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화가 이인성, 2013년 다시 부를 이름
천재화가 이인성, 2013년 다시 부를 이름
  • 이은영·임동현 기자
  • 승인 2013.01.10 14: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2년 최고의 전시 국립현대미술관 ‘이인성 탄생 100주년 展’

지난해 5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에서는 의미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그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화가 이인성(1912~1950)의 작품 전시회다. 이 전시회가 의미있는 것은 한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한국 근대미술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오늘날 대중들에게 선보였다는 점에서, 그로 인해 근대와 현대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지난해 5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열린 ‘이인성탄생 100주년 기념전’에 몰린 인파들.

이 전시회를 통해 많은 이들이 이인성이라는 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됐고 왜 이제야 이런 훌륭한 작품을 볼 수 있게 됐는가하고 아쉬움을 털어놓은 이들도 있었다. 몇몇 미술전문지와 일간문화기사에서 ‘올해의 미술 앙케이트’ 조사를 했을 때 지난해 최고의 전시로 이 이인성 전시회를 꼽았다. 그리고 이 전시회로 인해 ‘이인성아트센터’가 만들어지면서 한국 미술을 선보일 또 하나의 전기가 마련될 전망이다.

화가 이인성. 우리의 향토를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리며 고향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던 화가. ‘천재화가’로 명성을 떨치고 미술선생님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결국 전쟁의 포격과 함께 짧은 생을 마감해야했던 화가. 그 이인성이 지금 다시 살아나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다.

젊은 날의 이인성의 모습


 ‘조선의 천재화’로 일본까지 알려진 화가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인성은 1929년 17세 나이에 당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신인 화가의 등용문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다. 이후 1937년 최연소 추천작가로 오를 때까지 무려 12편의 입선과 6편의 특선을 차지하면서 화단이 주목하는 작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그를 도우려는 후원자들이 생겨났고 그 덕에 이인성은 일본 유학을 한다. 유학 중에도 그는 조선은 물론 일본 ‘제전’에서도 입선을 계속 차지했고 일본 신문은 ‘조선의 천재화가 이인성’이라고 그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이채원이인성 기념사업회장은 “당시 사람들은 달리기 잘하는 아이를 보면 ‘손기정 되겠네’라고 말하고 그림 잘 그리는 아이를 보면‘이인성 되겠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광복 후 이인성은 이화여자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는 학교 창고를 개조해 미술실을 만들고 틈만 나면 학생들을 밖으로 데려가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그리게 했다. 중학교 미술선생이 그가 한 사회생활의 전부였다.


그림 속에서 살다가…그림 속으로 사라진 환쟁이.

‘좋은 술이 있으면 좋은 친구와 함께 마셔야 마음이 풀리고, 좋은 그림을 그리면 좋은 친구와 함께 술마시며 밤새도록 이야기하는 습관이 오랜지라… 이래도 저래도 나의 천직은 그림에서 살고 그림 속에서 괴로움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누구에게도 내 개성을 짓밟히기는 싫다.’

1950년 이인성이 ‘신경향’에 발표한 글의 일부다. 일제 시대를 전후해 당시의 저명 인사들은 화가를 집으로 초대해 숙식을 제공하며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인성도 한번은 일본인 의학 박사의 초대를 받아 그림을 그리게 됐는데 자정이 넘도록 그림은 그리지 않고 술을 마시고 소란을 부려 박사의 부인을 질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친한 친구와 술을 마시고 그림을 그리는 것을 즐겼던 그는 그해 4월에도 전시회를 준비하며 의욕적인 활동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는 서울 수복을 앞둔 상황에서 인민군에게 붙들린다. 그리고 그해 11월 누군가가 쏜 총이 천재화가를 그림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낭만을 즐기던 화가의 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말았다.

뒷날 소설가 최인호는 이런 글을 쓴다. ‘예술가는 특권을 원치 않는다. 죽은 뒤 기념비 세우기보다, 산 절규에 귀 기울이며, 살아서 명동에서 무교동에서 술 취한 이인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가, 왜 살아있는 천재 이인성이 우리 곁에서 시대의 예언을 내려주는 그 신의 계시를 듣지 못하는가’

그리고 그는 스스로 이렇게 답을 한다. ‘우리 곁의 천재를 죽인 것은 너와 나 우리 모두다. 나는 그 시대에 살지 않았다, 총을 쏘지 않았다 말하지 말라.’


