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콘텐츠 체험 여행(2) - 연차적으로 전국에 조성해야 할 책마을
나의 문화콘텐츠 체험 여행(2) - 연차적으로 전국에 조성해야 할 책마을
  • 서연호 고려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12.11.16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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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호 고려대학 명예교수

지역별로, 도시별로 적당한 주변 공간에 연차적으로 책마을을 조성하는 사업을 권장하고 싶다. 주중에도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주말을 이용해 온 가족이 나들이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 책마을이 아닌가 한다. 책마을에 가면, 누구나 자유롭게 책을 읽고, 책을 쉽게 사고, 알고 싶은 책을 조사하고, 책에 관한 폭넓은 정보를 얻고, 부담 없이 책을 살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가능하면 마을 주변에 공원이나 산기슭, 들판이 있어, 책구경과 더불어 산책도 하고, 걷기도 하는 즐거움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필자는 2003년 2월 5일, 마침 유학을 하고 있던 아들의 안내로 책마을로 유명한 영국의 헤이 온 와이(Hay-on Wye) 책마을을 찾았다. 잉글랜드의 북서쪽 경계인 웨일즈에 자리한 헤이는 와이강 곁에 주민 1천4백 명이 채 안 되는 산 속의 외딴 시골인데, 39개의 책방이 있고 특히 집집마다 고서를 취급하는 국제적인 고서시장이다. 1903년부터 그의 조상이 헤이 근교에서 살았고,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리처드 부스(R. Booth, 1938-)는 세계적인 견문을 쌓은 뒤 고향에 돌아와 1961년부터 헤이를 책마을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1977년 4월 1일 헤이를 독립국으로 선포했고, 자서전에서 ‘나의 책왕국’으로 명명할 정도로 자존심과 전문성을 겸비한 인물이다.

마을의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어 언덕 위의 ‘곰의 집’이라는 비엔비(B&B, 잠자리와 아침을 제공하는 민가)에 여장을 풀었다. 마루가 뒤틀린 수백 년 된 고가에 부부가 살고 있는데 실내 여기저기 널린 고서가 한층 옛스런 맛을 느끼게 했다. 17세기 초부터 헤이에서 카디프를 왕복하는 정기마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출발지였던 여인숙은 지금 ‘늙고 검은 사자’라는 유명한 퍼브(Pub)로 여전히 영업을 계속한다. 중심가의 ‘킬버츠 퍼브’에서 먹은 런치도 다른 데 비해 손색이 없는 맛을 느끼게 했다.

부스가 직접 운영하는 책방(제10호 서점)이 있다기에 찾아가 한나절 책을 구경을 하고, 친절하게 시간을 내주어 그와 대담도 했다. 2층으로 된 책방은 차라리 창고라고 해야 할 정도로 방대했다. 특히 연극과 영화분야의 책이 많아서 친근감이 더했다. 그는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헤이를 국제적인 고서시장으로 조성하면 여러 측면에서 장래성이 보여 사업을 벌이게 되었고,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팔린 영화책방(제32호 서점)의 성공을 계기로 사업을 확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여력이 생기면 한국책도 취급해 보고 싶다는 의욕을 표시했다.

부스의 세 번째 부인 호프 슈트어트(Hope S.)는 결혼 후에 전직을 버리고 고서사업에 뛰어들어 성공했다. 퇴락한 헤이 고성(古城)을 50만 파운드(한화 약 9억원)나 들여 수리하고 캐슬책방(제24호 서점)을 세계적인 명승지로 부각시켰다. 말 그대로 고성 안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찬 시설이며 성 입구에는 간판이 붙어 있다. 성을 관광할 수 있고 책을 보고 구입할 수도 있는 흥미진진한 곳이다. 매년 5월에는 전 세계의 책수집가들이 모여들어 닷새 동안이나 축제를 벌인다고 한다. 이 마을의 방문은 하나의 발견이자 감동이었다.

우리는 대학의 주변에서도 좀처럼 책방을 찾아볼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젊은이들보다 시험공부에 열중하는 광경을 보기가 일쑤이다. 서점에서 책은 별로 팔리지 않고, 늘상 숱한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서 서가의 새 책을 꺼내 들고 멋대로 읽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책을 읽지 않는 국민임이 분명하다. 이런 상태로 과연 나라의 밝은 장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책마을을 만들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출판사만이 아니라 책을 찾는 사람이나 유통업자 등,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물론, 우리 사회와 국가에 큰 이로움이 있을 될 것이다. 책마을을 만들려는 진정성을 지닌 사람 및 마을에 대한 정부의 사려 깊은 지원도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