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 - 주명덕 사진작가] 세계 대가로 남기 위한 끝나지 않은 여정
[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 - 주명덕 사진작가] 세계 대가로 남기 위한 끝나지 않은 여정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2.12.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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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향한 애정으로 대한민국 사진 역사 이끌어 왔다

     제4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현대대상 수상자 주명덕 작가는 한국사진계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우리가 외면했던 첨예한 사회문제들과 잊혀가는 우리 전통 문화유산을 담아내며, 우리나라의 도시와 자연을 재해석해 대두시켰다.

     특히 1966년 개인전 ‘홀트씨고아원’은 외국인 참전 군인들과 한국인 여성들 사이에서 태어나고 버려진 혼혈고아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사진의 최초이자 최고로 꼽힌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사진의 사실성과 기록성을 바탕으로 6.25 전후 15년 동안 소외된 채 그들만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혼혈 고아들의 문제를 당시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하는 공동의 문제로 제시했다.

     그런가하면 최근 작품에서는 초기 작품들과 일관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풍경을 담고 있되, 한걸음 물러나 관조하는 태도를 취하며,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와 하늘, 낙서로 가득한 벽, 길 위의 차선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들을 그만의 세밀한 포착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그는 지금껏 세상을 향한 애정을 놓은 적 없이 대한민국 사진 역사를 이끌어왔다. 사진 관련 서적을 무려 20여 권이나 출판한 경력 역시 그의 열정을 뒷받침해주는 증거일 테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우리 고유의 전통에 대한 애정과 세계적인 대가로 나아가기 위한 그의 여정은 계속 되고 있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효자동 높은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작업실을 찾아 사진인생 반백년을 넘긴 그의 소회를 들어봤다.

△1940년 황해도 출생 △경희대학교 사학 학사 △2005 대구사진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위원장 / 1999~2002 민족사진가협회 회장 / 1968 중앙일보 기자 △개인전 : 홀트씨고아원 '섞여진 이름들'(1966, 중앙공보관) / 이달의 작가전(1987, 국립현대미술관) / An die photographie(1999, 금호미술관) / My Motherland(2011, 대림미술관) 외 다수 △2012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현대부문 / 2010 파라다이스상 문화예술 부문 수상

-사진과 함께 걸어온 기록인생이 50년을 넘어섰다. 반백년이란 시간에 있어서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50년이란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진을 얼마만큼 했느냐가 중요하겠지만, 난 그다지 많은 걸 하지 못한 것 같다. 음악가들을 보더라도 서른, 마흔에 죽었어도 그토록 많은 작품들을 남겨놔서 지금까지도 남아있지 않나. 또 요절한 문학 작가들도 얼마나 많은가. 난 말로만 거창하게 50년이지, 그만큼 작품을 남기지 못해 창피하다.”

-사학과를 졸업했는데, 사진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지 궁금하다.
“물론 나는 사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냥 우연히 시작하게 된 사진이 좋아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거다. 처음엔 호기심에 사진을 시작했는데, 당시 사진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열심히 하면 나도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뛰어들었는데, 사진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더라.”

홀트씨고아원展 - 섞여진 이름들(1966)

-‘홀트씨고아원’展은 한국 다큐멘터리사진의 효시라고 불린다. 보기 좋은 ‘예쁜’ 사진이 유행하던 당시 홀트씨고아원 시리즈는 파격적이었다.
“누이가 자원봉사를 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하더라. 그곳이 바로 홀트고아원이었다. 원장인 홀트부인에게 사진 찍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해 아이들 사진을 찍었고, 그 후 만 3년이 지나고 그때 사진 전람회를 하게 됐다. 당시 신문에서 전람회를 크게 다뤄줬다. 그걸 보고, 앞으로도 쭉 내가 사진을 한다면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아마 1966년, 내가 스물여섯이나 됐을 거다. 우리나라 사진사 기록을 보면 그때의 전시가 꼽히고 있더라. 이건 참 내가 재수가 좋다고 밖엔 설명을 못하겠다.(웃음)”

-전통적인 소재에는 어떻게 관심을 두게 됐는지 궁금하다.
“작년에 ‘마이 마더랜드’란 전람회를 가졌는데, 내용은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찍어온 자연, 집 등 우리나라 풍경이었다. 전시 기자간담회에서 공중파방송 PD가 내게 이런 비슷한 질문을 했다. 내게 어떤 신념을 갖고 이런 사진을 찍어왔느냐고 묻길래 난 신념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신념 없이 어떻게 이렇게 오랜 시간 찍을 수 있냐고 했고, 난 그 질문 자체가 이상하다고 했다. 그렇지 않나? 한국 사람이 한국의 자연, 한국의 집을 찍는데 여기에서 신념이 필요해야 하는지…. 내가 전통을 소재로 사진을 찍는 건 당연한 거다. 내가 무슨 신념이 있다는 둥 거짓말을 해야 하냐고 오히려 그에게 반문했었다. 사람들은 당연한 것에도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곤 하는데, 그걸 경계해야 한다.”

-‘주명덕블랙’이란 용어가 따로 있을 정도로 흑백사진이 잘 알려져 있다.
“내가 지금껏 전람회에서 흑백만 보여줘서 그렇다. 실은 난 칼라작업도 많이 하고 있다. 물론 흑백의 비중이 더 높긴 하지만, 7:3 비율로 칼라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다. 흑백 같은 경우에는 내가 직접 작업실에서 프린트를 할 수 있는데, 칼라는 외부에 프린트를 맡겨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고 그렇다.”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76점을 기증하고, 지난달까지 기증작품전을 열었다. 특별히 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이유라도 있나?
“서울시립미술관에 사진컬렉션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게 첫 번째 이유고, 또 미술관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 아닌가. 내 사진이 그곳에 남길 바란 마음도 있다. 특히 서울시립미술관 측에서 흔쾌히 나의 첫 전시였던 홀트고아원시리즈를 그 순서 그대로, 거기에 실렸던 글도 그대로 모두 남겨줄 수 있다고 해서 오히려 내가 고마운 마음으로 기증할 수 있었다.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하지만, 내가 20대 때 찍은 사진을 시립미술관에 걸 수 있다는 건 내게도 참 의미있는 거다.”