전란 후 다시 빛을 보다

전쟁이 터지던 당시 이인성의 장인은 다른 생활도구를 다 제쳐놓고 이인성의 작품들을 챙겼고 피난지를 옮겨 다닐 때도 그림들을 소중하게 가지고 다녔다. 이채원회장은 “외할아버지가 집안 가득 아버지의 그림을 걸어놓았고 나 또한 아버지가 남겨 놓으신 크레용으로 미술숙제 그림을 그렸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인성 그림, 집을 떠나다.

그런 어느 날, 지프차를 타고 온 ‘이인성의 친구들’이 이인성의 장인과 얘기를 나눈 후 다락에 있던 이인성의 그림들을 하나둘씩 가져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국현대미술가유작전’을 준비하던 김흥수, 이경성, 최순우 등이었다. 그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정리되지 못한 한국의 현대미술 작품을 수집, 보존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인성의 그림이 이인성의 집을 떠난 그 날의 상황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채원 이인성100주년 기념사업회장은  “그들은 다락과 장롱에 있는 그림을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고, 비좁은 2층 다락에 있는 물건은 작은 나를 안아서 겨드랑이를 치켜 올려놓고 꺼내게 했다. 그들의 눈에 띄는 모든 그림은 거의 다 가져갔다. 나로서는 어른들이 하는 일의 의미는 전혀 알 바 아니었고, 칭찬도 받고 용돈도 받아 그 분들이 또 놀러 오셨으면 하는 생각만 했었다.” 고 철 없던 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회장은 당시 외할아버지가 그림이 없어진 가게에서, 한참 동안 담배만 피우시며 눈물짓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후, 커서 들은 이야기로 그저 약간의 위로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쓴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 이라는 제목의 저서 p91-p96의 내용이 그“ 당시의 일에 관한 시대적 배경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1962년 11월 26일부터 12월 2일까지 중앙공보관에서 한국미술협회와 한국일보사가 주최하는 “한국현대미술가유작전”이 열리게 되는데, 이것은 독지가 설원식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사실상 “한국현대미술가유작전”은 김흥수, 최순우, 이경성 3인이 우리나라에 근대미술관을 설립해야한다는 뜻에 동의하고 당시 독지가였던 대한방적 설원식 사장에게 미술관 설립을 제안한다. 이 사업의 첫 시작이 바로 ‘한국현대미술가유작전’이었고 이로 인해 이인성의 작품은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당시 이렇게 해서 설원식이 소유하게 된 이인성의 작품이 50점이 넘는다고 한다.

 

 

설원식 대한방적 사장 부인인 임희숙씨가 지난 1964년 한 여성지에 이인성 미술관 건립의 시급함을 역설한 기고문(좌),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저서 '어느 미술관장의 회고'란 책에 이인성 작품이 설원식 사장에게 건네진 과정에 대해 상세히 쓰여있다.(우)


설원식, 이인성 작품으로 설림미술관 건립추진

이 전시회를 계기로 설원식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미술관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와 부인인 서양화가 임희숙의 성을 하나씩 따서 ‘설림미술관’을 짓기로 했지만 당시 설원식과 그의 아버지가 재산 싸움에 휘말리면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임희숙은 1964년 여성잡지‘여원’에 미술관의 건립을 간절히 바라는 내용의 컬럼을 쓰면서 자신의 집에 있던 이인성의 <실내>를 언급했다. 여원에 기고한 임희숙(대한방직사장설원식씨부인.화가)의 글을 또 살펴보자.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故 이인성씨의 작품 <실내>는 3년 전에 우리 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것은 나의 밖의 사람이 어떤 연고로 해서 고인의 유가족 손으로부터 인수받은 마흔여 작품 중의 하나이다. <중략> 이런 귀한 작품은 개인의 소장품으로만 사장시킬 것이 아니라 가까운 장래에 미술관이 생겨서 공개전시하고 여러 사람들의 애호를 받게 하였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라고 쓴 글에서도 당시 이인성 작품을 전시할  미술관 건립 추진 의지를 여실히 방증하고 있다.

