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독도화가’ 이정재 남서울대 교수] “독도의 원시적 생기 담아 화려한 색채로 표현”
[문화대상 수상자 인터뷰-‘독도화가’ 이정재 남서울대 교수] “독도의 원시적 생기 담아 화려한 색채로 표현”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3.01.1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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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탈리즘’ 화법으로 시대 이야기 그리고 싶어

     마부위침磨斧爲針.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힘든 일도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 있는 인내로 이뤄낸다는 옛말이다. 이정재 교수는 이 말을 가슴에 품고 평생 배움과 가르침의 길을 걸어왔다. 끝없이 학문의 지평을 넓혀가고, 융합해가며 미술, 신학, 철학 등을 두루 섭렵해왔다.

     특히 2009년 첫 독도그림 전시, 서울미술관 초대개인전 등 미술을 통해 독도 수호에 힘쓰고 있으며, 2011년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서 독도그림 개인전으로 세계에 독도를 알리고 있다.

     이렇듯 그는 거시적인 시각을 지닌 작가로서, 역사, 인물, 이웃 등을 냉철하게 기록하고자 노력해왔다. ‘미술은 우리시대의 모든 면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힘이 있다.’고 말하는 그를 인사동 서울미술관에서 만났다.

지난해 12월 충무아트홀에서 개최된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시상식. 이날 미술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정재 교수가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

-지난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수상 소감 부탁한다.
“뜻하지 않게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을 하게 돼 개인적으로 감회가 깊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수상을 계기로 작업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해보는 기회가 됐다. 작가에게 있어서 삶의 목표는 끊임없는 작업, 남과 다른 독창적 세계의 시연… 뭐, 이런 것들 아니겠나. 내 자신을 되돌아보니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것인가, 최소한으로 어떤 의미를 낳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지금까지는 그저 작품 전시하고, 그 안에서 평가받는 것에 그쳤는데, 이렇게 공공성을 지닌 언론매체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니 아주 고무적이다.”

이정재作 <촛대바위와 삼형제 굴 II> 캔버스에 유채 72.7×116.8cm 2009

그는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5주기에 전주에서 독재타도의 운동을 대규모로 진행하는 등  미술공부보다는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며 대학생활을 보내게 된다. 졸업 후, 다시 그림에 집중하며 전북도전입선과 춘향미술대전 특선 등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9년 그는 매스컴과 광고를 공부하러 도미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림을 시작한다. 대학원 입학을 위해 급히 만든 포트폴리오로 응시를 하지만 불합격 통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그림이었던가. 역부족이었다며 마음을 접으려는 그에게 뜻밖의 연락이 온다. 교수들의 재심을 통한 합격을 알리는 전화였다. 재아무리 급하게 준비한 포트폴리오였다지만, 그의 재능은 오롯이 드러나 있었던 것.

당시 그는 상당히 직설적인 화법을 통해 인간의 소외문제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마음이 앞서 열정만 넘치는 작업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는 멕시코, 스페인, 러시아 등 해외로부터 다수의 전시제의를 받았다. 무려 18m가 넘는 대작을 작업하기도 했는데, 해외 갤러리에서는 이런 그의 열성을 높이 샀다고. “대관, 도록 등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받았지만, 그림 운반 항공료만큼은 내가 내야 됐다. 그림크기가 어마어마하다보니 항공료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웃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해외전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한 후 그는 대학 강단에 선다. 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지금껏 재직해온지 16년째 접어들었지만, 처음부터 모든 게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만화, 영상 등 커리큘럼에 나를 적응시켜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면서 작업에 집중하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실적이 있어야 했기에 날조하는 그림들만 배설해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나는 항상 마음이 무거웠다.”

이정재作 <독도의 한반도 바위> 캔버스에 유채 250×475cm 2010

-독도 그림은 어떻게 시작했나?
“2007년 처음 독도를 가게 됐다. 단순 여행은 아니었고, 앞으로의 작업세계를 다지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독도를 둘러보며 난 독도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보기 좋은 예쁜 그림이 아니라, 시대를 얘기하는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말이다. 회화에서 색은 권력을 갖고 있다. 그 권력으로 나는 그저 그런 기록화가 아닌 상황을 그려내는 다큐멘탈리즘을 펼치고 싶었다.”

-‘다큐멘탈리즘’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 부탁한다.
“나의 작품 세계는 시대 얘기를 드러낸다. 다큐멘탈리즘이란 예술을 주관성에서 벗어나 지극히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걸 뜻한다. 자신의 감정, 주관, 미학적인 천착에 푹 빠지는 게 기존 예술이었다면, 나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나 냉철하게 역사, 인물, 이웃에 대한 이야기로 작업을 풀어나가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독도와는 다르게 화려한 색감과 밝은 색채로 독도를 표현하고 있다.
“대학생 때는 주로 인물을 그렸다. 당시 학생운동 시절이라 인간의 자유, 영혼 등 이런 걸 고민하며,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회화를 통해 드러내 보이고, 의미를 발견해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실은 내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뻔뻔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밖에서는 이한열, 박종철이 죽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그때의 작업을 살펴보면 색감이 어둡다. 인간의 고뇌, 번뇌를 표현할 때였으니까…. 색도 하나의 언어 아닌가. 내 절실한 감정만으로 표현한다면 그건 그저 나만의 문제로만 국한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다큐멘탈리즘을 통해 객관성을 갖고 독도의 원초적인 힘을 드러내고자 했다. 독도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시적인 자연의 색채, 창조됐을 당시의 생기 넘치는 색채를 표현하려다보니 원색 위주로 가게 됐다. 원색에서는 본디 색의 조화로움이 제일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색채 조화에 힘쓰며, 화려하고, 강하고 긍정적이고 용기 가득한 희망적인 색채로 흘러가게 된 거다.”

