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선의 문화비평] 백남준과 만난 이야기 VI - 플럭서스 2
[천호선의 문화비평] 백남준과 만난 이야기 VI - 플럭서스 2
  • 천호선 컬쳐리더인스티튜트원장/전 쌈지길 대표
  • 승인 2012.12.17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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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선 컬쳐리더인스티튜트원장/전 쌈지길 대표
1993년 3월 ‘예술의전당’ 개관기념축제의 일부로서 자유소극장에서 개최되었던<서울 플럭서스 페스티벌, THE SeOUL OF FLUXUS>은 독일학술교류처(DAAD)의 베를린관장으로서 플럭서스 20주년 기념행사(1982년)와 30주년 기념행사(1992년)를 조직하였던 르네 블록이 예술감독으로 참여하였다.

공연에는 프럭서스 작가들로서 에릭 앤더슨, 에이오, 필립 코너, 켄 프리드만,    제프리 헨드릭스, 앤 노엘, 알리슨 놀스, 잭슨 맥 로, 래리 밀러, 빌렘 드 리더,  벤자민 패터슨, 에멋 윌리엄즈 등 13명이 초청되었으며, 한국측에서는 홍신자와 이불 등이 참여하였다. 프랑스 체재 작가로서 초청되었던 김순기씨가 공연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백남준선생은 본인이 뉴욕에서 공연하면 이를 서울로 우주중계해줄 것을 희망하였으나, KBS의 협조를 받지 못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대신 갤러리 현대 뒷마당에 몽골 텐트를 설치하여 전시회에만 참여하였다.  전시에는 요코 오노, 헨닝 크리스챤슨 등도 작품을 내주었다.

백선생은 <서울 플럭서스> 카타로그의 서문도 써주었는데, “플럭서스는 서방에서는 문화혁명을, 동구에서는 정치혁명을 일으키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플럭서스는 무궁화와 같은 질긴 정신, 자립자존의 정신, 하면 된다는 정신을 예술에 적용한 경우이다.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일본에서도 한다 한다 하면서 아직 한번도 못했다. 한국이 일본보다 먼저  플럭서스 페스티벌을 주최해서 플럭서스 작가를 20명 가까이나 데려온다는 것은 우리가 일본보다 어느 면에서 더 앞선다는 뜻이 된다”고 격려해 주었다. 작가 임옥상씨는 ‘플럭서스는 무궁화꽃’이라는 백선생의 스테이트먼트를 작품으로 만들어 주는 형태로 페스티벌에 참여하였다.

플럭서스는 흐름, 변화, 운동이라는 뜻을 가진 중세 라틴어로서,   플럭서스운동의 창시자 조지 마키우나스(G. Maciunas)가  1960년대 초 뉴욕에서 행위예술 중심의 AG화랑을 시작하고 Fluxus라는 이름의 예술잡지 발행을 기획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김홍희씨는 <서울 플럭서스>를 준비하면서 플럭서스의 아방가르드 정신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9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 국가 개념을 초월하는 ‘세계주의’적 예술의 성격
- 파괴를 통한 창조라는 신념의 ‘혁신주의’
-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있다는 ‘우연성’ 미학
- 플럭서스 예술의 형식적 특성인 ‘인터미디어(혼합매체)’
- 예술과 인생의 뿌리깊은 이분법을 해소하는 ‘예술/인생 통합 장르’
- 예술 행위의 산물로서 공연예술의 ‘일시성’
- ‘재미’를 추구하는 예술
- 행위의 단순성과 절제된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간결성’의 미학
- 추상적 개념 대신에 구체적인 실체를 대두시키는 ‘구체주의’

이와같이 플럭서스는 다다의 반예술 정신을 이어 받으면서도 ‘파괴를 통한 창조’라는 네오다다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정립함으로써, 예술과 삶을 통합시키고 사회와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지 않는 소통의 예술을 추구하였는데, 백남준의 첫 번째 우주 오페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바로 그 결정체인 것이다.

<서울 플럭서스>를 준비하면서 당시 국회사무처 공보국장이었던 본인은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내서 뒷바라지를 할 생각이었으나, 사정이 여의치않아 대신 미술대학 1학년이었던 딸 민정이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3월 3일부터 8일까지 매일 3회씩 계속된 공연 기간중 밤늦게 공연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하도 힘들어서 두모녀가 한참동안 얼싸앉고 울다가 다시 밤새워 다음 공연을 준비하던 모습이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