지난 50년 전의 일이지만, 몇몇이 뜻을 모아 일찍이 근대미술관의 필요성을 느껴, 문화를 사랑하고 그림을 아끼는 모양새를 갖추고서 주옥 같은 옛 작품들을 수집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미술관을 만든다는 데 합의를 보고는 미술관은 만들지 못하고 오리무중이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우리 조상들의 귀한 문화유산을 개인 소장으로만 그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인성 작 <가을어느날>
   
이인성 작 <경주산곡>


박물관에 간다고 했던 미술품이 개인 창고로

이채원 회장은 “설혹, 사회여건이나 상황이 진솔했던 그들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면, 미술관 설립을 빙자한 일방적인 거래로 주워 모은 주옥 같은 우리 근대화가들의 작품의 흔적이 그저 그렇게 묻혀져 버려서는 안될 거라 생각한다.”며 이인성의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한 평론가는 “7·80년대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는 이인성의 그림이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다 이인성의 그림을 접해봤다는 이야기다. 대가의 그림을 가까운 곳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한다는 점에서도 미술관의 건립은 반드시 필요하다.”  고 미술관 건립의 당위성을 못박았다.

그는 또 미술관 건립이 현실이 되는 날 우리의 수준은 분명히 한단계 높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우리의 향토

이인성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고갱, 세잔 등의 인상주의가 일본 유학파를 통해 한국화단의 흐름이 되던 때였다. 이인성은 그 인상주의에 우리의 향토를 담아냈고 후기 인상주의를 ‘조선의 향토색’으로 수용한 화가로 인식됐다. 강렬한 색체와 한국문학적 상상력을 갖춘 그의 화풍은 이후 ‘이인성류’로 인식되어 근현대 한국미술의 한 흐름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가 작품을 통해 추구한 것은 그 스스로 말했듯이 우리의 ‘고향’이었다. 그 향토는 우리의 조국 산천을 의미하는 지리적 고향일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 우리의 정신의 고향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미술관과 대구미술관에서 6개월에 걸쳐 열린 전시회를 통해 많은 이들이 강렬한 색채로 우리의 아름다움을 표시한 이인성의 작품을 접하고 그의 진면목을 확인했다. 이 전시 이전에도 1972년 서울화랑과 2000년 호암갤러리에서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이인성 작 <사과나무>
이인성 작 <해당화>


다양한 곳에서 지금 이인성이 살아 움직인다

이인성의 예술세계를 더 가까이 공감하며 즐길 수 있어야한다는 몇몇 애호가들의 바램이 지난 덕수궁 전시 중 (사)이인성아트센터를 탄생시켰다.

이인성아트센터는 이인성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예술의 재조명을 통해 한국근대미술을 재해석하고 그와 함께 한국 회화계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미술작품 및 자료를 수집, 연구, 보존하고 이를 국제간 미술교류를 통해 한국회화의 세계화를 추진한다. 아울러 이에 관한 기념사업을 전개함과 동시에 한국문화의 창달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에 일환으로 대구의 봉산 문화거리에서 ‘이인성 판화 아트 상품전’이 열렸고, 서울 중구 중림동 천사갤러리에서는 이승철 팝아티스트가 이인성의 작품에 자신의 팝아트를 결합시킨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서울 강남 중아갤러리에서는 일명 ‘프린트베이커리’로  이인성 영인본, 판화, 엽서 등 아트 상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으며, 특히 이인성의 유품 중 꽃병, 벼루, 화구 등 그림의 소재로 사용한 물건들이 생생하게 살아 전시되고 있기도 하다. 또 이인성 일대기가 소설로도 쓰여질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렇게 이인성의 작품은 지금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형식으로 공개되고 있다. 이렇게 이인성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사라져야했던 이인성. 문화의 시대에 그는 다시 살아나 현실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해주고 있다.

(좌) 갤러리G 개막식(소병철대검검사장,이채원회장,김범일대구시장(좌측부터),
(우) 이인성-대구아트상품전

갤러리 천사와 중아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인성 작품 영인본과 팝아트 작가 이승철이 재구성한 이인성 작품(사진 속 인물은 팝아트 작가 이승철)


전문가 관리로 작품 훼손 더 이상 막아야...

역사 속의 미술작품은 우리 조상의 문화유산으로, 단지 미술학도들이 공부하려는 자료 외에 일반인 모두가 서로 보고, 느끼고, 계승 받아야 할 정신적인 보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알게된 더욱 안타까운 일은 작품의 소장자가 원작을 제대로 보관,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전문적으로 미술품을 관리할 수 없는 개인 소장처에서 전문적인 관리, 보관 기술없이 우리의 문화유산이 말 그대로 사장되어가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 문화계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루 빨리 이인성의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상할 기회를 주고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이인성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은영·임동현 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