다. ‘도미부인’을 국내 무대에 올리기 전, 중국에서 ‘춤, 춘향’을 먼저 공연하고 여수에서도 4일간 했다. 그 이후 한 달 만에 바로 ‘도미부인’을 무대에 올린 거다. 지금은 11월 공연 작품에 한창 매진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단원들은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을 거다. 얼마나 바쁘고 정신이 없겠나. 무용수에게 연습이란 생활 그 자체다. 무용수로서의 당연한 덕목이다.”

-예정돼 있는 국립무용단 공연이 있다면 알려 달라.
“11월에 공연하는 ‘그대 논개여’ 준비에 여념이 없다. 내년 6월에는 ‘춤, 춘향’을 올릴 예정이다. 차기 시즌 작품도 안무를 맡았다. 1년에 한 편 정도는 신작을 선보일 생각이다.”

-국립무용단만의 특별한 계획이 있다면?
“안무가 교류프로젝트란 큰 콘셉트의 프로젝트가 있다. 한국무용이란 고정된 틀과 그에 대한 인식을 넘어서 보다 큰 틀에서 순수한 춤 언어로 소통하고자 마련했다. 내년 4월 현대무용 안무가 안성수 씨의 ‘단’이란 공연이 예정돼 있다. 현재 매튜본이나 아크람칸과 같은 세계적인 안무가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장르를 불문한 세계 안무가와 국립무용단이 함께 만나 한국적인 호흡을 하는 작품을 할 수 있길 바란다.”

-요즘 한국무용은 현대적 요소가 가미되면서 정체성이 모호해져 가고 있다. 국립무용단으로서 그 경계를 어떻게 지켜갈 생각인가?
“무용이란 것 자체가 종합예술이다. 요즘은 장르간 콜라보레이션도 자주 이뤄지면서 융복합이란 말도 많이 쓰지 않나. 이런 사회적 현상은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원래 무용은 그런 성향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다. 우리 전통을 지키는 건 당연하다. 다만 동작과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키기 보다는 그걸 지키되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본다. 현대무용이나 발레 동작을 무조건 수용하다보니 정체성이 모호하단 말이 나오는 거다. 호흡의 길이로 동작을 정할 수 있는 건 한국무용만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잊은 채 현대무용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겠나. 우리 전통 고유의 감성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것을 지켜나갈 수 있을 거다. 우리 전통 성향, 동양적인 선과 서양의 다이나믹하고 동적인 동작과 결합시키는 작업이 국립무용단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만의 손놀림과 멋은 빼놓진 않을 거다. 맨발과 버선신은 발부터도 엄청난 차이인데, 그런 부분에서 한국무용의 호흡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게 또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길 바란다.”

-故최현 선생의 춤을 기리고 추모사업을 이끌어 오고 있는 최현우리춤원의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최현 선생의 춤으로 직접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최현 선생과의 인연이 궁금하다.
“최현 선생님의 제자다. 중학교 때부터 날 키워주신 선생님이시다. 내 춤은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유능하신 선생님 밑에서 심적으로 아주 든든했다. 반면, 생전에 그만큼 내가 보답해드리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최현우리춤원은 2007년에 설립됐고, 올해는 선생님 10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산도 확보하고, 해외 공연을 비롯해 올해 10주기 기념 공연도 많고, 책도 출판했다. 그러던 와중에 국립무용단으로 갑자기 발령이 나면서 최현우리춤원에게 너무 미안하다. 현재 후임자를 찾고 있지만, 내가 벌려놓은 일들도 있고 올해까지는 내가 책임져야할 것 같다.”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는 건가?
“난 춤쟁이이다. 기회만 온다면 언제든지 무대에 오를 거다. 내가 직접 몸을 움직여야 단원들의 문제점을 알 수 있고, 컨트롤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춤 인생을 되돌아보는 발표 무대를 갖고 싶기도 하다.”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성과가 있다면 말해 달라.
“처음 맡았을 때 인력이 너무 모자라 24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둘러보니 가장 시급한 건 무용전공자 취업실태조사겠더라. 전국적으로 6천여 명을 찾아내 4천 명 가까운 무용전공자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분석 결과, 현대무용전공자는 졸업 후 취업률이 너무 낮았다. 대부분의 현대무용전공자들은 사비로 창작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난 한국무용수이면서도 이사장으로서 현대무용에 대한 투자가 시급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무용수의 정당한 처우를 위해 계약서 표준 양식을 만들었고, 또 예술인복지법의 기초 토대를 만들었다. 무용수로 하여금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는 행정적인 여건과 조치를 만들 때 당시 무용계에는 파격이었다. 당연한 거지만 무용계에서는 오히려 그렇지 않은 게 당연시돼 왔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교수들의 반발이 엄청났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에게 일 좀 시키겠다는 건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무용수들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의 수가 많아지게 됐다. 또 직업전환 프로젝트라고 해서, 일례로 국립발레단 출신 무용수가 무릎이 망가지게 돼 더 이상 무용을 할 수 없게 된 경우가 있었는데, 그 무용수를 재활관련 직종으로 국립단체에 취업하게 했다. 이렇게 무용수들을 위해 힘써왔고, 3년이란 시간 동안 나름대로 시스템을 구축해놨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지금 더 축소되고,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는 듯해 개인적으로 안타깝다.”

국립무용단원들과 함께

-직업전환 프로젝트에 대해 더 상세한 설명 부탁한다.
“당시에 미움을 많이 받았다. 노동부가 할 일을 왜 나서냐는 거였다. 평생 무용한 이에게 직업을 전환하라는 건 죽으라는 말과 같다. 40대, 50대 단원들이 무용단에 청춘을 바치고, 은퇴하게 되면 그 후의 비전은 막막하기만 하다. 주변에서는 나보고 작품에 신경 쓸 것이지 이런 데까지 신경 쓴다고 하는데, 이런 것까지 아울러야 국립무용단의 수준도 올라가고, 또한 국립으로서 응당 해야 하는 일이다. 한 해에 무용전공 졸업생 수천 명이 석박사로 간다. 계속 이렇게 고급인력만 창출하지, 저임금에 허덕이는 사회구조에는 변함이 없다. 그 선봉에는 국립무용단이 있다. 동시에 그걸 가장 신경 쓰지 않는 게 바로 국립무용단이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국립극장을 설득하고 있고, 제도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할 거다.”

-개인적인 꿈은 무엇인가?
“서양화된 요즘 무용수의 신체적 조건과 한국무용이 맞아 떨어질 수 있는 동작을 만들어내 한국무용의 한 장르로 형성되는 게 꿈이다. ‘윤성주류’ 이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