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선의 문화비평] 백남준과 만난 이야기 VII - 두 번째 우주오페라
[천호선의 문화비평] 백남준과 만난 이야기 VII - 두 번째 우주오페라
  • 천호선 컬쳐리더인스티튜트원장/전 쌈지길 대표
  • 승인 2013.01.1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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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호선 컬쳐리더인스티튜트원장/전 쌈지길 대표
1985년 이원홍 KBS사장은 문화공보부장관이 되자 덴마크에서 공보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나를 해외공보관 기획부장으로 불러들였다. 통상 해외근무는 3년 이상이었으나, 1년반  정도 근무한  나를 서울로 불러들인 것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나는 85년 말 다시 문화예술국장으로 영전 되면서 백선생의 두 번째 우주오페라  <바이 바이 키프링, Bye Bye Kipling>의 제작을 측면 지원할 수 있었다.

<키프링>은 백남준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이원홍 KBS사장의 요청에 의해서 86년 서울 아세안게임을 계기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원홍사장이 문공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기자 후임 박현태 KBS사장은 막대한 외화 낭비라는 구실을 가지고<키프링> 제작을 반대하였다. 당시에는 외화 사용에 상당한 제한을 받던 때라  이원홍장관은 경제기획원장관으로 부터도 공격을 받아 난처한 입장에 처해졌고, 나는 전두환정권의 실세였고 내가 특별히 가깝게 모시고 있던 김윤환 문공부차관에게 은밀하게 부탁해서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김윤환차관은 이후에도 백선생 이 서울에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남몰래 구세주가 되어주곤 하였다. 백선생 자신도 미국 스텝진의 서울 체재비가 모자라서 그의 판화를 팔아 충당하였으며, 이 작업 때문에 서울에서 적지않은 빚을 지게 된다.

10월3일 아세안게임 마지막 마라톤경기에 맞추어 서울, 동경, 뉴욕을 인공위성으로 연결한 <바이 바이 키프링>은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그리고 둘은 절대 만날 수 없다”고 한 영국 시인 키프링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주제로 하였다. 뉴욕에서는 작곡가 필립 글래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록 가수 루 리드,  화가 키스 해링, 동경에서는 작곡가 류이치 사카모토,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아케, 서울에서는 가야금 황병기, 경기명창 김영임, 사물놀이, 무속인 최희아, 화가 이우환, 김창열 등이 참여하였다.  백남준은 동양인과 서양인의 만남을 한 화면에 병치시켰으며, 서울 한강변을 달리는 마라톤 경주 실황을  필립 글래스 음악에 맞추어 중계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만남에 음악과 스포츠의 만남을 교차시키기도 하였다.

백선생은 <키프링>을 계획하면서 마라톤 선두주자가 일본 선수일 경우 골인 장면을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단 손기정 선수가 뛰어 들어오는 장면으로 대치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단계에 가서 이 구상을 접었다. 결과적으로 일본 선수의 우승 장면이 두드려져 보였고, 10월 11일자 조선일보는 <키프링>이 예술을 내세운 일본의 선전 쑈라는 정중헌 기자의 비난 기사를 게재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선생은 송정숙 서울신문 논설위원과의 대담에서 “미국에서는 이제 악평 같은거 받음 받을수록 예술가가 자라지요. 달리나 피카소는 일생을 그걸로 성장했으니까. 나도 콘서트하다가 노출 때문에 경찰에도 가고 피아노 파괴했다고 파괴주의자라고 얻어맞았지만, 그거 개의하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이번도 신념 가지고 했으니까 부정적으로 나오면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운명이니까. 저절로 깨닫도록 기다려야지, 그렇잖아요?” 라고 반응하였다. 이와 관련 미술평론가 김홍희도 ‘예술과 비평’지에 ‘백남준의 위성예술은 시각적 환희나 민족적 자긍심을 충족시키려는 입장에서 볼 것이 아니라, 그의 비디오 아트의  핵심인 시간성 개념이나 소통의 문제를 다루는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내용의 평론을 기고함으로써, 백남준 예술의 특징인 소통의 미학을 강조하였다. 또한  무용평론가 김태원씨는 ‘춤’지에 조선일보 기사에 대하여 “우리가 진정 우려해야 힐 것은 국제사회에서 당당히 인정받고 있는 한국의 예술가를 정당한 비평 절차에 의존하지 않고  한낱 이방인이거나 일개 가십거리밖에 되지 않는듯 뒤튕겨버리는 그 무의식적  ‘문화적 폐쇠성’이다”라고 반박하였다.

<키플링>은 국민들에게 <미스터 오웰>만큼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으나, 백선생을 더욱 친근하게 만들어준 기회가 되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 ‘88서울올림픽의 동반행사였던 3번째 우주오페라 <손에 손잡고>의 훌륭한 리허설이 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