-기자로도 활동했는데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기자생활 한 6년 했다. 지금도 가장 잘했다고 기억되는 일은 ‘우리나라 가족 시리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오는 과정, 한 가정에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 등을 담아 한 달에 한 시리즈씩 내놓다가 11개월만 하고 그만두게 됐다. 당시 안기부의 제재 때문이었다. 비록 완성하지 못한 시리즈이지만 내겐 가장 중요한 작업으로 남는다. 완성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작품마다 프린팅은 몇 장씩 하나?
“그걸 에디션이라고 하는데, 원래 사진은 특성상 몇 장이고 한 없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에디션은 본디 화랑이 작품판매를 위해 작가와 상의해 정하는 거다. 세계 유명 작가들 중에도 에디션을 거부하는 이들이 많으며, 나 역시 에디션을 찬성하진 않는다. 한 작품마다 몇 점밖에 프린트하지 않는데, 에디션은 따로 없다. 에디션 여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작가의 신뢰도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외람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작품은 얼마나 판매했는지 궁금하다.
“모르겠다.(웃음) 화랑에선 내 사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어렵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 작품은 대부분 미술관에 많이 가있다. 글쎄, 난 상업작가로서는 그리 성공하지 않은 편이다. 옛날 같으면 내 나이엔 이제 할아버지인데, 요즘엔 100세까지 산다고 하니, 앞으로 20년은 더 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이거 아주 끔찍한데.(웃음)”

-지금껏 세 번의 변신을 했으며, 앞으로도 더 변신하고 싶다고 들었는데…?
“지금까지 세 번의 변신을 했는데, 앞으로 두 번 정도 더 변신을 꾀하고 싶다. 다큐멘터리사진 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생각을 담다가 파인아트에 관심을 갖고, 마지막으로는 일명 ‘검은 사진’인 풍경사진을 하며 일종의 회화를 했다고 본다. 앞으로 뭔 변신을 할지 아직 모르지만, 시간이 지난 후 나중에 돌아보면 그땐 알지 않겠나. 앞으로 더 변화하려면 이젠 내 힘만으로는 부족하고 아마 신이 좀 도와줘야하지 않나 싶다.(웃음)”

-수상소감에서 세계적인 대가로 남고 싶다고 했는데.
“세계 어딜 가나 한국에서 사진의 대가가 온다 하는 소리 들으면 좋지 않겠나.(웃음) 그러나 그러려면 나는 아직 멀었고…. 이런 건 본인이 제일 잘 안다, 본인이 어디쯤 와있는지는…. 내 마음만큼은 얼마든지 더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할까도 싶고. 젊었을 땐 사진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이 많았는데, 이젠 그저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동을 주는 사진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일각에서는 여러 매체와 타 장르에 밀려 사진이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진이 발명된 지 이제 200년 가까이 되가는데, 사진에 회화가 밀려 회화는 현대회화로 바뀌게 되고, 미술이 추상에서 현대로 가는 큰 역할을 하게 됐다. 사진이 회화를 밀어냈듯이 요즘에는 사진 또한 다른 장르로부터 밀리고 있다. 전람회 아무리해도 소용없고, 차라리 방송이나 인터넷 동영상에 한 번 크게 뜨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나. 이제 사진은 동영상에 밀리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선 다큐멘터리하던 사람들도 파인아트로 돌아서야 할 거다. 사진보다는 영상매체가 훨씬 더 사람들에게 자극적이므로, 사진작가들은 거기에 맞서서 변화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집 안에 LP와 CD가 가득하다. 또 뒤편의 오디오도 범상치 않아 보인다. 평소에 음악을 즐기나 보다. (기자가 주명덕 선생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도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악은 어릴 때부터 즐겨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돈 생기면 스피커 바꾸고, 또 더 좋은 걸로 바꾸고 했다. 음악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주 최상급 스피커는 아니지만, 학점으로 치자면 A-나, B+정도는 된다.(웃음) 이 정도면 난 아주 만족스럽게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즐겨 들어온 이유 중 하나는, 내 사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음악을 많이 들으면 내가 바라보는 사진 세계에도, 내 눈에도 아름다운 것만 보이게 하는 일종의 훈련이랄까. 작업 중에 내 정신을 맑게 하고 싶기도 하고 말이다.”

-좋은 사진을 찍는 비법이 있다면 알려 달라.
“좋은 작가란 평소에도 항상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세상을 보면 바로 바로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거다. 작업하기 전, 너무 생각이 많으면 안 되고, 또 생각한 만큼 작업이 되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 단순해지고 아무렇지 않고 자연스럽게 찍은 게 나중에 보면 이뤄져 있는 사진이더라. 인위적이지 않아야 하고, 어떤 피사체가 나타나더라도 그냥 곧바로 찍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특별히 해줄 말은 없다. 그저 젊은 친구들 보면 부럽다. 요즘 세상은 정보도 많고, 자제도 많지 않나. 내가 나이 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우습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지 뭐.(웃음)”

-앞으로의 전시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올해 특히 전시 참 많이 했는데, 내년 1월부터 전시 시작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