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콘텐츠 체험 여행(4) - 아리랑을 활용한 창작품 아쉬운 예술계
나의 문화콘텐츠 체험 여행(4) - 아리랑을 활용한 창작품 아쉬운 예술계
  • 서연호 고려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12.12.1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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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연호 고려대학 명예교수
  지난 12월 6일 아리랑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역사적인 사건이다. 우리 예술계에서 아리랑을 활용한 다양한 창작이 아쉽다. 이런 작업은 특히 작곡가와 국공립예술단체에서 진작 했어야 하고, 당연히 해야 할 작업이다. 2011년 6월 중국에서 먼저 조선족의 아리랑을 비물질문화재로 등록했을 때, 국내에서는 ‘아리랑의 본고장’을 빼앗긴 듯한 충격이 일어났다.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또한 북한 최성환 작곡의 <본조아리랑을 주제로 한 환상곡>이 1990년대부터 NHK교향악단을 비롯한 세계 1백여 개의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자 국내 음악계는 시름에 젖게 되었다. 이 작품은 본래 여러 차례 다듬어져 개량악기를 포한한 배합관현악곡으로 알려진 곡인데, 1976년에 완성되어 편곡이 아닌, 작곡으로 인정 받은 것이다. 필자는 문화재 유네스코분과위원으로서 그 아리랑 목록선정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보다 뜻있는 과제는 아리랑의 현대적인 창작을 실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11년 7월, 여름방학을 이용해 비엔나와 오스트리아 일대를 순방했다. 늘 동경했던 곳이지만 자주 찾을 수 없는 처지여서 더욱 마음이 설랬다. 견학해야 할 곳이 많았지만 우선 작곡가들의 생가와 유적지를 둘러 보았다. FM으로 자주 듣던 저 훌륭한 작곡가들의 체취를 직접 대면하는 감동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을까. 가는 곳마다 한국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는데, 국내에서는 무관심한 줄만 알았던 우리 여행객들이 평소 문화와 예술에 대한 갈망이 그처럼 깊이 쌓여 있었고, 높은 안목을 지녔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런 국민성을 문득 발견하면서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마저 느꼈다. 또한 문화 예술의 대국 오스트리아에 비해 국내의 예술가와 예술계가 너무 낙후되고 졸속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호텔에 들어 잠을 자기에 아까운 시간과 다채로운 도시의 밤문화들. 특히 모찰트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연주회 참석은 여행객에게 즐거움의 극치였다. 시립공원 서남쪽에 자리한 쿠어잘롱(Kursalon)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훌륭했고, 가수들, 무용수들의 기량도 손색이 없었다. 오스트리아 전통을 배경으로 창작된 모찰트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여전히 살아서 이제 인류의 가슴에 친근하게 닥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날, 전 세계에서 모인 관객들의 박수는 그칠 줄 몰랐다. 오래 전부터 전통화된 프로그램이고, 도시의 몇 군데에서 유사한 음악회가 지속되고 있다고 했다. 그날, 현장에서 필자는 아리랑에 대한 아쉬움을 절감했다. 솔직히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라 하지만 그렇게 자기 전통을 구현하는 프로그램도 없고, 그윽한 극장도 없다. 기껏 관광 쇼 수준의 공연을 하면서 관광진흥이라는 구호를 구태의연하게 되새기고 있는 실정이다. 왜 우리 각계 지도자들의 안목은 이렇게도 짧고 단순할까.

  유명한 로린 마젤이 지휘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2008년 2월 평양과 서울에서 차례로 연주회를 가졌다. 26일 오후 5시 동평양극장에서 연주했고, 28일 오후 1시 30분 서울에서 연주했는데, 3번째 앵콜곡으로 북한 최성환의 아리랑을 연주함으로써 떠돌던 소문의 실체를 우리 앞에 제시하고 놀라게 했다. 바로 이런 활동이 예술을 통한 민족동질성의 회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재 우리 아리랑의 대표 창작곡은 백대웅 작곡의 <남도아리랑>이다. 원래 한중일 3국의 민족악기를 합주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 오케스트라 아시아이다. 1994년 6월에 작곡된 이 곡은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을 기조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피리로 진득하게 엮어가는 밀양아리랑에 이어 신명나게 흥취를 돋우는 진도아리랑의 멋을 앞뒤로 조화시킨 명곡이다. 1988년 9월에 공연된 김희조 작곡의 음악극 <아리랑 아리랑>의 변주곡들도 잊을 수 없는 명곡들이다. 타슈겐트에서 조국을 찾은 교포 3세의 애절한 사연과 고국 처녀와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이 드라마를 살리는 데 작곡자의 역할은 단연 빛났다. 이상과 같은 그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술계는 여전히 아리랑을 활용한 창작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