△1959년 전북 완주 출생 △현재 남서울대학교 교수 / 21C국제미술문화교류협회 회장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서울, 아제르바이잔, 미국, 일본, 터키 등 국제교류기획전 14회 개최 △독도 단독 작품 개인전 14회 △개인전 45회, 부스전 10회 등
그는 독도에 올라 우리의 시대적인 상황, 일본의 침략 야욕 등을 고민하며, 사실주의, 판화, 판타지 등 앞으로의 독도 작업 과정을 구분 지었다고 한다. “독도 그린 그림을 보면 대체적으로 어둡고 우중충하고 그렇더라. 물론 독도가 그렇게 보이는 면도 있지만…. 난 독도를 밝게 그려보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그의 독도그림은 원색을 사용해 작품 분위기가 환하며, 힘 있다. 일랑 이종상 화백께서도 내 밝은 독도 그림을 보시곤 많은 용기와 격려를 주셨다. 이종상 화백은 민족적인 성격이 짙으신데, 정작 후학들은 그렇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있으셨던 듯했다.

함께 독도를 그리는 동료 화가가 없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웃는다. 독도 그리면 작품 안 팔린다고. 그냥 있어도 머리 아픈 세상에 민족주의적인 작품에 관심 갖기가 쉽겠냐는 거다. 그는 독도는 자신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리는 거라고 말한다. 팔기 위한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스스로에게도 위안이 된단다. 물감, 캔버스 등 재료값만 해도 막대하지만, 이는 빚진 마음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여긴다고. 지난해 100호짜리 독도 작품 100점을 거는 전시를 가졌으며, 올해 10월에는 50호 독도 작품 100점 전시에 도전한다고 한다. 지난해 ‘100호 100점’ 전시에서는 비록 100점은 완성 못한 채 80여점을 전시했다고 그는 머쓱해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독도에 대한 애정,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해 시대와 역사를 말하려고 하는 그의 열정은 충분히 내보인 것이다.

지금까지 독도 작품전을 총 14번 가진 그는 앞으로 독도 관련 작가 모임을 결성하고 싶다고 했다. 화가뿐만 아니라 시인, 사진가 등 연대해 독도문화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예전에 일본 국회위원들이 독도로 들어가겠다고 할 때, 우리 정부에서 못 들어가게 했는데…, 난 오히려 100명이나 그렇게 많이 오라고 하면서 우리 정부가 대내외적으로 의연한 모습을 보였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독도와 관련해 한일간 포럼도 갖고, 대화를 나누면 얼마나 좋겠나.”

-황실문화재단 평택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황실문화재환수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내가 세조 아들 덕원군 17대손이다. 황실문화재단은 문화재 환수, 복원운동도 하고 있지만, 전통문화와 관련해 어진복원운동도 하고 있다. 공모전을 통해 작가를 선정, 매년 어진을 하나씩 그려내자고 하고 있다. 1900년 고종황제가 독도칙령을 내리는데, 고종황제는 독도가 우리 땅임을 천명하고 독도를 수호하려고 했던 거다. 조선왕조는 대한황실은 섬 하나까지도 명확하게 국제법에 준거한 법령을 선포하고 관리해왔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독도를 그리는 작업도 고종 황제의 노력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과 이어진다. 다만 현재 황실문화재단은 역사적 의식이 부족한 것 같다. 자신 스스로가 왕조가 도륙당하고 멸망당한 아픔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일본을 향해 직격탄을 날려야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해오고 있는 파인아트와 애니메이션 사이의 괴리는 어떻게 메우고 있나?
“학생들에게 역사, 꿈, 동물 등이 담겨있는 판타지 형태의 독도 관련 작품을 해보자고 했더니, 아이들이 그건 장편으로 제작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웃음) 언젠가는 꼭 시도해보고 싶다. 나는 매체가 중요한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림이든, 글이든, 영화든 표현해내면 되니까…. 신화와 독도를 접목해 그려낸다면 훨씬 더 문화적인 측면이 강해질 것 같다. 또 독도와 관련한 이야기 거리도 실제로 참 많다. 독도영유권 문제는 물론, 독도수비대 이야기, 독도로 가다가 배가 침몰해 세상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 등 그런 걸 발굴해내면 참 좋은 문화적 재료가 될 듯하다. 이는 단순히 섬 하나를 지키는 걸 넘어서 민족정신을 지켜나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중요하게 여기는 점?
“지금은 학부에서 캐릭터, 배경미술, 드로잉 등 학생들과 함께 실기에 임한다. 요즘은 학생들이 교수보다도 얼마든지 더 잘 그릴 수도 있는 세상인데, 말로만 하는 미술교육은 넌센스다. 교수들도 학생들과 직접 함께 그려야한다. 대학원에선 철학사, 미학, 예술사, 예술론, 영상, 비평 등을 가르치고 있다. 아, 그리고 이번 방학 때도 학부생들에게 일주일에 책 한권씩 읽고 학교에 나오라고 시켰다. 방학이 없다.(웃음) 대학생들은 단순 기능공이 아니다. 이 세상을 판단하고, 구별 짓고, 옳은 편에서 자신의 삶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싶다.”

-앞으로의 전시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올해 10월 독립기념관에서 50호 작품 100점 전시를 앞두고 있다. 또 12월에는 일부 작품을 인사아트센터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이외에도 현재 보훈처와 6.25 참전군 초상화전과 관련해 얘기가 오가고 있다. 이 전시를 꼭 UN에서 하고 싶다. 특히 올해 종전 60주년을 맞아 휴전선 풍경과 눈 쌓인 백두산을 그리고 싶다.”