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선의 문화비평] 백남준과 만난 이야기 V - 플럭서스
[천호선의 문화비평] 백남준과 만난 이야기 V - 플럭서스
  • 천호선 컬쳐리더인스티튜트원장/전 쌈지길 대표
  • 승인 2012.11.01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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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선 컬쳐리더인스티튜트원장/전 쌈지길 대표
1983년 말부터 1985년 여름까지 약 1년반 동안 덴마크공보관으로 근무하면서  나는 세기의 아방가르드 거장 머스 커닝햄과 존 케이지를 만나 대화를 할 수있는 기회가 있었을 뿐 아니라, 백남준과의 행위예술 동료들인 플럭서스(Fluxus)  멤버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즉 뉴욕에서의 백남준과의 인연이 코펜하겐에서는 플럭서스 예술가들 전반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나의 아방가르드 취향이 더욱 심화된 것이다.

1985년 5월27일부터 6월2일까지 바이킹의 발생지로서 덴마크의 옛 수도이었던  로스킬드에서 <판타스틱한 사람들의 축제 Festival of Fantastics>라는 제목의 플럭서스 페스티벌이 열렸다. 백남준의 소개로 일부 플럭서스 멤버들과 알고 지내던 우리 부부는 자연스럽게 그 페스티벌에 초대되었고, 단순한 관람객이 아니라 일종의 동료로서 일주일간 휴가를 만들어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행사에 참여하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플럭서스는 존 케이지 음악교육의 산물로서 1962년 조지 마키우나스 (G. Maciunas)에 의해 독일의 비스바덴에서 창립된 해프닝 그룹이다. 백남준은 창립멤버의 일원으로서 유럽과 미국 전역을 휩쓸며 기상천외한 행위음악으로 세계적 “앙팡 테리블”로 주목을 끌었다. 그는 점차 비디오아트에 전념하게 되고  비디오아트의 구루로 칭송을 받게 되지만, 플럭서스가 그의   비디오아트의 모체가 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참여TV로서의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전지구적 사방소통을 도모한 그의 우주오페라속에 깃든 것은 바로 플럭서스의 정신, 즉 예술과 삶의 통합, 다다적 반예술, 대중소통을 위한 참여예술의 의지인 것이다.

로스킬드 플럭서스 페스티벌은 덴마크 전위음악가이며 개념예술 작가인 에릭 앤더슨의 기획으로 이루어졌다. 이 페스티벌에는 미국에서 필립 코너, 알리슨 놀스, 로버트 왓츠, 제프리 핸드릭스, 잭슨 맥 로와 그의 처 앤 타도스, 프랑스에서는 벤 보티에, 독일 거주 미국 시인 에멋 윌리엄즈와 앤 노웰 부부 등 플럭서스 멤버 9명이 참여하였다. 그밖에 이태리 거주 미국 평론가 헨리 마틴, 독일 학술교류처장 르네 블록 등 플럭서스 관계 인사들과 많은 덴마크 예술가들이 참여하였다.

플럭서스답게 벤 보티에와 알리슨 놀스가 시가지 한복판에서 개막 테이프 양끝을 잡아 길거리 행인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 테이프 커팅을 하도록 연출된 개막식 퍼포먼스로 막을 연 로스킬드 페스티벌은 마을 전체의 축제가 되었다. 17개의 다양한 공연 프로그램과 전시회가 시립미술관, 공연장 뿐 아니라, 공원, 항구, 어린이놀이터, 옛 마굿간 등 도시 구석구석과 인근 무인도에서도 펼쳐졌다. 무인도에서 벌어진 제프리 헨드릭스의 나체 퍼포먼스, 선박 갑판위에서 펼쳐진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다양한 이벤트들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들과 함께 보낸 일주일간의 경험이 인연이 되어 우리 부부는 1993년 플럭서스를 한국에 초대하는 꿈같은 기회를 만들게 되었다. 1986년 문화공보부 문화예술국장이 된 나는 88올림픽 문화예술행사를 준비하면서 ‘플럭서스 올림픽’을 구상하였으나 한국 실정에서는 시기상조임을 깨닫고 이를 포기한 일이 있었다. 플럭서스 한국 유치의 꿈은 5년간의 캐나다 근무를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 이듬해인 1993년에 이루어졌다. 캐나다에서 미술사 석사를 마친 아내 김홍희가 귀국후 미술평론가, 큐레이터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 THE SeOUL OF FLUXUS>를 개최하고 내가 이를 뒤에서 도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